* 브런치에서 연재를 시작한 지 3년, 어느덧 100번째 글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언제나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음악은 아티스트 개인의 서사가 감상에 큰 영향을 주는 예술 형식이다.도피성의 개인주의자 선언으로 읽힐 수 있었던 앨범 [Mr. Morale & The Big Steppers]는 그 화자가 현 시대 흑인 커뮤니티의 구심점과 같은 영웅적인 존재로 추앙받던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였기에 입체적이고 흥미로운 작품이 되었고,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예쁘고 강한' 트랜스젠더로서 적극적으로 사회문화적 담론을제기하며 소외된 이들에게 용기를 주었던 키라라(KIRARA)였기에 앨범 [Sarah]의 건조한 전자음이 따뜻한 위로로 다가왔듯이 말이다.
그만큼 아티스트가 가진 배경 서사는음악의 호소력 형성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케이팝(K-POP)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케이팝 음악에서 가창자는기획된 캐릭터를'연기'하고, 청자 역시 음악 속의 화자와 아티스트가 별개의 존재라는 점을 인지한 채 감상한다. '빛이 나는 솔로'라며 솔로 라이프를 예찬하는 곡을 발매한 다음 날 카이와의 열애설이 보도된 제니의 해프닝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다. 그런 면에서대부분의 케이팝은 자전 소설이라기보다는 철저하게 연출된 캐릭터 무비에 가까운 음악을 지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는 케이팝 아티스트들이 보다 다채로운 디스코그래피를 그려나갈 수 있게 하는 중요한 특성이지만, 한편으로는 음악에 대한 정서적 몰입의 강도를 제한하는 태생적 한계이기도 하다. 케이팝이 휘발적으로 생산되고 소비될 뿐인 인스턴트 음악이라는 일부의 비관적인 인식은 바로 이 점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한 신인 걸그룹은 곡 안에서 연출하는 캐릭터성에 팀의 고유한 서사를 투영해 한층 설득력 있는 스토리텔링을 선보이며 케이팝 작사법의 새로운 기조를 제시한다. 바로 하이브 레이블스(HYBE LABELS) 소속 기획사 쏘스뮤직의 르세라핌(LE SSERAFIM)이다.
뉴진스와 아이브 등 화제성 높은 신인 걸그룹이 다수 등장한 2022년이었지만, 르세라핌만큼 험난한 신년을 보낸 팀은 없을 것이다. 조작 논란으로 얼룩진 아이즈원 출신의 김채원과 사쿠라, Mnet 서바이벌 프로그램 <프로듀스48>에 출연해 좋지 못한 이미지로 탈락했던 연습생 허윤진을 포함한 낯선 조합의 멤버 구성은 데뷔 이전부터 우려의 시선을 받았으며 데뷔곡 'FEARLESS'의 노출도 높은 의상은 선정성 논란에 휘말리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멤버 김가람의 학교폭력 의혹까지 제기되며 대중의 여론은 최악으로 치닫았다. 쏘스뮤직은 미진한 대처로 논란을 더욱 키웠고 뒤늦게 김가람과의 전속계약을 해지하고 나서야 간신히 여론을 잠재울 수 있었다. 데뷔곡이 차트에서 역주행하며 어느 정도 눈에 띄는 성과를 올리기는 했지만 필요 이상으로 잡음이 많았다.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은 출발이었다.
그러나 르세라핌은 발칙하게도 이 굴곡진 서사를 음악 안으로 끌고 들어와 일종의 자전성을 부여하는 장치로 변용하며 오히려 팀의 약점을 장점으로 승화시킨다. 가령 'FEARLESS'에서 허윤진이 맡은 '관심 없어 과거에 모두가 알고 있는 그 트러블에' 라는 가사는 비록 명시적으로 그 자신을 지칭하고 있지는 않지만 자연스럽게 청자가 이미 알고 있는 현실의 논란들을 상기시킨다.
한 발 더 나아가 지난 10월 공개된 후속곡 'ANTIFRAGILE'은 더욱 본격적으로 화자와 가창자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전략을 취한다. 과거 발레리나로 활동했던 멤버 카즈하는 '잊지 마 내가 두고 온 toe shoes'라는 가사로 자신의 과거 경력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강한 구매력과 적극적인 미디어 활용으로 대표되는 독특한 팬 문화로 케이팝 역사에 흥미로운 족적을 남긴 팀 아이즈원의 일원으로 활동한 이력이 있는 사쿠라와 김채원은 '무시 마 내가 걸어 온 커리어'라는 가사로 인상적인 스웨깅을 선보인다.
르세라핌은 기획사에 의해 제작된 주체적이고 당당한 캐릭터를 곡 안에서 '연기'하고 있을 뿐이지만, 그들의 실제 서사를 부분적으로 반영한 가사로 인해 청자는 허구와 현실을 분리해 인식하는 데에 혼동을 겪게 된다. 매 앨범 인트로마다 멤버들의 국적(한국, 미국, 일본)을 따라 3개 국어가 등장하는 것 역시 이 전략의 일환이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더욱 탄탄한 핍진성을 구축한 르세라핌의 픽션 세계는 마치 자전적인 소설처럼 매우 수월하게 청자를 몰입시킨다.
이처럼 르세라핌은 의도적으로 케이팝의 기존 문법을 살짝 비튼 메타픽션적 방법론으로 음악적 설득력을 강화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품은 논란마저도 영리하게 전유하여 서사의 일부로 만드는 흥미로운 행보를 선보인다. 데뷔 전부터 꾸준히 우여곡절에 시달렸던 쏘스뮤직에게는 그야말로 최선의 전략이었던 셈. 어쩌면 아티스트에게 논란은 불가피한 숙명과도 같겠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것을 묵살하기보다는 그것을 음악 내에서 솔직히 마주하고 극복하는 정면 돌파의 길이 더욱 건강한 방법 아닐까. 르세라핌은 '내 흉짐도 나의 일부'라며 모든 과거를 받아들였고, 대중 역시 비로소 그들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신선한 작사 스타일뿐만 아니라 팀의 굴곡을 음악적으로 승화시키는 새로운 대처 방식을 선보인 르세라핌의 향후 행보를 주목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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