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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빈 May 26. 2023

에스파의 '달라질 결심', 붕괴와 미결로 남다





에스파가 돌아왔다. 지겨운 '광야' 콘셉트는 과감하게 버렸다. 대신 최근 가장 핫한 키워드인 ‘하이틴’을 차용했다. 결과적으로 "Spicy"는 음원 차트 최상단을 탈환했고, 그들은 원하던 바를 이뤄냈다. 허나 그 성공엔 어딘가 찝찝한 뒷맛이 남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1) "Spicy"의 탄생 배경


솔직히 말해 보자. 더 이상 '광야' 를 유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블랙 맘바”를 위시한 에스파의 버추얼 판타지 세계관은 분명 그들의 초기 커리어를 튼튼하게 견인한 원동력이었지만, 2022년에 이르러서는 서서히 그 효력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작년 발매된 “Girls”가 준수한 음악적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대중에게 외면받았던 것이 바로 그 증거다. 당장 에스파 멤버들도 방송에서 세계관을 언급하기 부끄러워하는 마당에 무엇을 더 기대하겠는가.



더군다나, 에스파를 둘러싼 외부적 상황 역시 녹록지 않았다. 그들이 데뷔했던 2020년 말은 4세대 걸그룹이 본격적으로 가시권에 진입하기 직전 세대교체의 과도기로서, 속된 말로 '빈집'이나 다름없는 무주공산의 상황이었다. 실제로 에스파가 "Next Level"로 본격적인 세대교체의 신호탄을 터뜨린 시점에서 직접적인 경쟁자라 할 만한 팀은 비슷한 시기 "ASAP"이라는 메가히트곡을 내놓았던 스테이씨뿐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매니악한 세계관을 앞세운 실험적인 전략을 우직하게 밀고 나갈 만한 충분한 여유가 있는 환경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21년 말 아이브의 "ELEVEN"을 시작으로 4세대 걸그룹의 르네상스가 시작되었고, 뉴진스, 르세라핌, 엔믹스 등 거대 자본뿐만 아니라 하이키("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 피프티 피프티("Cupid")를 위시한 초소형 기획사들마저 연이어 약진하며 케이팝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가 확립되었다. 22년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열기를 더하며 이어지고 있는 이 춘추전국시대의 형국은 단 한 번의 실패조차 치명적으로 다가올 수 있는 치열한 경쟁 체제를 낳았는데, 최고의 인기를 선점하고 있던 에스파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Girls” 미니앨범은 여자 아이돌 최초로 앨범 초동 판매량 100만 장을 돌파하며 거대한 팬덤의 화력을 과시했지만, 정작 대중성의 지표인 음원 차트에서는 예전만큼의 경쟁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전작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방법론이 대중에게 매너리즘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에스파의 화제성은 경쟁자인 ‘뉴아르’(뉴진스-아이브-르세라핌) 트로이카에 비해 다소 축소되었다. 그들은 이 불리해진 형세를 역전시킬 돌파구를 빠른 시일 내에 찾아내야만 했다.



또한 에스파의 소속사인 SM엔터테인먼트의 상황 역시 한층 더 부담으로 다가왔다. 행동주의 펀드 얼라인파트너스로부터 촉발된 SM 경영권 이슈는 창업주 이수만과 하이브, 카카오 등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히며 첨예한 법률적 분쟁으로 번졌고, 소속 아티스트들마저도 미래에 대한 우려를 표하는 등 회사의 앞날을 쉽사리 예견할 수 없는 혼란이 야기되었다.



이런 와중에 에스파의 멤버인 카리나와 윈터를 차출해 만든 유닛 그룹 갓 더 비트(GOT the beat) 역시 흥행 참패를 거두자 조급한 마음은 더욱 커졌다.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다. 에스파를 둘러싼 모든 상황들이 즉각적인 성과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번 컴백은 에스파에게 주어진 마지막 골든타임이었다.


(2) 에스파의 '달라질 결심'


그렇기 때문에 과감해져야만 했다. 이지-리스닝 음악과 직관적인 콘셉트를 요구하는 대중의 기조는 에스파의 그것과는 정반대였다. 용어부터 낯선 복잡한 세계관과 공격적인 음악으로부터 탈피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SMCU(SM Cultural Universe)라는 브랜드까지 출범하며 야심차게 쌓아올린 스토리텔링이 정체되고 있음을 인정하는 일은 분명 쉽지 않았을 테지만, 결국 일발역전을 위해 에스파는 과거의 에스파성(性)으로부터 잠시 ‘헤어질 결심’을 했다.



이 노선 변경을 정당화하기 위해 가상공간에서 블랙 맘바와 싸우던 에스파 멤버들이 전투를 끝내고 현실 세계로 넘어왔다는 설정을 도입했다. 그리고 앨범의 인트로 트랙 “Welcome to MY World”는 극적인 오케스트레이션과 웅장한 편곡을 동원해 만들어낸 압도적인 몰입감으로 이 변화를 무리 없이 납득시킨다. SM의 노련한 기획력이 돋보이는 지점이다.



이렇게 현실 세계에 매끄럽게 연착륙한 에스파의 제2막은 아메리칸 틴에이저 팝 컬처의 밑그림 위에 펼쳐진다. 쨍한 금발에 핑크 머리띠를 쓰고 사물함 안을 들여다보는 카리나의 비주얼은 고전적인 미국 하이틴 무비의 잔향을 불러오고, 마천루의 숲을 담은 뮤직비디오의 로케이션은 노골적으로 뉴욕의 공간성을 겨냥한다. 보다 높아진 가사의 한영혼용 기조 역시 서구적 이미지를 더한다.



음악적으로는 대중적 테이스트를 전면 수용했다. 윈터의 카랑카랑한 보컬이 날카롭게 파고드는 후렴이 대표적으로, 랩이 아닌 보컬로 후렴을 온전히 구성했다는 점에서 전작들과는 명확히 차별화되는 전략을 보여 준다. (놀랍게도 에스파의 타이틀 트랙들 중에 '후렴 멜로디'라고 할 만한 것을 지닌 곡은 "Spicy"가 최초이다) 이에 더해 "Don't stop 겁내지 마"로 시작되는 포스트코러스의 선명한 장조 멜로디는 에스파보다는 레드벨벳의 노래처럼 느껴질 만큼 친절하게 청자에게 접근한다.



그러나 "Spicy"를 단순히 기존의 정체성을 버리고 대중의 입맛에 영합한 작품으로 치부하는 것은 오독에 가깝다. 기존 방법론의 원형을 어느 정도 유지한 채 대중적 접근법을 절충하고 있기 때문이다. 디스토션을 잔뜩 먹여 뾰족하게 다듬은 신스 리드의 질감은 이전 작품들의 사운드 기조를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텁텁한 단조 멜로디로 변화구를 던지는 후렴 역시 마찬가지로 SM 특유의 악취미적 테이스트가 엿보인다.


이러한 점에서 "Spicy"는 전략적으로 최선의 선택이었다. 시장의 판도를 예리하게 읽고 대중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꿰뚫는 영민한 A&R은 SM의 노련한 관록을 드러낸다. 그 결과 원하던 대로 다시 음원 차트를 점령해 냈으니, 에스파의 '달라질 결심'은 표면적으로는 성공이라고 할 수 있겠다.

 

(3) 붕괴와 미결로 남다


그러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지속 가능성을 검토한다면 전망은 다소 회의적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Spicy"의 성공은 카리나와 윈터 개인의 높은 보편적 호감도와 알기 쉬운 하이틴 콘셉트에 대중이 기계적으로 응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단기적으로 상황을 뒤집고 화제성을 회복하는 데에는 용이하지만, 이것이 에스파라는 브랜드의 메인 플랜으로 채택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유기적으로 작동하며 생명력을 공급하던 콘셉트와 음악의 협업 구조가 '붕괴'되었다. 쉽게 말해, “Spicy”라는 곡을 하이틴 문화의 컨텍스트로 읽어내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많이 양보했다지만 여전히 거칠고 공격적인 질감의 악기들로 트랙을 채운 사운드를 뉴욕의 10대 소녀들과 연결하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대체 두 요소가 맞물리는 지점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를 무마하고자 에스파 멤버들이 현실세계로 떨어졌다는 설정을 급히 투입했지만, 서사의 진행을 위해 하이틴 콘셉트를 차용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정반대로 하이틴 콘셉트를 사용하기 위해 세계관을 도구적으로 호출했다는 인상이 강하다. 콘셉트와 음악이 긴밀하게 상응하며 철저한 당위성을 획득했던 전작들의 장점을 잃어버린 모양새다.



둘째로, 이로 인해 지속 가능한 에스파성(性)에 대한 논의가 ‘미결’의 상태로 중지되었다. 이 시점에서 필요했던 것은 효력을 잃어가는 에스파성에 대한 재고와 그것을 대체할 장기적인 대안이었다. 그러나 “Spicy”는 현재 4세대 걸그룹의 트렌드를 에스파의 문법으로 번역한 미봉책일 뿐이고, 보다 발전된 비전을 제시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에스파는 SM의 시장 영향력을 복원할 유일한 카드다. 이를 위해서는 외부 동향 의탁하는 안전한 선택 대신 다시금 산업을 선도하는 혁신이 필요하다.



결과적으로 에스파는 과감한 결단을 통해 입지를 일시적으로 회복했지만 영구적인 모멘텀으로 이어질 건강한 방향성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앨범의 마지막 트랙 "'Til We Meet Again"의 가사는 현실 세계와 작별을 고하고 가상 세계로 돌아가는 전개를 암시하고 있는데, SM 역시 “Spicy”의 전략이 두 번 이상 활용될 수 없는 종류의 것임을 인지하고 있다는 증거로 보인다. 붕괴와 미결의 그늘에서 숨을 고르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에스파는 영속성의 궤도를 되찾고 다시 도약할 수 있을까? 그룹의 장기적인 성패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로에 선 그들의 다음 선택은 과연 어떠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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