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lllie, [the Billage of perception: chapter three], 미스틱스토리, 2023
빌리, 'EUNOIA' : 9.0
우선, 필자가 <EUNOIA>에 대해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있는지 알리고 이 글을 시작해야겠다. 필자는 빌리의 <EUNOIA>를 단순한 수작 정도가 아니라, 에스파의 <Next Level>, 뉴진스의 <Attention>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4세대 걸그룹 프로덕션 최고의 찬란한 음악적 성과이자 2020년대의 케이팝을 통틀어서도 독보적인 수준의 걸작으로 평가하고 있다. 드디어 '올해의 노래'에 걸맞는 작품이 등장했다.
'윤종신 기획사'로 더 익숙할 미스틱스토리가 처음으로 제작한 신인 걸그룹 빌리(Billlie)는 대중에게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이름이지만,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알음알음 입소문을 타고 그 잠재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화려하고 세련된 그들의 음악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4세대 걸그룹 시장 내에서도 눈에 띄는 유니크함을 자랑했다.
이어 세련된 일렉트로니카 사운드와 캐치한 멜로디로 중무장한 <GingaMingaYo>는 무대 직캠에서 드러난 멤버 츠키의 다채로운 표정 연기가 여러 커뮤니티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어낸 데에 힘입어 음원 차트에서 역주행을 기록했다. 힙스터 취향의 걸그룹이지만 대중적 호응까지 이끌어낼 수 있는 저력을 가지고 있음을 입증한 쾌거였다.
하지만 빌리의 음악적 역량은 싱글 단위가 아니라 앨범 단위에서 가장 빛난다. 케이팝이 배출한 최고의 하우스 넘버 중 하나인 <flipp!ng a coin>, 허를 찌르는 차이코프스키 샘플링으로 기묘함을 극대화시키는 <everybody’s got a $ECRET>, 환상적인 신디사이저와 멜로우한 탑라인을 세련되게 엮어낸 팬송 <believe>와 같이 개별 수록곡의 완성도가 대단히 뛰어날 뿐만 아니라, 빌리 러브(Billlie Love)라는 실종자를 찾는 미스터리 세계관을 세련된 노랫말과 사운드로 풀어내는 서사 전달력 역시 탁월하다. 케이팝 아이돌에게 세계관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지만, 빌리만큼 세계관에 '진심'인 그룹은 찾아보기 어렵다. 음악 내에서 세계관을 자연스럽고 세련되게 풀어내는 실력만큼은 그 에스파(aespa)와도 비견될 만한 수준이다.
때문에 필자는 2022년 시점에서 이미 빌리를 뉴진스와 함께 4세대 걸그룹 내에서 가장 음악적 잠재력이 높은 팀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그들은 앨범의 완성도나 탄탄한 세계관에 비해 그 잠재력을 온전히 꽃피우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세련되고 실험적인 수록곡들에 비해, 타이틀 곡은 대중성과 독창성 사이에서 마땅한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애매한 방향성의 결과물을 내놓았기 때문. 이 점은 공원소녀(GWSN)나 이달의 소녀(LOONA) 등 빌리처럼 수록곡의 완성도가 걸출했던 타 걸그룹에게도 똑같이 나타났던 문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2023년 3월 28일 <EUNOIA>가 발매되기 이전의 이야기다.
단적으로, <EUNOIA>는 빌리의 모든 음악적 역량을 응집하여 찬란하게 꽃피워낸 놀라운 결과물이다. 마법적인 화음과 세련된 신스 음을 바탕으로 다채로운 장르의 요소들을 조화롭게 엮어내 역작이 탄생했다. 가히 케이팝 사운드 프로덕션의 교과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차진 디스코 리듬 위로 꿀렁대는 베이스와 신디사이저를 매끈하게 결합시키는 <EUNOIA>의 편곡이 가장 빛나는 지점은 후렴 파트다. 보컬의 목소리를 견고하게 세공해 여러 겹의 화음으로 감싼 코러스가 풍성하고 환상적인 청각적 쾌감을 선사한다. 케이팝에서는 레드벨벳(Red Velvet), NCT 등 주로 SM 아티스트들이 이러한 구성을 보여 주는데(빌리가 소속된 미스틱스토리의 최대 주주가 SM이라는 사실이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테다), 많은 네티즌들이 빌리의 음악이 레드벨벳의 음악을 연상시킨다고 이야기하는 이유 역시 이 기조에서 기인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EUNOIA>의 빌리는 레드벨벳의 방법론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화음을 단순히 멜로디를 예쁘게 장식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트랙의 팽팽한 리듬감을 형성하는 도구로까지 활용하고 있다. 본작에서 가장 경이로운 구간이라고 할 수 있는 후반부를 주목해 보라. 올드스쿨 풍의 악기들을 신스 팝의 질료와 절묘하게 엮어 넣은 비트가 매섭게 질주하는 동시에, 엇박과 정박을 가리지 않고 변칙적으로 배치된 백보컬이 리듬을 밀고 당기면서 청자의 몸을 절로 들썩이게 한다. 브릿지 이후 이 1분의 짧은 시간이 자아내는 강렬한 몰입감은 가히 놀라운 수준이다.
이처럼 보컬을 철저하게 하나의 악기로서 활용했지만, 멤버들의 존재감 역시 잃지 않았다. 유니크한 보이스로 씬 스틸러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츠키를 필두로, 탄탄한 발성으로 귀를 확실히 사로잡는 메인보컬 하람, 유려한 래핑을 통해 곡을 주도하는 메인래퍼 문수아 등 개개인의 기량이 성공적으로 조명된다. 이렇게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인상적인 것은 이처럼 최고 수준의 완성도를 자랑하는 트랙이 국내 프로듀서의 손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EUNOIA>의 크레딧에는 프로듀싱팀 PixelWave(픽셀웨이브)와 싱어송라이터 YOUHA(유하)의 이름이 올라와 있는데, 이들은 모두 한국인이다. 소위 '외토벤(외국+베토벤)‘이라고 불리는 해외 작곡가들에게 곡을 받아 오는 것이 태반인 케이팝 씬의 경향과 달라 더욱 반갑다. 빌리는 <RING ma Bell>을 제외한 모든 타이틀곡을 한국인 프로듀서들에게 맡기고 있는데, 그럼에도 해외 작곡가의 작품 못지않은 뛰어난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고무적인 성과라 할 수 있겠다.
결과적으로, 빌리는 <EUNOIA>를 통해 비로소 팀의 잠재력을 완벽히 만개시켰으며, 압도적인 완성도의 사운드와 치밀한 편곡으로 전세계의 케이팝 리스너들을 놀라게 할 만한 킬링 트랙을 완성했다. 단연코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세련된 음악을 선보이고 있는 걸그룹은 빌리라 할 수 있다. 4세대 걸그룹이 연 케이팝의 음악적 르네상스는 <EUNOIA>에 이르러 그 절정을 맞이했다. 중소 기획사에서 가진 것 없이 시작했지만 매력적인 음악 하나로 결국 리스너들을 설득시켰던 수많은 선배 그룹들처럼, 빌리와 미스틱스토리의 조용하지만 꿋꿋한 발걸음은 언젠가 그 결실을 맺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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