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정빈 Jan 11. 2022

[결산] 2021 K-POP 올해의 노래: 1~10위


코로나바이러스가 가져온 무겁고 깊은 우울을 잠시나마 달래 줄 수 있는 것은 훌륭한 문화예술 작품일 것이다. 그 중에서도 이미 하나의 문화 영역이자 종합예술로 자리잡은 K-POP 음악은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에 갇힌 세계인들에게 즐거움과 희망을 선사해 주고 있다. '정라리의 케이팝읽기' 본 결산에서는 2021년 한 해, 즉 2021년 1월 1일부터 2021년 12월 31일 사이에 발매된 모든 K-POP 트랙 중 '베스트 트랙' 20선을 선정하였다.


* 본 글의 순위 및 칼럼은 정라리 개인이 선정하고 집필한 것으로, 개인의 주관적인 견해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 앨범의 타이틀곡 또는 싱글된 곡만을 선정 대상으로 하였습니다. 따라서 수록곡들은 선정 대상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 '정라리의 케이팝읽기'는 음악과는 별개로 리뷰 대상 아티스트의 논란과 범죄 행위를 일체 옹호하지 않습니다.

* 본 글의 궁극적인 목적은 특정 아티스트에 대한 무조건적인 옹호 혹은 비난이 아니라 케이팝 씬에 대한 깊고 넓은 관심을 촉구하고 풍부한 논의를 생산하는 것임을 유념하여 읽어 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여자)아이들, [I burn], 큐브엔터테인먼트, 2021

10위

(여자)아이들, '화'


매 컴백 때마다 변화무쌍한 모습을 선보이는 팔색조의 팀 (여자)아이들의 전작 '덤디덤디'는 대중적인 흥행 성과에도 불구하고 음악적으로는 실망을 감출 수 없는 곡이었다. 언제나 번뜩이는 감각으로 클리셰를 부수며 성장해 온 그들이 오히려 클리셰로 회귀해 버린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 세대 아이돌 중 프로듀서로서 가장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고 있는 전소연답게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개량한복을 입고 나타난 (여자)아이들은 다시금 예전처럼 빼어난 음악, ''로 브랜드 가치를 더욱 탄탄히 다지는 데에 성공했다.


영어 한 줄 없이 한국어로만 쓰인 가사는 한 편의 고전 시가를 읽는 듯 아름다운 시어들로 가득하다. 특히 소연은 운율을 맞추어 써내려간 시적인 노랫말을 수려한 플로우에 담아내는 치밀한 래핑을 구사하며 이번에도 다시금 자신의 독보적인 능력을 과시해 보인다. 콘셉트를 기획하고 소화하는 능력이 이처럼 탁월하니 아무리 갑작스런 노선 변화라도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불꽃이 그려진 앨범 커버와 제목과는 달리 ''는 얼어버릴 듯 서늘하고 차가운 분위기의 곡인데, 이러한 반전 양상은 음악 내에서도 계속된다. 무거운 808 베이스는 도입부부터 청자의 귀를 강하게 잡아끌고, 여러 동양적 사운드 소스들은 뭄바톤 리듬과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여지껏 없었던 깊은 몰입을 유도한다. 소연은 양풍 콘셉트라는 이유로 전통 악기에 국한되지 않고 타 장르의 다양한 요소를 자유롭게 가져와 융합시킨다. 이 과감한 크로스오버는 오직 그녀만이 가진 유니크한 작곡 재능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여자)아이들이 여러 콘셉트를 시도하면서도 변화에 매몰되지 않고 성공가도를 달려올 수 있었던 이유다. ''를 통해 우리 (여자)아이들이 얼마나 특별한 팀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우주소녀, [UNNATURAL], 스타쉽엔터테인먼트, 2021

9위

우주소녀, 'UNNATURAL'


올해로 어느덧 7년차 걸그룹이 된 우주소녀. 연차가 쌓일수록 점점 눈에 띄게 기량이 성숙해지고 있는 그들은 2020년 발매된 [Neverland] 앨범의 수록곡 'Pantomime'으로 그 음악적 성장의 방점을 찍었다. 한 편의 연극을 보는 듯 변화무쌍한 구성이 돋보이는 'Pantomime'은 수록곡이 아니었더라면 단연코 '올해의 노래'로 선정되어도 손색이 없을 법한 마스터피스였다. 이 곡을 기점으로 우주소녀는 보일 듯 말 듯하던 벽을 깨고 완전히 한 단계 스텝업한 모습을 보여 주는데, 그 연장선에 바로 'UNNATURAL'이 위치한다.


'UNNATURAL'은 간단히 말해서 '버릴 구간'이 없는 트랙이다. 몽환적이고 차분한 무드로 시작되는 벌스, 앞에서 쌓아 올린 텐션을 다시 큰 낙차로 떨어뜨리곤 거친 베이스와 함께 다시 긴장을 고조시키는 프리코러스, 그리고 에너제틱하게 뻗어 나가는 보컬과 풍성하게 채워 넣은 세련된 비트가 멋지게 맞물리는 후렴까지. K-POP 음악 특유의 역동성을 극대화 다이나믹한 전개가 마치 즐거운 롤러코스터 어트랙션 같다. 프리코러스 멜로디와 코러스 비트가 재조립되며 축포를 쏘아 올리는 최후반부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피날레.


억지스런 맛 없이 시원하게 꽂히는 캐치한 멜로디는 우주소녀가 오래 전부터 가장 자신있던 것이었다. 그 장점이 역동적이고 세련된 사운드 프로덕션을 만나니 이 정도로 확실한 폭발력을 지닌 트랙이 탄생했다. 다채로운 음색이 공존하는 다인원 팀의 특성을 백분 활용해 잠시도 지루해질 틈을 주지 않는 'UNNATURAL'은 6년 간의 여정 끝에 마침내 히어로가 된 소녀들이 선보이는 최고의 블록버스터다.



OnlyOneOf, [Instinct Part. 1], 에잇디엔터테인먼트, 2021

8위

온리원오브, 'libidO'


K-POP 아이돌에게 섹슈얼리티란 양날의 검과 같다. 아이돌을 유사연애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팬층의 비중이 적지 않은 한국 시장의 특성상 대부분의 아이돌은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 채 살아가는데, 그럼에도 시장은 모순적이게도 아이돌에게 어느 정도의 성적인 어필을 요구한다. 천민자본주의와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동침이 낳은 이 우스운 패러독스는 결국 저항을 맞았고, 점차 성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성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K-POP 작품들이 조금씩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작은 변화의 물결은 마침내 온리원오브의 'libidO'를 탄생시켰다.


성적 본능, 또는 성적 충동을 뜻하는 용어를 제목으로 내세운 파격적인 선택을 한 'libidO'는 어린 아이의 성욕이 발달하는 과정을 구강기-항문기-남근기로 구분한 프로이트의 리비도 이론처럼 섹션별로 선명하게 다른 결을 보이는 사운드가 특징적인 트랙이다. 특히 몽환적인 프리코러스 이후 갑작스럽게 무드가 전환되는 후렴 파트는 그 백미. 디스토션을 잔뜩 건 채 위협적으로 울렁이는 비트가 귀를 찌를 때 청자는 국내 대중가요에서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던 종류의 사운드를 경험한다. 이는 섹슈얼리티를 정면으로 거론하는 온리원오브의 대담함과 결합해 역설적인 관능을 형성한다.


개인의 욕망이 거세된 채 마치 평면적인 가상 인물처럼 행동해야 했던 아이돌, 극도로 매끈하게 다듬어진 사운드가 오히려 낯선 위화감을 안겨 주던 K-POP 음악. 이제 온리원오브는 끈을 사용해 서로를 묶는 등 수위 높은 퍼포먼스를 펼치고, 차라리 소음에 가까울 정도로 난잡하고 울퉁불퉁한 사운드를 들려 주며 시각적-청각적인 불편을 선사한다. 가장 금기와 가까운 곳까지 접근하며 2021년의 K-POP이 수용할 수 있는 범위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이 파격적인 도발 행위는 청자로 하여금 K-POP 내에서의 섹슈얼리티에 대해 고뇌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그 행위가 당신의 눈에 어떻게 보이든, K-POP 산업이 품은 근본적 모순의 끝은 언젠가 도래할 것이 균열은 이미 시작되었다. 온리원오브의 질문은 그 묵시록의 시작일 뿐이고, 문화는 반드시 종말의 날을 대비해야만 한다.



Billlie, [the Billage of perception : chapter one], 미스틱스토리, 2021

7위

빌리, 'RING X RING'


아이즈원 출신의 장원영과 안유진이 소속된 스타쉽의 신인 걸그룹 아이브(IVE), Mnet <걸스플래닛999: 소녀대전>의 프로젝트 걸그룹 케플러(Kep1er)를 비롯해 큐브의 라잇썸, RBW의 퍼플키스, 유명 프로듀서 라이언 전의 버가부 등 굵직굵직한 신인 걸그룹이 쏟아져 나온 2021년. 새로운 세대의 서막을 알리는 이 거대한 뉴 웨이브 속에서 윤종신이 창립한 연예 기획사 미스틱89가 내놓은 첫 번째 걸그룹 빌리(Billlie)는 어딘가 달랐다.


곡의 시작과 함께 울려퍼지는 위협적인 사이렌 소리는 일반적인 걸그룹의 노래라기보다는 보이그룹 중에서도 스트레이키즈(Stray Kids)처럼 강렬한 '매운맛'을 내세우는 팀에게나 찾아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뾰족하게 다듬어진 채 청자를 폭력적으로 몰아붙인다. 이에 둔탁한 베이스까지 가세함에 따라 전개가 더욱 과격해지며 자칫 피로해질 수 있는 구성임에도 몽환적인 오르골 소리와 츠키의 낭랑한 음색을 변칙적으로 배치하며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노련한 프로덕션 덕에 곡의 긴장감이 팽팽하게 유지된다. 후렴을 맡은 메인보컬 하람은 신인답지 않은 성숙한 보컬로 이민수 작곡가 특유의 조 멜로디를 유려하게 소화해 내며 곡의 완성도를 한층 더한다.


K-POP 씬에서 보기 드문 호러 미스터리 콘셉트를 선보인 빌리는 브라운아이드걸스와 아이유 이후 이민수가 선택한 세 번째 페르소나서 부족함 없는 기량을 선보였다. 치밀하게 설계된 'RING X RING'은 걸그룹의 음악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거칠고 저돌적인 사운드로 보이그룹의 마초성을 전유하여 빌리라는 세계관 안으로 편입시키고 전례 없이 유니크한 데뷔를 완성시켰다. 고민의 여지 없이 올해 가장 신선한 충격을 안겨 준 신인.



ENHYPEN, [BORDER : CARNIVAL], 빌리프랩, 2021

6위

엔하이픈, 'Drunk-Dazed'


새빨간 피가 벽에서 주르륵 흘러 내리는 텅 빈 방 안에 멍하니 서 있는 소년. 천장에는 핏물이 고여 뚝뚝 떨어지고 이윽고 피가 비처럼 쏟아져 내린다. 소년은 그대로 쓰러지고 카메라는 붉은 피가 넘쳐흐르는 분수에 앉아 피로 가득한 와인잔을 들고 있는 한 남자를 비춘다. 지금까지 설명한 이 장면들이 그로테스크한 고어 영화가 아니라 K-POP 아이돌의 뮤직비디오 속 한 장면이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 놀랍게도 2021년의 K-POP은 호러의 영역까지 자신들의 포트폴리오에 차용하기에 이르렀고, 그 주인공은 다름아닌 방탄소년단(BTS)과 투모로우바이투게더(TXT)를 이은 하이브 레이블의 세 번째 보이그룹이자 서바이벌 프로그램 아이랜드(I-LAND)를 통해 결성된 대형 신인- 하이픈(ENHYPEN)이다.


아이돌 음악의 영상이라기보단 차라리 호러 무비의 트레일러에 가까워 보이는 'Drunk-Dazed'의 뮤직비디오에서 범상치 않은 팀이 나타났음을 예감한다. 뷔작 'Given-Taken'의 가사 ('내 하얀 송곳니' / '그 빛은 날 불태웠지')에서부터 드러나듯 엔하이픈의 세계관은 뱀파이어(Vampire)의 서사를 표방한다. 앨범의 제목이 경계를 뜻하는 [BORDER] 시리즈임에서도 알 수 있듯 인간과 괴물의 경계에 위치해 있는 상태인 이 일곱 명의 뱀파이어들은 'Given-Taken'에서의 정체성 혼란을 지나 'Drunk-Dazed'에서 잠시 모든 것을 내려놓고 광란의 카니발에 빠져들기를 택한다.


이 카니발 속에서 취하고(Drunk) 몽롱해진(Dazed) 엔하이픈의 모습은 무엇보다도 완성도 있는 음악을 통해 효과적으로 표현된다. 사이키델릭 록에 가까운 둔탁하고 강렬한 비트와 공격적인 베이스 위를 내달리며 거칠게 변조되는 멤버들의 보컬이 청각을 날카롭게 자극하는 프로덕션에서 뱀파이어들이 벌이는 환락의 파티를 자연스럽게 상상할 수 있다. 이 압도적인 퀄리티의 사운드는 청자로 하여금 '붉은빛 송곳니', '심장을 태워' 등 과격하고 컨셉츄얼한 노랫말에 효과적으로 몰입하게끔 만든다. 식인(食人)을 뜻하는 '카니발리즘(Cannibalism)'을 연상시키는 카니발(Carnival)을 벌이고 있는 일곱 명의 뱀파이어의 다음 이야기는 무엇일까. 당신이 아이랜드(I-LAND)를 보지 않았더라도, 혹은 멤버들 개개인에 대해 잘 모르더라도 탄탄한 음악 자체만으로 그들의 서사에 귀기울이게 되는 마력을 지닌, 말 그대로의 '괴물' 신인이 등장했다. 그 무시무시한 뱀파이어의 이름은 바로 엔하이픈(ENHYPEN)이다.



TWICE, [Taste of Love], JYP엔터테인먼트, 2021

5

트와이스, 'Alcohol-Free'


'CHEER UP'과 'TT'가 연달아 발매된 2016년이 단연코 '트와이스의 해' 였음을 부정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허나 열풍에 가까운 인기를 누리던 트와이스가 조금씩 삐걱대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황당무계한 퀄리티의 곡으로 당혹감을 안겼던 'SIGNAL'? 기존의 발랄한 콘셉트를 내려놓고 성숙한 이미지로의 변화를 꾀했지만 대중에게는 다소 낯설게 다가왔던 'FANCY'와 'Feel Special'? 잦은 컴백으로 과해진 이미지 소? 혹은 음악방송 앵콜 무대에서의 라이브 미흡 논란? 뭐가 되었든 2021년에 이르러 7년차를 맞이한 트와이스가 다소 정체된 상황에 처해 있었음을 부정하기는 어려웠다. 예전 콘셉트를 계속하면 매너리즘이요, 콘셉트를 바꾸면 초심을 잃었다며 날선 비판을 가하는 사면초가의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이 난제를 해결하고자 이미 'Dance The Night Away'에서 EDM을 적극적으로 차용함으로써 좋은 반응을 이끌어낸 바 있던 그녀들 'MORE & MORE'에서 트로피컬 하우스, 'I CAN'T STOP ME'에서는 신스웨이브를 투입하는 등 일반적인 팝에 타 장르의 색을 짙게 칠하는 실험을 이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트와이스의 이미지에 꼭 들어맞는 세련된 보사노바 한 컵을 끼얹는 순간, 드디어 기다려 왔던 화학반응이 일어고야 말았다.


기나긴 실험 끝에 찾아낸 트와이스의 최적화 블렌딩 레시피, 'Alcohol-Free'는 순히 보사노바를 K-POP의 영역에 성공적으로 끌어 왔을 뿐만 아니라 다채로운 악기들을 조화롭게 운용하여 청각적 쾌감을 선사한다. 상쾌한 나일론 기타가 이끄는 1절, 바이아오(Baiao) 리듬의 베이스와 재지한 건반이 맞물리는 2절, 청량한 브라스가 멜로디를 부드럽게 감싸는 후렴 등 보사노바의 범위 내에서 섹션별로 선명하게 변화하는 세련된 사운드 덕에 귀가 지루할 틈이 없다. 해변의 낭만을 그대로 옮겨 담은 악기들의 합주와 함께 달콤한 선율이 자연스럽게 귀에 스며드니 이 바닷빛 칵테일에 취하지 않고서야 못 배길 노릇이다.


보사노바를 차용하겠다는 대담한 발상. 그것을 K-POP과 매끈하게 배합해낸 능숙한 프로덕션. 트와이스는 흠잡을 데 없는 완성도를 가진 커리어 최고작 'Alcohol-Free'로 멋지게 매너리즘의 벽을 무너뜨렸고, 박진영은 자신이 아직도 이 정도로 뛰어난 곡을 써낼 수 있는 프로듀서임을 재차 입증해 보였다. 부진은 일시적이어도 클래스는 영원하다.



aespa, [Savage - The 1st Mini Album], SM엔터테인먼트, 2021

4위

에스파, 'Savage'


K-POP은 수많은 언어로 쓰여진 수많은 이야기들이 떠다니는 깊고 넓은 무정형의 바다이다.  EDM, 힙합, 록, R&B, 심지어는 앰비언트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음악 장르들을 모두 포용해 온 K-POP은 그 수용성을 바탕으로 작은 연못에서 드넓은 대양으로 성장했다. 어느덧 완전한 '하이브리드 뮤직' 을 추구하게 된 이 산업에서도 유달리 더욱 진보적인 스탠스를 보여 온 기획사가 있었으니, 놀랍게도 가장 메인스트림에 위치한 SM엔터테인먼트였다. f(x)와 샤이니는 K-POP이 기성 음악 장르처럼 뛰어난 작품성을 성취해낼 수 있음을 입증한 최초의 사례들 중 하나이고, 레드벨벳과 NCT는 2010년대 중후반 K-POP 프로덕션의 비약적인 발전을 상징하는 대표주자다. 그리고 NCT의 출범(2016) 이후 약 4년여간의 기다림 끝에 등장한 신인 걸그룹 에스파(aespa)그 계보를 이어받을 적장자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Oh my gosh, don't you know I'm a savage?' 라는 당찬 나레이션으로 포문을 여는 'Savage'는 벌스가 시작되자마자 청자의 예상을 가볍게 부순다. 날카로운 금속성의 전자음이 분절된 채 이리저리 부치는 사운드는 2010년대 중반 전자음악가들이 모여 만든 레이블 PC 뮤직(PC Music)에서 유래된 동명의 장르를 연상케 하는데, 그 중에서도 작년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감한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출신의 아티스트 소피(SOPHIE)의 잔향이 짙게 드러난다. 그의 대표곡 중 하나인 'Burn Rubber'를 들어 보자. 곡 전개나 사운드의 질감 면에서 'Savage'와의 밀접한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찰리 XCX(Charli XCX) 등 이름 있는 아티스트 몇몇 하이퍼팝-PC 뮤직을 조금 더 넓게 칭하는 용어-을 시도해 온 바 있지만 여전히 주류 음악의 감성과는 거리가 있는 장르를 K-POP의 영역에서 구현해 냈다는 것만으로 'Savage'는 인상깊은 작품이다.


PC 뮤직이 감수해야만 하는 필연적인 청각적 피로감은 대중음악으로서 치명적인 결함이라 할 수 있지만 에스파는 전작 'Next Level'에서 이미 보여준 바 있는 버라이어티한 전개로 이 불안을 말끔하게 해소한다. 특히 웜홀로 빨려들어가는 듯 환상적인 신스가 펼쳐지는 브릿지는 전체적으로 건조한 무드의 트랙에 총천연색의 물감을 풀어헤친 듯 상쾌한 분위기 전환을 이끌어낸다. 이 빈틈없이 촘촘한 프로덕션 위에서 윈터는 탁월한 보컬적 기량을 맘껏 뽐내고, 지젤은 2절 벌스에서 하이톤의 래핑으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을 만들어낸다. 전작의 메가히트로 대중의 관심이 가장 집중되어 있는 순간 팀의 물오른 역량을 성공적으로 증명해 보 'Savage'를 기점으로 명백히 에스파는 타 그룹들과 완전히 차별화되는 '넥스트 레벨'에 올라섰다.



STAYC, [STAYDOM], 하이업엔터테인먼트, 2021

3위

스테이씨, 'ASAP'


2021년의 K-POP 씬을 대표하는 키워드 중 하나는 역시 '여성'일 것이다. 역주행의 신화를 쓴 브레이브걸스의 '롤린'을 시작으로 오마이걸, 트와이스, 에스파, 조이, 라붐, 로제, ITZY 등 수많은 여성 아티스트들이 차트 상단을 차지하며 대중적 흥행을 거두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소위 걸그룹의 황금기라 불리던 2010년대 초반을 연상시킬 정도로 유례 없는 여성의 약진이 돋보인 올해 상반기는 한편으로는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던 4세대 신인 걸그룹들이 드디어 본격적으로 궤도에 올라탄 시즌으로 기억될 것이다. 마침내 그 세대교체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주인공은 다름아닌 스테이씨였다.


'CHEER UP'과 'TT'로 트와이스를 '국민 걸그룹'의 위치에 올려 놓은 히트메이커 작곡팀 블랙아이드필승이 야심차게 런칭한 걸그룹 스테이씨에게는 대형 기획사의 자본에서 나오는 물심양면의 서포트와 프로모션도, 팬덤의 내리사랑을 선물해줄 수 있는 선배 가수도 없었다. 그녀들을 가장 돋보이는 신인 중 하나로 만든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매력적인 음악이었. 그만큼 'ASAP'은 가히 파괴적인 트랙이다. 독특한 사운드로 흥미로운 감흥을 이끌어냈지만 다소 미약한 후렴 탓에 아쉬움을 남겼던 전작 'SO BAD'의 약점을 완벽하게 보완하고 캐치한 멜로디에 대한 갈증을 깔끔하게 해소시키는 노련한 프로덕션은 역시라는 말밖엔.


걸그룹의 음악치고 매우 파워풀한 드럼과 신스 베이스로 시원시원하게 벌스를 이끌어 나가다 스테이씨의 트레이드마크인 단조 멜로디를 후렴으로 매끄럽게 이어 붙이는 구성은 고전적이지만 흡입력 넘치며, 키치한 톤의 우드윈드 신스(Woodwind Synth)가 등장하는 간주 파트는 감히 '올해의 10초'로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매력적이다. 이에 더해 메인 리듬악기와 우드윈드 신스가 결합하는 브릿지의 속도감은 가히 압권. 섹션별로 다채로운 악기를 변화무쌍하게 운용하며 색다른 무드를 만들어내는 프로듀싱의 내공은 이미 일종의 경지에 오른 수준이다. 메가 히트곡이 될 충분한 자격을 갖춘, 이견 없는 블랙아이드필승 커리어 사상 최고작.



NCT 127, [Sticker - The 3rd Album], SM엔터테인먼트, 2021

2위

NCT 127, 'Sticker'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NCT 127의 음악은 평범하지 않다. 변칙적인 편곡과 독특한 사운드로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던 데뷔곡 '소방차'부터, 과감하고 놀라운 실험적 프로덕션으로 K-POP의 역사 한 페이지에 새겨질 음악적 성취를 거둔 'Cherry Bomb'까지. 그들은 단 한 번도 '뻔한' 음악을 발표한 적이 없었고,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며 쌓아올린 NCT 127이라는 브랜드는 이미 재생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무언가 새로운 것이 펼쳐지기를 기대하게 하는 신뢰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세 번째 정규앨범의 타이틀곡 'Sticker'에서도 어김없이 그들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귀를 사로잡는 도입부의 피리 소리부터 예사롭지 않다. 이 트랙이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가득 차 있음을 예감하게 되는 순간이다. 피리와 웅웅대는 신스, 그리고 퍼커션. 단 세 개의 악기만으로 구성된 벌스의 비트는 서로 굉장히 이질적인 사운드 소스들을 마치 불협화음처럼 섞어 놓고는 곡의 진행에 따라 재지한 질감의 피아노와 스트링 피치카토를 스티커처럼 붙였다 떼어 가며 운용한다. 심지어 댄스 음악의 생명과도 같은 베이스는 아예 생략된 채 곡 내내 등장하지도 않는다. 실험을 넘어서 도발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하는 발칙한 구성이다.


놀라운 것은 이처럼 과감한 시도들이 치밀한 프로덕션 하에서 하나의 화학 공식처럼 맞물린다는 것이다. 엇박으로 배치된 건반악기는 묘한 그루브를 생성하고, 멤버들의 합창으로 이루어진 후렴 미니멀한 비트가 남겨놓은 공간을 가득 채운다. 환상적인 신스와 함께 분위기가 반전되는 브릿지는 자칫 루즈해질 수 있던 진행에 곧바로 맥동하는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Sticker'의 작품성은 극도의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발상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모든 이질적인 요소들이 그 이질성을 잃지 않은 채로 정교하게 배치되어 하나의 아름다운 콜라주 아트워크를 완성한 데에서 나온다. 단순한 실험 그 이상의 성취를 이룬 NCT 127은 가히 두 번째 'Cherry Bomb'이라고 부를 만한 역작을 탄생시켰다.



aespa, [Next Level], SM엔터테인먼트, 2021

1위

에스파, 'Next Level'


2021 K-POP 최고의 블록버스터. 역대 신인 아이돌 중 가장 충격적인 데뷔. 두렵도록 급진적이고 놀랍도록 호기로운 하이브리드 프로젝트. 모두 하나의 노래를 가리키는 수식어다. 바로 에스파(aespa)의 두 번째 싱글 타이틀 'Next Level'이다.


아이돌 명가 SM엔터테인먼트에서 레드벨벳의 뒤를 이을 신인 걸그룹을 내놓는다는 소식에 커진 기대감은 이윽고 그 걸그룹이 인간과 AI 아바타 각각 4명씩으로 이루어진 8인조 팀이라는 뉴스가 공개된 이후 한숨 섞인 실망감으로 바뀌었다. 무리수에 가깝게 느껴질 정도로 파격적인 사이버펑크 콘셉트는 그 낯섦을 극복하기 어려워 보였고, 데뷔곡 'Black Mamba'는 SM의 비대한 세계관을 대중들에게 온전히 설득해 내기에는 한참 부족한 완성도를 가지고 있었다. 데뷔 초 메인 콘셉트로 내세우다 언제부터인가 소리없이 폐기해 버렸던 선배 그룹 엑소(EXO)의 초능력 세계관과 겹쳐 보이며 기대보다는 걱정만이 앞설 뿐이었다.


그러나 1년 후 에스파'Black Mamba' 보다 모든 면에서 눈부신 스텝업을 이룬 후속곡으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던 모두를 크(SYNK: 인간과 아바타가 연결된 상태)시켰다. 영화 '분노의 질주' 시리즈에 수록된 A$ton Wyld명의 곡 리메이크한 'Next Level'은 SMCU(SM Culture Universe: SM엔터테인먼트의 아티스트들이 공통적으로 소속된 하나의 세계관 유니버스)의 본격적인 출발을 알리는 서막으로, 'KOSMO', 'Naevis', 'P.O.S' 등 SMCU 내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가상 용어들을 적극적으로 가사에 투입다. 이 낯선 용어들을 불친절하게 나열하기만 했을 뿐인 전작과는 달리 이번에는 현실 세계, 플랫(FLAT: 가상 세계), 광야(KWANGYA: 플랫 너머 무정형의 세계) 등 다양한 공간을 오가는 에스파의 여정을 변화무쌍한 사운드 변주와 하이브리드적인 트랙 구성을 통해 표현하여 그 거대한 서사에 자연스럽게 빠져들 수 있도록 했다.



사이버펑크 풍의 투박한 베이스를 타고 카롭게 흘러가는 초반부는 아이(ae: 인간의 디지털 데이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아바타)와 에스파가 만나 인공지능 시스템 나비스(naevis)의 인도에 따라 빌런 블랙 맘바(Black Mamba)의 횡포를 저지하기 위해 그가 사는 광야로 떠나기까지의 과정을 스타일리시한 코드로 담아냈다. 백그라운드 보컬이나 유니즌 코러스를 곳곳에 배치하여 분위기를 환기하는 버라이어티한 진행은 깊은 몰입에 한층 추진력을 더한다. 'Check It Out'을 '제껴라'로, 'New York'을 '유혹'으로 개사하며 원곡의 발음을 살리는 재치 역시 돋보인다.


이어 나비스가 연 문을 열고 에스파와 아이가 광야로 발을 내딛음과 동시에 공간감 넘치는 신디사이저가 내려앉고 유영진의 향기가 물씬 묻어나는 닝닝윈터의 시원시원한 보컬이 귀를 사로잡는다. 이윽고 트랙이 또다시 변주되며 등장하는 둔탁한 리듬과 함께 에스파 일행은 비로소 광야에 도착한다. 블랙 맘바의 환각에 빠져 에스파와 아이는 분리되어 버릴 위기에 처하지만, 나비스의 도움으로 다시 현실 세계로 복귀하게 된다. 이에 따라 음악 역시 초반부의 사이버펑크풍 비트로 돌아오고, 에스파는 '난 광야의 내가 아냐 / 널 결국엔 내가 부셔' 라며 더 강하고 자유로워진 모습으로 훗날 블랙 맘바를 꼭 물리치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운다. 실로 재미있는 수미상관 구조가 아닐 수 없다.


공간 변화와 서사의 흐름에 따라 선명하게 변주되는 'Next Level'의 사운드는 K-POP의 하이브리드적 성질을 극대화하여 전례 없는 몰입을 선사한다. 에스파는 길고 복잡한 세계관 이야기를 주저리 주저리 늘어놓지 않는다. 단지 변화무쌍한 음악과 상징적인 노랫말로 청자를 자연스레 SMCU의 세계로 끌어들일 뿐이다. 멜론(Melon) 차트 개편 이후 걸그룹으로서는 최초로 24Hits 차트 1위를 차지한 눈부신 성과가 이미 대중 역시 에스파의 광야에 초대되었음을 증명한다.



전세계의 주목도와 자본을 자석처럼 끌어모으며 이미 단순한 아이돌 음악 이상의 거대한 산업이 되어 버린 K-POP. 앞서 언급한 트와이스가 'Alcohol-Free'에서 보사노바를 차용한 것처럼 K-POP은 EDM, R&B, 록, 힙합, 심지어는 앰비언트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장르 음악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자유롭게 포용시킨다. SMCU 영상에서도 등장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철학자 사르트르의 말처럼, 대중가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K-POP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유일무이한 하이브리드적 속성을 갖추어 나가기 시작했고 그 무한한 확장성이 음악 외적으로까지 뻗어 나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같은 곡이라고 믿겨지지 않을 만큼 다채로운 사운드 섹션을 자연스럽게 융합해 곡을 만들고, 여러 아티스트들의 세계관을 하나의 유니버스로 연결해 더 큰 차원에서의 서사를 쌓아올리고, AI 기술을 아이돌 산업에 가져와 '케이팝 메타버스'가 구현된다. 이것은 비단 SM엔터테인먼트뿐만 아니라 K-POP 산업 자체가 향해가는 궁극적 방향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에스파의 등장은 필연적이었다. 시대의 변곡점에서 나타난 이 급진적인 프로젝트는 결국 처음의 당혹감을 이윽고 그들의 비전에 대한 기대감으로 바꾸어 놓았다. K-POP의 미래는 한층 더 낯설고 하이브리드한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며, 에스파는 그 문을 열어 우리를 그 광야로 인도한다. 저 광야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들이 이끄는 새 시대로의 열차에 기꺼이 올라타고 싶은 마음이다.


 "난 궁금해 미치겠어 / 이 다음에 펼칠 story, huh!" - aespa, KARINA







구독 설정을 통해 더 많은 리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정라리의 케이팝읽기>를 구독하시고 매주 업로드되는 K-POP 리뷰를 놓치지 마세요!

매거진의 이전글 [결산] 2021 K-POP 올해의 노래: 11~20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