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바이러스가 가져온 무겁고 깊은 우울을 잠시나마 달래 줄 수 있는 것은 훌륭한 문화예술 작품일 것이다. 그 중에서도 이미 하나의 문화 영역이자 종합예술로 자리잡은 K-POP 음악은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에 갇힌 세계인들에게 즐거움과 희망을 선사해 주고 있다.'정라리의 케이팝읽기' 본 결산에서는 2021년 한 해, 즉 2021년 1월 1일부터 2021년 12월 31일 사이에 발매된 모든 K-POP 트랙 중 '베스트 트랙' 20선을 선정하였다.
* 본 글의 순위 및 칼럼은정라리개인이 선정하고 집필한 것으로, 개인의 주관적인 견해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 앨범의 타이틀곡 또는 싱글컷된 곡만을 선정 대상으로 하였습니다. 따라서 수록곡들은 선정 대상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 '정라리의 케이팝읽기'는 음악과는 별개로 리뷰 대상 아티스트의 논란과 범죄 행위를 일체 옹호하지 않습니다.
* 본 글의 궁극적인 목적은 특정 아티스트에 대한 무조건적인 옹호 혹은 비난이 아니라 케이팝 씬에 대한 깊고 넓은 관심을 촉구하고 풍부한 논의를 생산하는 것임을 유념하여 읽어 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방탄소년단, [Butter], 빅히트뮤직, 2021
20위
방탄소년단, 'Butter'
명실상부 K-POP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아티스트가 된방탄소년단. 하지만 이제는 그들이 더는 K-POP에 국한될 수 없는, 전 세계의 청춘을 상징하는 새로운 대변자임을 인정해야 할 때가 왔다. 한국어를 버리고 세계 공용어인 영어로 모든 가사를 채워 넣은 'Dynamite'의 발매는 그 새로운 여정의 서막이었고, 발매 이후 빌보드 차트 1위를 5주 연속으로 수성하며 역사적인 기록을 세운 'Butter'로 이는 더욱 확실해졌다.
'Butter'가 경이로운 흥행을 기록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들이 가사에서 언급한 것처럼 ('Got ARMY right behind us when we say so') 팬덤 아미(ARMY)의 충성스런 서포팅의 덕이 가장 크겠지만, 트랙 자체가 가진 압도적인 매력 역시 무시할 수 없다. 미니멀한 비트로 포문을 열고 펑키한 신디사이저를 적재적소에 운용하는 프로덕션은 전작 'Dynamite'보다도 훨씬 뛰어난 완급 조절을 보여 주며, 왕년의 팝 스타 어셔(Usher)나 ('Don't need no Usher / To remind me you got it bad') 1960년대의 미국 보드 게임 트러블(Trouble)을 언급하는 유머러스한 가사 ('Gon' pop like trouble')는 미국인들의 향수를 자극하여 자연스럽게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한다.
미국 음악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이 치밀한 전략으로 방탄소년단은 기어코 새로운 역사를 쓰는 데 성공했다. 그렇다면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일까? 'Butter'의 수많은 라인들이 공통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지점은 바로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이다. 그의 대표곡 'Smooth Criminal'을 오마주한 첫 도입부('Smooth like butter / Like a criminal undercover')나 'Rock With You'와 'Man In The Mirror'에 대한 레퍼런스('High like the moon, rock with me, baby' / 'Ooh, when I look in the mirror')는인종 간의 갈등을 음악을 통해 허물고 화합과 문화의 시대를 연 위대한 팝스타 마이클 잭슨을 연상시키는데, UN에서의 연설이나 '#StopAsianHate' 운동 참여 포스트 등에서 그들이 보여주었던 선한 영향력은 의심의 여지 없이 마이클 잭슨의 발자취와 닮아 있다.'Let me show you 'cause talk is cheap' 이라는 'Butter'의 노랫말처럼이제 그들은 언어를 초월하는 범지구적 가치를 위해 행동하는 아티스트이며, 그것이 바로 그들의 노래가 무슨 언어로 쓰였는지가 더는 중요하지 않은 이유이고, 'Butter'가 새 시대의 K-POP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언급되어야 할 트랙인 이유일 것이다.
프로미스나인, [9 WAY TICKET], 오프더레코드엔터테인먼트, 2021
19위
프로미스나인, 'WE GO'
Mnet의 아이돌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 101>이 역사적인 흥행을 기록한 2016년 이후로 K-POP 산업의 지형도는 180도 바뀌게 된다. 한 인간이 무대 위에 올라 아이돌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자극적으로 담아낸 방송은 채 데뷔하지도 않은 연습생들에게 서사를 불어넣어 주었고, 그 서사의 존재 여부는 곧 그가 아이돌로서 성공할 수 있느냐를 판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어 버렸다. 이에 따라 최종 데뷔조 아이오아이(I.O.I)뿐만 아니라 <프로듀스 101>에 출연한 다른 연습생들을 간판으로 내세운 파생 팀들이 우후죽순 쏟아지며 걸그룹 시장은 갑작스런 지각변동을 마주하게 되었고, <프로듀스 48>, <더유닛>, <믹스나인> 등 셀 수 없이 많은 파생 오디션 프로그램을 지나 2019년 <프로듀스 101> 시리즈의 투표 조작이 밝혀지고 나서야 비로소 이 서사중심주의의 시대는 종말을 맞는다.
이 열풍을 타고 한때 방영되었던 Mnet의 또다른 오디션 프로그램 <아이돌학교>의 데뷔조로 결성된 프로미스나인 역시 이렇게 방송을 통해 탄생한 그룹이 대부분 그러하듯 큰 거부감 없이 즐길 수 있는 가벼운 이지리스닝 음악을 지향하는 팀이다. 그리고 파격적인 음악과 자극적인 콘셉트 없이 '듣기 좋은 노래' 라는 한 우물만을 파온 그들의 노력은 비로소 커리어 하이 트랙, 'WE GO'를 만나 꽃을 피우게 된다.군더더기없이 짜여진 웰메이드 팝 넘버 'WE GO'는 펑키한 베이스와 기타 위로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멜로디가 인상적인 트랙이다. 매끈하게 다듬어진 각 섹션들은 그 이음새를 눈치채지조차 못할 만큼 부드럽게 맞물리며 여행의 낭만을 감각적으로 담아낸 가사는 코로나 시대의 우울을 물리친다. 이렇게 대중가요로서의 기본에 충실한 음악이 줄어가는 이 시국에 여러모로 의미 있게 다가오는 트랙. 하이브(HYBE) 레이블로 이적해 새 여정의 출발점에 선 프로미스나인의 향후 행보를 진심으로 기대해 본다.
오마이걸, [Dear OHMYGIRL], WM엔터테인먼트, 2021
18위
오마이걸, 'DUN DUN DANCE'
누가 뭐래도, 2020년은 오마이걸의 해였다. 선율에서 비트 중심으로 음악적 노선을 옮기는 변화구가 멋지게 장외 홈런을 날린 히트 넘버 '살짝 설렜어'부터 걸그룹 최장 기간 차트인 기록을 세운 역사적인 수록곡 'Dolphin'까지 오마이걸은 연이어 경이로운 흥행 실적을 올리며 가장 대중적인 걸그룹 중 하나로 떠올랐다. 주류 K-POP의 방법론을 살짝 비트는 접근법으로 마이너한 감성을 건드리며 주목받았던 팀이기에 이러한 변화가 누군가에게는 당혹감으로 다가올지 모르나, 이듬해 발매된 'DUN DUN DANCE'는 트랙이 지닌 강력한 설득력을 통해 그들의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들마저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지난 해부터 K-POP을 휩쓴 레트로 트렌드가 낳은 가장 우수한 작품 중 하나인 'DUN DUN DANCE'는 기본적으로 펑키한 디스코 리듬 위로 차지게 춤추는 베이스 기타와 함께 텐션을 쌓아 올리다가 중간중간 트랩으로 변주를 주는 깔끔한 프로덕션이 인상적인 트랙이다. 그러나 더 돋보이는 것은 바로 선율의 힘. 결코 자극적이지 않은 부드러운 벌스 멜로디로 청자를 자연스럽게 끌어들이고 후렴에서는 시원시원하게 하이 노트로 뻗어 나가면서 즐거운 청각적 경험을 선사한다. 그 어느 때보다 캐치하고 직관적인 'I just wanna dun dun dance' 훅은 덤. 이에 더해 유니즌 코러스를 적재적소에 활용하며 팀의 청량하고 발랄한 이미지를 극대화시키는 영리한 전략 역시 특기할 만하다. 'DUN DUN DANCE'는 분명 오마이걸의 디스코그래피 중에서 눈에 띄는 오리지널리티를 가진 곡은 아니지만, 대신 그들의 가장 큰 무기인 유려한 선율의 힘이 메인스트림 K-POP에서도 얼마나 효과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지를 멋지게 증명해낸 뜻깊은 트랙임이 분명하다.
aespa, [Dreams Come True - SM STATION], SM엔터테인먼트, 2021
17위
에스파, 'Dreams Come True'
SM엔터테인먼트의 새로운 흥행 프랜차이즈 에스파(aespa)의 대표곡 'Next Level'과 'Savage', 'Black Mamba'의공통점은 전자음을 적극 활용해 사이버펑크 풍의 세계관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현존하는 K-POP 걸그룹 중에서 가장 높은 수준으로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다루고 있는 에스파의 탁월한 감각은 S.E.S.의 1998년작 'Dreams Come True'를 리메이크한 동명의 곡에서 다시금 빛난다.
익숙한 나일론 비트(Nylon Beat)의 'Like a Fool' 샘플과 동시에 클래식한 바이브의 랩으로 포문을 여는 이 트랙은 번뜩이는 프로덕션으로 원곡과의 20년이라는 간극을 매끈하게 이어 붙였다. 특히 'You make it feel me good' 파트에서 리듬이 변주되며 텐션을 끌어올리고, 번쩍이는 전자음으로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중반부의 사운드 디자인은 강렬한 청각적 즐거움을 선사한다. 원곡에서는 다소 부자연스럽게 등장했던 특유의 '외계어 랩' 파트도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에스파 음악 특유의 비선형성을 부여하는 장치로서 완벽한 역할을 해낸다. S.E.S.의 신비롭고 몽환적인 감성을 그대로 간직하면서도 원곡이 지닌 허점은 빠짐 없이 보완해낸 2021년판 'Dreams Come True'는 리메이크라는 작법의 순기능을 논할 때 모범적인 예시로 거론될 수 있는 완성도 높은 결과물이다.
웬디, [Like Water - The 1st Mini Album], SM엔터테인먼트, 2021
16위
웬디, 'When This Rain Stops'
2019년의 크리스마스, 모두가 신의 축복에 젖어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을 무렵 레드벨벳의 웬디(WENDY)는 고척돔에서 있을 SBS 가요대전 생방송을 위해 리허설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중들은 이날 새벽 그녀가 리프트 오작동과 스태프들의 소통 미흡으로 인해 무려 3m를 상회하는 높이의 무대에서 추락하여 광대뼈, 골반, 손목이 골절되고 전신에 걸쳐 중상의 타박상을 입었다는 비극적인 소식을 전해들어야만 했다.
그야말로 최악의 크리스마스였다. 웬디는 그 이후로 긴 시간 동안 무대에 서지 못하며 재활에 전념해야 했고, 사고를 발생시킨 장본인인 SBS 측은 모르쇠에 가까운 무책임한 태도의 사후대처로 일관하며 팬들의 분노를 샀다. 웬디가 심각한 부상을 극복하고 다시 가장 익숙한 자리인 마이크 앞에 설 수 있게 되기까지는 그로부터 무려 1년 4개월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돌아온 웬디의 미니앨범은 'Like Water'와 'When This Rain Stops' 두 개의 타이틀을 내세우고 있다. 음악방송에서 주로 선보이는 메인 트랙은 웅장한 밴드 사운드가 돋보이는 'Like Water'이지만, 마음을 더 움직이는 쪽은 웬디의 꾸밈없는 보컬과 피아노 하나만으로 단촐하게 꾸려 나가는 후자다. 소박한 구성은 호소력 넘치는 가사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데, 그토록 끔찍한 사고를 당했음에도 여전히 '안아주고 싶어 / 어둠에 지친 모든 걸 내가 / 알아주고 싶어' 라며 소외된 이들에게 위로를 건네는 진심은 그 어느 때보다 가슴 속에 뜨거운 울림으로 다가온다. 상처를 꿋꿋이 딛고 일어나 오히려 더욱 강해진 모습으로 피아노 선율 위를 뻗어 나가는 웬디의 담백한 보컬이기에 더욱 빛나는 노랫말이다.
반복되는 'When This Rain Stops'라는 가사가 'Wendy's Rain Stops'로 들리는 건 기분 탓일까.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그녀의 오랜 장마는 결국 그쳤고 무지갯빛 노래와 함께 웬디는 돌아왔다. 이제 그녀는 세상 가장 큰 우산이 되어 비에 젖은 이들을 다시 따스하게 감싸 주려 한다.
원어스, [BLOOD MOON], RBW, 2021
15위
원어스, '월하미인'
K-POP은 EDM, 힙합, R&B 등 셀 수 없이 많은 음악의 조류들이 혼합되어 탄생한 하나의 거대한 대양이며, 그 태생적인 하이브리드성의 파도는 성별, 인종, 사상, 종교의 벽을 모두 부수고 지구 전체를 흠뻑 적셨다. 하지만 이러한 국제적 인기에 휩쓸려 K-POP이 가진 K-정체성은 점점 더 희미해져 갔다. 그러자 몇몇 이들은 우리의 음악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재조명하며 무국적화되어가는 K-POP에 대한민국이라는 국적성을 다시 불어넣으려 시도했고, 방탄소년단의 슈가-어거스트 디(Agust D)-가 발매한 '대취타'는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2019년 '발키리'로 데뷔한 이후 Mnet <킹덤> 출연을 통해 주가를 올린 RBW의 보이그룹 원어스(ONEUS)의 '월하미인 (月下美人 : LUNA)' 역시 그러한 맥락 속에서 호기롭게 등장한 트랙이다.
애절한 현악기와 피리 소리로 포문을 여는 '월하미인'의 프로덕션은 가녀린 악기들과 거친 신스를 자연스럽게 결합시켜 독특한 풍미를 자아낸다. 이질적인 동서양의 사운드를 한가득 섞어 넣었는데도 이질감보다는 즐거움으로 다가오니 여간 노련한 솜씨가 아니다. 특히 넘쳐 흐르는 에너지를 품고 맥동하는 퍼커션 구성은 곡의 역동성을 극대화하는 와우 포인트. 이처럼 우수한 음악적 완성도에 더해, 영어 한 마디 없이 유려한 한국어만으로 쓰여진 시적인 가사는 원어스의 비전이 단순한 오리엔탈리즘의 재현 그 너머에 있음을 보여 준다. 비록 완전히 새롭고 획기적인 결과물은 아닐지언정, '월하미인'이 K-POP에 국적성을 불어넣으려 하는 새로운 조류의 이념을 가장 탁월하게 표현해낸 작품 중 하나임은 자명하다. 4세대 보이그룹들의 춘추전국시대 속에서 묵묵히 깊고 넓은 성찰의 서사를 그려 나가고 있는 원어스의 행보를 주목해 본다.
TREASURE, [THE FIRST STEP : TREASURE EFFECT], YG엔터테인먼트, 2021
14위
트레저, 'MY TREASURE'
수많은 논란과 범죄 이력에도 불구하고 2000년대 이후의 한국 대중음악사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친 그룹 빅뱅(BIGBANG), 여자 아이돌이 도전할 수 있는 새로운 영역들을 앞장서 개척한 2NE1, 2010년대 K-POP에서도 손꼽히는 메가 히트곡을 보유한 위너(WINNER)와 아이콘(iKON), 그리고 현재 가장 글로벌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걸그룹 블랙핑크(BLACKPINK)까지. 이름만 들어도 절로 입이 벌어지는 YG엔터테인먼트의 역대 아티스트 라인업은 2018년도 방영된 YG 자체 서바이벌 프로그램 <YG 보석함>을 거쳐 지난해 데뷔한 보이그룹 트레저(TREASURE)의 어깨를 무겁게 했다. 단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는 회사의 신인으로 나서는 부담감을 어찌 말 몇 마디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 때문인지 데뷔곡 'BOY'과 후속곡 '사랑해'는 과도하게 힘을 주다 곡의 완성도 자체가 크게 저해되어 버린 아쉬운 시작이 되고 말았다. 조금 변주를 준 '음 (MMM)'은 비교적 나았지만 여전히 YG라는 이름값이 주는 무게감에 걸맞는 모습은 아니었다.
이 방황 속에서 발매된 대망의 첫 번째 정규앨범 [THE FIRST STEP : TREASURE EFFECT]. 트레저는 오히려 힘을 빼고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돌아가기를 택했고, 결과적으로 이는 최상의 타개책이 되었다. 날선 전자음 대신 스트링과 브라스. 강렬한 비트 대신 부드러운 멜로디. 지금까지의 트레저와는 정반대의 모습이지만 이제서야 맞는 옷을 입은 느낌이 든다. 아직 미숙하지만 그래서 더욱 호소력 넘치는 멤버들의 음색은 밝고 희망찬 선율을 타고 힘차게 날아 오른다. 보다 자극적이고 보다 강렬한 콘셉트 경쟁에 과열된 근래의 K-POP에서 찾아보기 드문, 건강한 행복감을 선사하는 트랙. 보물을 찾아내기까지는 길고 험난한 여정이 필요하듯 지금까지의 방황은 이 순간을 위한 것이었나 보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진짜 'TREASURE'의 반짝임을 목격하라.
브레이브걸스, [After ‘We Ride’], 브레이브엔터테인먼트, 2021
13위
브레이브걸스, '술버릇'
유튜브 알고리즘이 쏘아올린 '롤린'의 역주행은 2021년 대중가요계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으로 남았다. 상반기를 휩쓴 '롤린'에 이어 '운전만해'까지 재조명되며 브레이브걸스의 상승곡선은 멈추지 않고 우상향했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들의 두 히트 넘버 '롤린'과 '운전만해'가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곡이라는 사실이다. 청량한 트로피컬 하우스와 차분하게 가라앉은 시티팝. 공존하기 어려워 보이는 이질적인 두 장르는 브레이브걸스라는 이름 아래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팀의 입체적인 이미지를 구축했다.이를 바탕으로 브레이브걸스를 대중에게 알린 메가 히트 넘버 '롤린'의 음악적 기조를 그대로 계승해 스스로 '썸머 퀸'임을 선언하는 자신 있는 한 방, '치맛바람'은 그들이 지금까지의 단발성 역주행 사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현상임을 확신케 했다.
그리고 그 이후 발매된 리패키지 앨범의 후속 타이틀곡 '술버릇 (운전만해 그후)'는 정반대로 '운전만해'의 기조를 이어받아 더욱 폭발적인 감정을 쏟아낸다. 둔탁한 비트 위로 공간감 넘치는 록 사운드가 펼쳐지고 슬픔을 한가득 품은 멤버들의 보컬은 탄탄한 실력을 바탕으로 강력한 호소력을 자아낸다. 설레는 여름 바닷가의 한낮에서 비 내리는 여름밤으로 무대가 바뀌었지만 브레이브걸스의 역량은 오히려 더욱 빛을 발한다. 총괄 프로듀서 용감한 형제의 송라이팅 능력 역시 명불허전. 트렌드의 최전선에서는 다소 멀어졌다지만 듣기 좋은 멜로디를 짜내는 감각만큼은 여전히 국내 최고 수준이 아닌가 싶다. 멤버들의 섬세한 보컬과 프로듀서의 탁월한 재능이 합쳐져 최고의 시너지를 낸 '술버릇'은 그 촌스러운 제목마저도 과거의 서글픈 노스탤지어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호소력을 지닌 강렬한 트랙이다.
12명의 멤버를 22개월 동안 순차적으로 공개하며 개개인별로 솔로곡을 발매한다는 전례 없는 방식으로 데뷔한 이달의 소녀의 특별함은 압도적인 수준의 사운드 퀄리티를 자랑하는 악곡 라인업으로 완성되었다. 주로 일렉트로닉 뮤직을 기반으로 하는 블록베리크리에이티브의 세련된 프로덕션은 'Butterfly', 'Girl Front', 'Eclipse' 등 K-POP 걸그룹이 이뤄낼 수 있는 음향적 성취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인 탁월한 결과물들을 연이어 배출해냈다. 하지만 A&R을 담당하고 있던 정병기 이사가 퇴사한 후 발매된 'So What'과 'PTT (Paint The Town)' 등의 트랙들은 기존의 뛰어난 작품성을 잃어버린 채 실망만을 안겨줄 뿐이었다. 그렇게 하향곡선을 그리던 이달의 소녀의 디스코그래피를 다시 반전시킨 변곡점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갑작스럽게 등장했으니, 바로 일본 데뷔 싱글 'Hula Hoop' 였다.
청량한 전자음이 한여름의 이슬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Hula Hoop'의 비트는 출렁이는 에너지를 가득 품고 내달린다. 짧게 끊어치는 벌스 설계로 비트의 빈틈을 메꿔 속도감을 극대화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매끈하게 다듬어진 사운드는 그 어느 때보다 세련된 만듦새를 자랑하고, 신스와 보컬을 겹쳐 멤버들의 목소리를 악기처럼 사용하는 프로덕션은 풍요로운 청각적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에 더해 브릿지에서 직선적인 고음으로 텐션을 터뜨리는 츄의 무르익은 기량은 화룡점정. 탄산음료처럼 톡 쏘는 맛으로 청자의 귀를 사로잡는 'Hula Hoop'는 지루할 틈이 없는 촘촘한 짜임새로 강력한 파괴력을 획득했다.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이달의 소녀가 돌아왔다.
태민, [Advice - The 3rd Mini Album], SM엔터테인먼트, 2021
11위
태민, 'Advice'
이미 과포화되어버린 K-POP 시장에서 왜 지금 이 순간태민이어야만 하는가? 그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를 계속해서 제시해 왔다. 빼어난 퀄리티의 첫 정규 앨범 [Press It]을 시작으로 'MOVE', 'Criminal', '이데아'에 이르기까지 태민은 꾸준히 우수한 작품들을 선보이며 자신의 서사를 지속적으로 확대해 왔다.그 과정을 통해 절제의 관능, 세련된 베이스 사운드 등 태민이라는 두 글자 이름이 상기시키는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은 이미지들이 점차 늘어났지만 역시 그의 가장 큰 무기는 중성적인 멋이 아닐까 싶다. 단순히 남성 아티스트가 여성적인 요소를 취하는 게 아니라, 남성과 여성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채 성별이라는 속박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워짐으로써 비로소 획득하는 설득력. 다른 남성 솔로 아티스트들에게는 없지만 태민에게만은 있는 것을 단 하나만 꼽자면 그 유니크한 중성미라 하겠다.
태민이 입대 전 마지막으로 선보이는 'Advice'는 그 중성적 속성에 본격적으로 접근하는곡이다.일반적으로 걸그룹이 입을 법한 짧은 크롭티를 입고 긴 머리를 휘날리며 춤을 추는 태민의 무대에서는 남성과 여성의 오랜 이분법이 허물어지고 단지 압도적인 카리스마의 퍼포먼스만이 오롯이 남을 뿐이다. 때문에 원곡의 여자 키를 그대로 가져와 앙칼진 가성으로 소화해 내는 파격적인 후렴 역시 자연스러운 내러티브의 연장선상에서 태민이라는 탈이분법적 아티스트의 증거로서 작용하게 된다. 광기어린 목소리로 진성과 가성, 랩과 보컬을 넘나들며 장엄한 콰이어와 피아노 아르페지오 위를 자유분방하게 뛰노는 과감한 프로덕션은 그의 비전에 한층 힘을 싣는다.
'날 가둘 수록 보란 듯 엇나가 잘 봐' 라며 성별이라는 수갑을 뿌리친 태민은 '더 참신하게 상상력 좀 발휘해 봐' 라고 도발한다. 여성에게 맞춰진 옷을 입고 여성에게 맞춰진 노래를 부르는 그의 모습은 누군가에게는 혁명이요 누군가에게는 당혹감으로 다가올 것이고 어느 쪽이 되었든 그것은 급진적인 변화를 마주할 때 인간이 느낄 자연스러운 감정임이 분명하다. 허나 만약 당신이 K-POP을 지배하는 뿌리깊은 고정관념을 허물고자 하는 태민의 도전을 방해할 생각이라면, 충고 한 마디 덧붙이겠다. 부디 더 참신하게 상상력 좀 발휘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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