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발매된 아이브의 신곡 “Baddie”를 듣고 가장 처음 든 생각은 무엇이었는가? 아마도 십중팔구는 ‘어라, 이거 에스파 ”Savage”인데?‘ 라는 기시감을 느꼈을 것이다. 메탈릭한 트랩 비트, 단순하고 반복적인 훅, 공격적이고 과시적인 가사까지 놀랍도록 유사한 지점이 많은 두 곡은 분명 우연치고는 너무나도 닮아 있다.
@haethehae (YG 프로듀서 HAE) 인스타그램 계정
제작 과정에서 에스파의 모티프가 작용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적다. 기획사 측에서 곡을 수집할 때는 무작정 다 받아오는 게 아니라 사측에서 원하는 구체적인 조건을 전세계 작곡가들에게 제시하고, 작곡가들은 그 조건에 맞게 데모곡을 제작하여 제출한다. 위 사진은 YG엔터테인먼트의 한 프로듀서가 업로드한 인스타그램 스토리 게시물로, 신인 걸그룹 베이비몬스터의 데뷔곡 수집 과정에서 회사가 원하는 조건들을 상세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렇게 프로듀서들에게 발주하는 요구사항 리스트를 리드(Lead)라고 하는데, 내용을 살펴보면 베이스를 강조하거나 골프장 씬에 어울려야 하는 등 굉장히 구체적으로 작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몇 줄의 글로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므로 레퍼런스 삼을 수 있는 예시곡을 함께 제시하는데 보통 레퍼런스 곡들을 보면 사측이 원하는 느낌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 수 있다. 곡의 메인 포인트를 악기에서 만들었으면 한다는 요구사항은 레퍼런스로 제시된 라이즈의 “Get A Guitar”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아마 아이브의 소속사인 스타쉽엔터테인먼트는 리드를 발주할 때 대략 이러한 조건을 제시했을 것이다. 가령, 트랩 힙합 장르, 물기를 싹 제거한 금속성의 비트-하지만 과하지 않고 미니멀하게, 간단하고 중독적인 후렴, 댄스 브레이크… 그리고 아마도 레퍼런스 곡은 에스파의 “Savage”나 하이퍼팝 아티스트 소피(SOPHIE). 프로듀서들은 요구사항에 충실하게 곡을 완성했고 그렇게 “Baddie”가 탄생했을 것이다.
2. 에스파라는 브랜드의 플래그쉽 트랙, "Drama"
@STARSHIP ENT.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 중 일부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결국 에스파 따라했다는 거 아냐?’ 지난해 가요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유희열의 표절 논란 때에도 그랬듯이 음악계 종사자들 사이에서도 표절과 영감을 구분하는 기준은 서로 다르고 불분명하다. 하지만 현대예술은 완전한 제로에서부터의 창작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소스들을 어떻게 창의적으로 조합하느냐의 문제인 만큼 레퍼런스의 예술적 의의는 명확하며, 단순한 카피와는 반드시 구분되어야 한다. 물론 모든 곡에 적용될 수 있는 절대적인 검증 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Baddie”에 대해서만큼은 확실하게 말해두고 싶다.
”Baddie”는 에스파의 아류작일 뿐인가? 그렇지 않다.
아이브가 잠시 에스파의 문체를 빌려온 것은 자명해 보이나, “Baddie”가 겨냥하고 있는 지점은 에스파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마침 비슷한 시기에 에스파의 신곡 “Drama” 역시 발매되었으니 보다 쉽게 둘을 묶어 비교해 볼 수 있겠다.
이번 곡에서 에스파의 방법론은 정직하다. 시장에서 사용되던 '걸크러쉬' 류의 공식을 큰 변주 없이 그대로 차용했다. 이수만 프로듀서가 SM을 나간 뒤 발매되는 첫 곡이라는 점을 의식한 듯 그 전까지 가사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광야(KWANGYA)' 세계관의 흔적이 이번에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가사는 대부분 추상적인 단어들로 채워졌고, 에스파의 음악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서사의 구성은 평면적으로 변했다.
@SM ENT.
서사의 빈자리를 채우는 건 멤버 개개인의 무르익은 역량과 기본에 충실한 프로듀싱이다. 특히 닝닝은 보컬과 랩 양면에서 지금까지의 커리어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존재감을 발휘하며 그 가파른 성장세를 가늠케 한다. 편곡 면에서는 이전만큼 획기적인 새로움을 제공하지는 않지만 "Savage"에서 이미 한 번 검증된 작법을 재활용해 안전하게 일정 수준 이상의 완성도를 확보했다.
3. 키치의 문법과 뺄셈의 미학으로 읽어낸 시대성, 아이브 "Baddie"
@ STARSHIP ENT.
이렇듯 에스파가 "Drama"에서 대중들에게 익숙한 에스파라는 브랜드의 플래그쉽 모델을 재생산함으로써 안정적인 현상유지를 노렸다면, 아이브는 그 에스파성(性)을 전유하여 뺄셈의문법으로 재편집한다. 다시 말하자면 "Baddie"는 보급형 "Savage"라는 평가를 의도적으로 노린 작품이라 할 수 있다.앤디 워홀이 공장식 대량생산 시스템을 팝아트의 미학으로 전환한 것처럼, 아이브는 화질을 열화시킨 에스파성(性)에서 키치의 미학을 찾는다.
@ STARSHIP ENT.
에스파의 곡들은 대부분 사운드의 공간감을 풍성하게 가져가고 많은 트랙들을 겹쳐 호화로운 구성을 취한다. 허나 "Baddie"의 비트는 드럼을 제외하면 동시에 3개 이상의 악기를 사용하지 않고 사운드를 건조하게 다듬어 입체감 역시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심지어 그나마 잠시 분위기를 환기하는 프리코러스조차도 2절에서는 단 두 마디만으로 줄여 버린다.에스파를 포함한 수많은 케이팝 음악이 의례처럼 넣는 브릿지 구간의 변주도 삭제하고 짧은 댄스 브레이크로 대체했다.
그야말로 최소한의 뼈대만 남기고 다 덜어낸 셈인데, 의외로 부족함보다는 신선함이 더 크게 느껴진다. 덜어낸 만큼 팽팽하게 짜여진 구성이 시대가 요구하는뺄셈의 미학을 잘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숏폼의 규격에 맞춰 단순하고 캐치하게 디자인된 후렴이나, 뉴진스의 'Hype boy'처럼 불필요한 구간을 최대한 생략하고 2분 35초로 담아낸 컴팩트한 구성 등이 그 예시다.
@ STARSHIP ENT.
에스파에 비해 아이브 멤버 개개인의 (특히 래퍼 라인의) 역량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Baddie"에서 랩을 맡은 레이와 가을은 "Savage"에서 지젤과 카리나가 탄탄한 발성과 팽팽한 플로우로 주었던 청각적 쾌감을 재현하지 못한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모조품에서 느끼는 B급 감성"을 유도하는 키치의 조건이 성립될 수 있다. 때문에 "Baddie"는 팀의 약점을 역이용해 키치의 미학으로 가공시키는 영리한 트랙이다. 아이브의 전작이 제목부터 "Kitsch"인 것을 고려하면, 이러한 성과가 소 뒷걸음질치다 쥐 잡은 것은 분명 아닐 터다.
@STARSHIP ENT. / SM ENT.
기술적 측면에서 더 수준이 높은 것은 물론 풍성한 프로덕션을 동원한 에스파 쪽이겠지만, 블록버스터 영화보다 유튜브 쇼츠를 선호하는 뺄셈으로서의 시대성에 명중한 쪽은 아이브일 것이다. 독립적인 작품으로서의 완성도가 높은 에스파의 "Drama"와, 날카롭게 대중의 니즈를 읽어낸 아이브의 "Baddie".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지만 그 본질은 정반대인 두 곡 중 당신의 선택은 어느 쪽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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