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Y2K는 오늘날의 가장 대표적인 트렌드가 되었다. 뉴진스(NewJeans)를 필두로 한 Y2K 열풍은 확실히 현대 대중문화의 미감에 근본적인 혁신을 가져왔다. 하지만 발빠른 사람들이라면 이미 Y2K의 다음 주자를 내다보고 대비 중일 터. 아직 잘 모르겠다고? 쉿, 당신에게만 특별히 살짝 귀띔해 주겠다. 머지않아 수면 위로 떠오를 다음 트렌드는 프루티거 에어로(Frutiger Aero)다.
1장. 프루티거 에어로가 뭔데요?
디지털 시대와 사이버 공간의 개막, 우리는 세상을 영원히 바꿔 놓을 거대한 변화를 마주하던 2000년대 중후반의 시대정서를 기억한다. 애플의 아이폰과 마이크로소프트의 운영체제 윈도우가 등장하며 인터넷이 본격적으로 우리의 삶 속으로 깊숙히 들어오기 시작하던 그 시절, 우리 모두는 1999년에서 2000년으로 카운트다운이 넘어가던 순간처럼 새로운 시대가 열릴 거라는 장밋빛 설렘에 가득 차 있었다.
프루티거 에어로의 대표적 이미지들. 삼성 갤럭시S3나 엑스박스와 같은 전자기기에도 프루티거 에어로 스타일의 디자인이 적용되어 있다.
그 시절의 정서를 그리워하고 추억하는 사람들이 인터넷 상에서 모여 2000년대 중반~2010년대 초반의 문화에서 드러나던 공통된 미학을 명명했으니, 바로 프루티거 에어로(Frutiger Aero)다. 프루티거 에어로의 가장 큰 특징은 찰랑이는 물방울, 눈이 편안한 자연색, 촉촉하고 글로시한 질감 표현, 그라데이션, 열대어, 비눗방울 등의 요소들이다. 컴퓨터와 핸드폰 등 미래지향적 기술들과 맑은 자연성의 이질적인 조합은 2000년대 초반을 상징하는 Y2K의 미학과는 또다른 신선한 느낌을 선사한다.
좌측 프루티거 에어로 스타일의 과거 로고는 사물 본연의 질감과 형태를 입체적이고 생생하게 표현한 반면, 오늘날의 아이폰은 단순화된 형태와 플랫한 질감의 로고 디자인을 보여 준다.
텍스처의 평면성이 부각되고 SD 화질과 컬러풀한 원색 사용이 중시되었던 Y2K와는 달리, 프루티거 에어로는 입체적이고 광택이 있는 텍스처와 선명하고 해상도가 높은 HD 화질, 자연색 사용을 모토로 한다. 사물의 질감을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생생하게 표현하는 스큐어모피즘(skeuomorphism) 기법도 프루티거 에어로의 특징 중 하나다.
프루티거 메트로의 대표적인 이미지
비슷한 결의 미학인 프루티거 메트로(Frutiger Metro)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프루티거 메트로의 특징은 화려하고 컬러풀한 색 배합, 바탕으로 물결이 퍼져나가는 듯한 원형과 곡선 형태, 스피커와 디제잉 턴테이블 등의 요소들이다.
(좌) 게임 "아이토이: 그루브", (우) 게임 "스플래툰2"
멀리로는 과거 '국민 게임기' 였던 플레이스테이션2를 통해 출시된 게임 아이토이 시리즈부터 오늘날의 국민 게임기 닌텐도 스위치를 통해 즐기는 스플래툰(Splatoon) 시리즈까지, 프루티거 메트로의 색감과 디자인 역시 대중적으로 익숙한 소재다. 혹자는 프루티거 메트로가 '롯데리아코어'라며 롯데리아 매장 벽의 그림들을 연상시킨다는 재미있는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2장. 대중음악 속에서 찾는 프루티거 에어로
Madonna, "Love Profusion" (2003)
마돈나, "Love Profusion" 뮤직비디오 장면 일부
대중음악 영역에서도 프루티거 에어로와 프루티거 메트로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마돈나의 2003년작 "Love Profusion" 뮤직비디오를 예로 들 수 있겠다. 물과 하늘의 글로시한 질감 표현, 열대어와 꽃 등 대표적인 필수 요소들을 집대성한, 프루티거 에어로의 교과서라고 해도 좋을 작품이다.
티아라, "Bo Peep Bo Peep" (2009)
한국의 경우, 2009년 티아라의 보핍보핍(Bo Peep Bo Peep) 무대 그래픽에서 프루티거 메트로의 흔적을 확인해볼 수 있다. 강렬한 원색의 색감과 매끈하고 입체적인 질감을 가진 원형 오브젝트가 통통 튀어다니는 화면이 프루티거 메트로의 영향을 드러낸다.
KBS <뮤직뱅크> 로고
무엇보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할 프루티거 메트로적 요소는 바로 뮤직뱅크의 로고 디자인이다. 색감부터 아기자기하게 배치된 오브젝트들까지 모두 프루티거 메트로의 원칙들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브라운아이드걸스, "이상한 일" (2009)
프루티거 에어로는 단지 외적으로 보이는 디자인 부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의 사운드를 통해서도 표현될 수 있다. 케이팝에서 프루티거 에어로 스타일을 음악 내적으로 구현한 대표적 시도는 브라운아이드걸스의 2009년작 "이상한 일"이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글로시한 질감의 악기들이 아기자기하게 굴러다니는 비트를 듣다 보면 눈 앞에 절로 푸른빛 물방울과 열대어들이 떠다니는 듯하다. '푸르른 하늘 위로 날아볼까 / 스르르르 솜사탕 녹아내려가 / 사랑은 빗물을 타고 후루룹' 과 같은 귀여운 가사들도 프루티거 에어로의 평화롭고 촉촉한 바이브를 구성하는 데 기여한다.
클래지콰이, "Wizard of OZ" (2009)
프루티거 메트로 쪽으로는 클래지콰이의 2009년작 "Wizard Of OZ"를 소개할 수 있겠다. 앨범 커버부터 이미 프루티거 메트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이 드러나는 이 곡은 LG 텔레콤의 인터넷 서비스 오즈(OZ)의 광고음악으로 쓰였다. 광고에는 당시 <꽃보다 남자>로 인기를 모았던 김범, 유승호, 이연희 등 스타들이 출연해 많은 화제가 되었는데, 음악 역시 일품이다. 리버브를 잔뜩 먹여 청량하게 퍼지는 전자음과 부드럽고 세련된 멜로디가 프루티거 메트로의 미래적이고 컬러풀한 이미지를 완벽히 구현한다.
3장. 프루티거 에어로가 돌아왔다
중국 쓰촨성의 청두 지하철역. 건축 영역에서까지 프루티거 에어로/메트로 스타일의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2000년대 중후반을 풍미했던 프루티거 에어로와 메트로 스타일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낡은 것'이 되어 시장에서 소리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2020년대 들어 Y2K 문화가 부활하기 시작하며 과거의 미감에 다시 주목하는 이들이 많아졌고, 시대 구분상 Y2K의 다음 순서인 프루티거 에어로 역시 서서히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다.
Pinkpantheress, "Nice to meet you" (2023)
새로운 트렌드의 방아쇠를 당긴 건 현재 명실상부히 가장 핫한 팝스타 중 하나인 핑크팬더레스(Pinkpantheress)다. 몇 달 전 발매된 그녀의 "Nice to meet you" 뮤직비디오를 감상해 보자. 지금까지 이 글을 읽은 사람이라면 이것이 노골적으로 프루티거 메트로와 에어로 스타일을 재현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핑크팬더레스, "Nice to meet you" 뮤직비디오 장면 일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핑크팬더레스가 프루티거 에어로를 물었다는 것은 심상치 않은 징후다. 그녀는 드럼앤베이스 비트와 베드룸 팝 스타일의 멜로디를 창의적으로 결합시키며 씬에 강렬한 파급력을 가져온, 이 시대의 가장 강력한 트렌드메이커다. 그녀의 방법론을 전면적으로 차용한 뉴진스의 "Super Shy"를 필두로, 제로베이스원의 "In Bloom", 트리플에스의 "Invincible" 등 2023년 케이팝 씬에 우후죽순 등장한 모든 드럼앤베이스 음악들은 핑크팬더레스의 영향권 안에 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다. 달콤한 멜로디와 이지-리스닝 프로덕션이 특징인 그녀의 음악은 케이팝이 레퍼런스 삼기 가장 적합한 대상이다. Y2K 열풍의 대표주자였던 그녀는 이제 다음 둥지로 프루티거 에어로를 선택했다. 이것은 명백히 영미권 팝뿐만 아니라 케이팝 시장의 향후 동향 예측에도 유의미한 징후적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4장. 케이팝은 이미 프루티거 에어로를 선택했다
aespa, "Better Things" (2023)
사실 최근 몇몇 케이팝 팀들은 이미 프루티거 에어로를 조금씩 시도하고 있는 추세다. 지난해 발매된 에스파의 싱글 "Better Things"가 그 대표적인 예시다.
"Better Things" 뮤직비디오 장면 일부
"Better Things"의 뮤직비디오는 대부분 파란색과 초록색의 편안한 색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물을 화면에 담을 때 프루티거 에어로 특유의 글로시한 질감이 두드러지게 표현된다. 프루티거 에어로의 필수 요소인 열대어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Better Things" 뮤직비디오 장면 일부
멤버들이 물 위에서 춤을 추며 물의 찰랑이는 질감을 강조하고, 급기야는 바다 속으로 잠수해 물고기를 타고 비누거품을 가지고 노는 중반부부터의 화면은 더욱 프루티거 에어로적이다. 꽃 줄기의 입체적인 질감과 색감을 살린 로고 역시 마찬가지다. 맑은 소리의 피아노와 공간감 있는 신디사이저를 사용한 사운드와 뮤직비디오 비주얼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훌륭한 프루티거 에어로 작품이 탄생했다.
NMIXX, "O.O" (2022)
"O.O" 뮤직비디오 장면 일부
엔믹스의 데뷔곡 "O.O" 뮤직비디오 중반부에서도 프루티거 에어로의 테이스트가 엿보인다. 열대어와 고래 등 바다 생물들, 자세하고 생생한 질감의 사물들, 구름으로 가득한 하늘까지. 아래 규진과 배이의 장면에서는 스피커, 앰프 등 프루티거 메트로적 요소들도 발견할 수 있다. 화면의 채도가 낮고 색감이 어두운 편이라 프루티거 에어로의 느낌은 덜하긴 하지만 한 번쯤 언급할 만한 작품이다.
트리플에스, "Cherry Talk" (2023)
음악 내적으로 프루티거 에어로를 가장 잘 구현한 케이팝 작품은 지난해 발매된 트리플에스의 "Cherry Talk"이다. (해당 곡은 정라리 선정2023년 올해의 노래 4위로 꼽히기도 했다) 앨범 제목부터 [AESTHETIC]을 표방하며 등장한 "Cherry Talk"의 사운드는 깨끗한 카우벨 소리, 달콤한 윈드차임 소리, 휴대전화 진동음, 후렴구의 현란한 스크래치 등 프루티거 에어로/메트로적 요소들로 가득하다. 공간감과 입체감을 강조한 믹싱도 일품이다. 반짝이는 사운드 소스들이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역동성을 만들어내는 아기자기한 비트가 마치 글리터와 스티커를 잔뜩 붙혀놓은 어린아이의 비밀 다이어리 같다.
트리플에스, "Cherry Talk" 뮤직비디오 장면 일부
뮤직비디오에서도 진주와 비눗방울 등 글로시한 구형의 오브젝트나 식물과 꽃 등 프루티거 에어로에서 즐겨 사용하는 요소들이 발견된다. 그러면서도 Y2K의 테이스트가 묻어나는 사물들을 곳곳에 배치하고 Y2K 특유의 키치한 색감을 강조하여 현재의 트렌드와도 부드럽게 연결한다. Y2K와 프루티거 에어로, 두 개의 스타일을 자유로이 오가며 트렌드 간에 발빠르게 징검다리를 놓은 "Cherry Talk"은 훗날 프루티거 에어로가 케이팝 씬에 자리잡았을 때 반드시 그 가치가 재평가받을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STAYC, "Be Mine" (2023)
이외에는 스테이씨의 "Be Mine" 같은 곡도 특기할 만하다. 크게 높낮이가 없는 완만한 구성에 물기를 머금은 비트가 프루티거 에어로의 미학을 잘 드러낸다. 이처럼 케이팝에서도 메이저한 위치에 있는 팀들이 조금씩 프루티거 에어로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은 고무적이다. 소문에 의하면 뉴진스 역시 4월 컴백에서 클로버를 메인 아이템으로 활용한다는 추측이 있는데, 클로버라는 소재가 주는 평화로운 무드와 녹색 색감이 프루티거 에어로에 어울리는 소재인 만큼 기대해볼 만하다.
샤이니, "Odd" (2015) 앨범 커버와 컴백 트레일러 영상 일부. 청량한 색감, 물고기, 거품 등 보이그룹에도 프루티거 에어로가 활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다.
빠르면 올해 안으로, 늦으면 1~2년 안에 프루티거 에어로는 케이팝의 영역 안으로 완전히 들어올 것이다. 그것이 Y2K만큼의 히트 상품으로 자리잡을지는 누구도 모르는 일이지만, 만약 Y2K의 다음 트렌드로 가장 유력한 스타일을 꼽으라 하면 프루티거 에어로와 메트로일 것이다. 특유의 청량감과 화사한 색감이 케이팝(특히 걸그룹)과 '찰떡궁합'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케이팝 아티스트들이 뮤직비디오 속에서 찰랑이는 바다와 풀밭 속으로 뛰어드는 그날까지, 프루티거 에어로 붐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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