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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빈 Feb 20. 2024

이제 (여자)아이들의 전략은 달라졌다

(여자)아이들이 "Super Lady"가 되어 돌아왔다. 당당하고 에너제틱한 태도는 여전하지만 좋게 말하려 해도 예전의 세련된 맛은 찾아보기 어렵다. 대중의 반응 역시 썩 좋지 않다. 그들이 외치는 여성 담론이 진부하고 메시지의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주장이다. 


아마 그 비판은 문제작 "Nxde"로부터 출발했을 것이다. 마릴린 먼로를 인용하여 미디어의 성 상품화와 대중의 왜곡된 성 인식을 비판하면서도 정작 무대에서는 다를 바 없이 과한 노출과 불필요한 섹스 어필로 작품의 의도를 흐린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그 지적에 동의하진 않지만, 대중이 어떤 점에서 그렇게 느끼고 있는지는 충분히 이해가 된다. 


전작 "퀸카" 역시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자신을 "TOMBOY"로 정의하며 여성과 남성의 낡은 이분법에서 탈피하고 사회의 극우화 이후 거세진 백래시의 서킷브레이커 역할을 자처한 그들이 1년 만에 갑자기 180도 바뀌어 'My boob and booty is hot' 따위의 가사를 노래하다니, 가히 변화가 아니라 변절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의 충격이었다. 


다른 팀이었다면 이 정도로 부정적인 반응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이 대중적 인지도를 얻게 된 대표곡 "LION"과 최대 히트곡 "TOMBOY"가 모두 여성 서사를 담고 있었기에 대중은 자연스레 (여자)아이들에게 케이팝 페미니즘의 선봉장과도 같은 역할을 겹쳐 보게 된 것이다. 그런 그들이 페미니즘의 철학에 부합하지 않거나 담론의 밀도가 떨어지는 작품들을 연이어 내놓으니 더 실망감이 드는 건 당연지사다.


나 역시 그 중 하나였다. 데뷔 때부터 그들의 역량에 줄곧 찬사를 보내 왔고 "LION"의 경우에는 2010년대 케이팝 전체를 통틀어서도 14위에 달하는 걸작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직관적인 키워드로 이분법적 구도를 전복시키는 과감한 발상을 통해 여성 담론을 케이팝에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전소연의 감각은 그야말로 천재적이었다. 반면 그 번뜩이는 전달력이 퇴색된 "Nxde", "퀸카", "Super Lady" 3부작은 그들의 예전 모습을 잃어버린 듯했다. 정말 그들은 변해버린 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스'다. (여자)아이들은 변했고, 가장 큰 강점이었던 담론의 호소력이 줄어든 것도 맞다. 하지만 "Super Lady"를 여러 번 반복해 들으면서 어쩌면 그 변화가 퇴보가 아닌 진화에 가까울 수도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메시지의 세밀함은 떨어진 대신, 사운드와 멜로디의 매력은 한층 발전했기 때문이다.


"Super Lady"는 투박하고 헐겁지만 강렬하고 직선적인 에너지로 약점을 감추고 강행돌파하는 곡이다. 디스토션 기타로 고조된 무드를 한순간에 무너뜨리며 울려퍼지는 사이렌 소리와 함께 공격적인 베이스가 침공하는 후렴구의 파괴력이 상당하다.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앞으로 전진하는 안무가 사운드의 거친 맛을 더욱 살린다. 2절이 끝난 직후 공간감을 더욱 확대한 베이스로 곧장 둔탁하게 때리는 후반부의 프로덕션도 재미있다. 오토바이를 타고 계단을 덜컹거리며 달려 내려가는 듯한 거친 굴곡감이 일품이다. 전자음을 활용하는 파트에서 소리의 입체감과 속도감을 제대로 살리며 전작들에서 찾아볼 수 없던 매력적인 사운드를 선보인 "Super Lady"는 사운드 측면에서 (여자)아이들의 기술적 발전을 증명하는 트랙이다.


이참에 "퀸카"도 한번 돌이켜 보자. 상술했듯이 메시지 측면에서 "퀸카"의 가치를 찾기는 어렵다. 하지만 "퀸카"의 멜로디가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임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TOMBOY", "Oh my god", "화" 등 (여자)아이들의 많은 곡들은 후렴을 멜로디 없이 텅 비우는 일이 잦았는데, 그 때문에 감춰져 있던 전소연의 탑라이너로서의 탁월한 자질이 뒤늦게 드러나게 된 것이다. 나는 전소연이 이 정도로 대중적인 코드를 잘 이해하고 있는 프로듀서인지 알지 못했다.


이제 더 이상 (여자)아이들의 무기는 메시지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그들을 특별하게 만들어준 건 선명하고 직선적인 메시지의 위력이었지만, 이제 그들은 멜로디사운드라는 (어찌 보면 음악으로서의 본질에 더 가까운) 새로운 무기로 무장한 채 전진한다. 그것이 바로 커리어의 제2막에 이르른 (여자)아이들이 매너리즘을 돌파하기 위해 수립한 전략이고, 더 다양한 강점을 갖춘 팀으로 진화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시험의 답안이다. 그리고 "Super Lady"와 "Wife"가 수록된 정규앨범 [2]에 이르러, (여자)아이들은 비로소 그 시험을 멋지게 통과한 듯 보인다.



발매 초반의 멜론차트 순위와 최근 순위. 대중도 뒤늦게 곡의 가치를 이해해준 것인지 음원차트 순위도 스멀스멀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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