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어제 발매된 르세라핌의 신곡 "EASY"가 어떤 곡인지부터 살펴보자. 차진 하이햇과 함께 묵직하게 꽂아주는 베이스가 트랩 리듬 특유의 스타일리쉬한 그루브를 만들고 있다. 간단해 보이지만 치밀한 비트다.이 정도로 트랩의 맛을 제대로 살린 메인스트림 걸그룹의 곡은 블랙핑크의 "Shut Down" 이후로 처음인 듯하다. 블랙핑크의 경우 곡 구성 면에서 케이팝의 형식을 벗어나지 않았지만 르세라핌은 완전히 기성 힙합 곡들과 차이가 없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특히 쿨하고 미니멀한 훅이 실제 래퍼의 곡을 그대로 번안한 듯 자연스럽고 캐치하다. 다만 벌스의 경우 짜임새가 다소 헐겁고 과도한 저음역대 사용으로 인해 멤버들의 발성이 힘을 잃는 등 아쉬움을 남긴다.
이렇듯 "EASY"는 비트부터 훅메이킹까지 트랩 힙합의 전형적 구조를 그대로 재현한 과감함이 돋보이는 곡이다. 하지만 어째서 힙합이어야 했던 것인가? 이 글에서는 세 가지 이유를 들어 르세라핌이 컴백 곡으로 트랩 힙합을 택한 이유를 분석한다.
2. 르세라핌은 이미 힙합이었다
첫째로, 르세라핌이라는 팀의 프로듀싱 전략과 가장 잘 어울리는 장르가 다름아닌 힙합이기 때문이다. 데뷔곡 "FEARLESS"부터 르세라핌은 강한 자기확신을 토대로 외부의 방해에 요격을 가하는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애티튜드를 곡 내에서 선보여 왔다. 이는 자신을 헐뜯는 헤이터들에 대한 디스(diss)가 가사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힙합 음악의 기조와 일치한다.
또한 이전 칼럼에서도 언급한 대로, 르세라핌은 멤버 개개인의 실제 서사를 가사에 언급하는 작법으로 케이팝 음악 특유의 제4의 벽을 허물고 메세지의 호소력을 더욱 강화하는 프로듀싱 전략을 취해 왔다. 가령, 실제 발레리나 출신인 카즈하가 "잊지 마 내가 두고 온 toe shoes"라고 언급한다거나, 13년의 기나긴 연예계 경력을 가진 사쿠라가 "무시 마 내가 걸어온 커리어"라고 자신감을 표출하는 식이다. 이를 통해 청자는 르세라핌이 기존의 아이돌처럼 산업에 의해 만들어진 가상의 콘셉트가 아니라 진짜 스스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믿게 된다. 이번 곡 "EASY"에서도 카즈하의 '발레'를 언급하는 등 그 기조는 여전히 이어지는데, 이러한 작사법과 캐릭터메이킹 전략은 '자신의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풀어내는 것이 중시되는 장르인 힙합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사례다. 때문에 그동안 르세라핌이 취하고 있던 음악적 기조는 이미 라틴이나 팝보다는 힙합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힙합을 택하는 건 필연에 가까웠다.
3. 무혈입성이 가능한 절호의 기회
둘째로, 지금은 케이팝 시장 내에서 힙합 음악의 파이가 무주공산인 보기 드문 기회다. 한국에서 힙합 음악이 주류는 아니지만 장르음악 중에서는 가장 수요층이 굳건한 편이다. 따라서 케이팝 씬에서도 힙합은 항상 꾸준히 일정 파이를 차지해 왔다. 멀리 갈 것 없이 빅뱅(BIGBANG)과 투애니원(2NE1), 지코 등을 떠올리면 된다. 최근까지는 블랙핑크가 그 자리를 오랫동안 점유하고 있었지만, 재계약 이슈로 블랙핑크의 완전체 활동을 보기가 더욱 힘들어져 왕좌에 공백이 생겼다.
마침 다른 4세대 걸그룹 경쟁자들은 힙합과 거리가 먼 상황이다. 뉴진스는 드럼앤베이스와 저지 클럽을 필두로 한 일렉트로니카 음악에 집중하고 있으며, 에스파는 세계관과 탄탄히 결합된 하이퍼팝을 선보이고 있다. 아이브는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Baddie"에서는 트랩도 시도한 바 있지만, 멤버 구성상 힙합을 장기적 플랜으로 채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블랙핑크의 직속 후배인 베이비몬스터는 아직 제대로 된 데뷔도 치르지 않은 상태다. 그나마 키스 오브 라이프(KISS OF LIFE)의 음악이 힙합과 가장 가깝지만 랩보다는 보컬에 강점이 있는 팀이고, 드릴 힙합을 선보이는 영파씨(YOUNG POSSE)는 르세라핌과는 기본적인 체급 차이가 크다.
따라서 르세라핌은 이러한 판도를 기민하게 파악하고 공석이 된 케이팝-힙합의 영토를 발빠르게 선점한 것이다. 놀라운 통찰력이다. 예전부터 쏘스뮤직의 남다른 기획력과 시장 분석력에는 감탄한 바 있다. 라틴 팝의 잠재력을 꿰뚫어보고 재빨리 케이팝의 영역으로 가져온 "ANTIFRAGILE"을 비롯한 르세라핌과 쏘스뮤직의 포트폴리오는 모든 기획사가 참고할 만한 우수 사례다.
4. 결국, 변해야만 했던 이유
마지막으로, 르세라핌은 장르의 변화를 통해 매너리즘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었다. 팀의 메세지가 뚜렷하다는 것은 명백한 장점이지만 한편으로는 타성에 젖기 쉬워진다는 약점도 있다. 이 양날의 검을 잘 다루고 있는 좋은 사례는 (여자)아이들이고, 아쉬운 사례는 있지(ITZY)이다. 여성주의적 메시지를 유지하면서도 클래식을 샘플링하거나 다채로운 장르를 시도하는 등 음악적으로는 끊임없이 변주를 주는 (여자)아이들의 전략은 합리적이다. 반면 데뷔곡 "달라달라"의 메가히트로 자기긍정의 메시지를 각인시킨 있지는 다소 안일한 동어반복적 프로덕션으로 초반의 기세를 잃고 말았다.
르세라핌, "UNFORGIVEN" (2023)
르세라핌 역시 "ANTIFRAGILE"의 성공에 취한 탓인지 곧바로 음악과 주제 모두 전작과 매우 유사한 "UNFORGIVEN"을 출시했다가 기대보다 다소 아쉬운 성적표를 받아든 적 있다. 다행히 후속곡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와 "Perfect Night"이 히트하며 다시금 성장 동력을 얻긴 했지만, "UNFORGIVEN"의 미적지근한 성과가 쏘스뮤직에게 시사하는 바는 결코 적지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이번 컴백에서는 라틴 팝이 아닌 새로운 장르를 반드시 시도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 중 르세라핌의 콘셉트와 가장 위화감 없이 녹아들 수 있고, 같은 장르 내의 경쟁자도 없는 최적의 타겟이 힙합임을 발견한 쏘스뮤직은 망설임 없이 변화의 발걸음을 내딛었다.
5. 글을 마치며
르세라핌, "EASY" 티저
"세상이 우리한테만 쉬운 것 같니?"라는 티저 영상 속 김채원의 대사처럼, 르세라핌은 뚜렷한 메시지와 다채로운 음악이 공존하는 탄탄한 디스코그래피를 너무나도 쉽게 완성해 나가고 있다. 하지만 우아한 백조가 수면 아래에서 바쁘게 발을 휘젓듯, 그 성공의 바탕에는 분명 쏘스뮤직의 영민한 판단력과 멤버들의 독기 어린 노력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계속해서 창의적인 작품과 날카로운 기획을 선보일 르세라핌의 향후 행보를 주목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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