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은 본질적으로 알앤비, 힙합, 록 등 다양한 장르가 융합된 하이브리드 뮤직이지만, 케이팝이 모든 장르음악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케이팝에서 사용되는 장르는 몇몇 종류에 국한되어 있으며 비주류 장르는 철저히 외면받기 일쑤다. 하지만 최근 들어 시장 규모가 커지고 다양성이 증대되면서 케이팝의 '장르 편식' 현상이 조금씩 나아지는 추세인데, 이에 따라 그동안 케이팝에서 만나볼 수 없었던 독특한 마이너 장르들도 시도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시이자 오늘날 케이팝에서 가장 핫한 장르, 드럼앤베이스(DnB)를 소개한다. 드럼앤베이스의 가장 큰 특징은 드럼머신이 연주하는 현란하고 촘촘한 비트일 것이다. 일반적인 대중음악보다 두 배 빽빽하게 채워진 박자가 선사하는 도파민에 익숙해지면 다시 평범한 음악을 듣기 어려워진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니 대표적인 드럼앤베이스 곡을 하나 들어 보자. 워낙 특징이 명확한 장르이기에 파악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Rudimental, "Waiting All Night" (2013)
드럼앤베이스가 어떤 느낌을 가리키는 것인지 대충 감이 왔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드럼앤베이스의 정의와 구성에 대해 구구절절 사전적인 설명을 늘어놓으려는 게 아니니 대략적인 느낌만 간단히 알아두면 된다.
서태지, "Moai" (2010)
이적, "몽상적" (2003)
노땐스, "질주" (1996)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은 드럼앤베이스의 완전한 불모지에 가까웠다. 서태지의 "Moai"나 이적의 "몽상적", 노땐스(신해철, 윤상)의 "질주" 정도가 시도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한국 음악사에서도 손꼽는 천재이자 이단아들이었음을 감안하면, 일반적인 한국 대중음악계에서는 드럼앤베이스의 존재감이 전무했다고 할 수 있겠다.
2. 케이팝 속 드럼앤베이스의 역사
트와이스, "CHEER UP" (2016)
일렉트로닉 음악을 폭넓게 받아들인 케이팝조차도 드럼앤베이스와는 유독 연이 없었다. 기껏해야 트와이스의 대표곡 "CHEER UP" 후렴구에서 잠깐 사용되었던 것이 다인데, 이것 역시 제대로 된 드럼앤베이스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드럼앤베이스가 사용된 파트의 길이도 너무 짧을뿐더러 드럼앤베이스 특유의 박자감이 크게 부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오아이, "너무너무너무" (2016)
스테이씨, "SO BAD" (2020)
그 이후로도 간헐적으로 드럼앤베이스 곡들이 나오기는 했다. 아이오아이의 대표곡 "너무너무너무"나 스테이씨의 데뷔곡 "SO BAD"가 그 예시다. 전자의 경우 드럼앤베이스와 8비트 사운드를 조합해 레트로한 질감을 만들어냈고, 후자의 경우 절제된 편곡을 통해 장르의 세련된 맛을 효과적으로 구현했다. (다만 "너무너무너무"의 경우 전통적인 드럼앤베이스의 구조를 충실히 재현한 곡은 아니다. 때문에 드럼앤베이스 곡으로 볼 수 없다는 의견도 있을 수 있다)
뉴진스, "Super Shy" (2023)
그리고 2023년에 이르러 드디어 드럼앤베이스는 케이팝의 '대세' 장르로 떠올랐다. 다들 아는 그 노래, 뉴진스의 "Super Shy"가 대표적이다. 드럼앤베이스의 속도감을 완벽히 구현하고, 저지 클럽을 부분적으로 섞어 세련된 리듬감을 만들어내는 솜씨가 일품이다. 현 시대 가장 트렌디한 재료들로 만들어낸 호화로운 한 상이다. 한국에서는 존재조차 알려져 있지 않던 드럼앤베이스 장르가 이렇게 한 해의 최고 히트곡을 배출하다니,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3. 리퀴드 드럼앤베이스
Pinkpantheress, "Angel" (2023)
이러한 케이팝의 체질개선은 사실 영국의 베드룸 팝 아티스트 핑크팬더레스(Pinkpantheress)의 영향이 크다. 기존의 드럼앤베이스는 다소 거칠고 투박했지만, 핑크팬더레스의 손에 의해 개량된 드럼앤베이스는 정반대로 부드럽고 여린 감성을 담아내는 그릇이 되었다. 이렇게 멜로우한 무드와 듣기 편한 멜로디가 특징인 드럼앤베이스의 세부 장르를 리퀴드 드럼앤베이스(Liquid DnB)라고 부른다. 현재 케이팝에서 사용되는 드럼앤베이스의 주류 기조는 바로 이 리퀴드 쪽이다.
뉴진스, "Zero" (2023)
뉴진스, "Ditto" (2022)
리퀴드 드럼앤베이스의 대표 주자는 뭐니뭐니 해도 한국에서 이 장르를 대중화시킨 뉴진스다. 앞서 언급한 "Super Shy"를 비롯해, 코카콜라 광고음악인 "Zero"와 연말을 휩쓴 히트곡 "Ditto"(살짝 다르긴 하지만) 역시 리퀴드 류로 볼 수 있는 곡들이다.
제로베이스원, "In Bloom" (2023)
제로베이스원, "Back to ZEROBASE" (2023)
보이그룹 제로베이스원 역시 데뷔곡 "In Bloom"에서 리퀴드 드럼앤베이스를 선보였다. 뮤직비디오의 청량한 색감과 소년미 넘치는 콘셉트가 리퀴드 DnB와 환상적인 궁합을 이룬다. 수록곡 "Back To ZEROBASE" 역시 리퀴드 DnB를 채택해 팀의 음악적 색채를 명확히 한다.
트리플에스, "Invincible" (2023)
온리원오브, "dOpamine" (2024)
세련된 편곡과 인상적인 주제의식으로 정라리 선정 올해의 노래 후보에 오르기도 했던 트리플에스의 "Invincible"이나, 최근 발매된 온리원오브의 "dOpamine" 역시 리퀴드 DnB의 작법을 케이팝과 융합해 흥미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4. 애트모스피어릭 드럼앤베이스
설리, "도로시" (2019)
리퀴드보다 더 앰비언트 쪽으로 가면서 몽환적인 무드가 한층 더해지면 애트모스피어릭 드럼앤베이스(Atmospheric DnB)라고 부르기도 한다. 케이팝에서 자주 쓰이는 장르는 아니지만 설리가 유작 앨범 [고블린]에서 수록곡 "도로시 (Dorothy)"를 통해 선보인 바 있다. 추상적인 가사와 글로시한 질감의 악기들, 그리고 설리의 초연한 보컬이 맞물리며 완성하는 신비로운 무드가 아름답기 그지없다.
르세라핌, "Burn the Bridge" (2023)
이외에도 르세라핌의 인트로 트랙 "Burn The Bridge" 역시 애트모스피어릭 디앤비의 한 종류로 볼 수 있다. 교차하는 다국어 나레이션과 함께 천천히 벅차오르는 드럼앤베이스 사운드가 르세라핌의 서사에 대한 몰입감을 효과적으로 고조시킨다.
5. 댄스플로어 드럼앤베이스
에이티즈, "HALAZIA" (2022)
에이티즈, "Good Lil Boy" (2020)
드림캐쳐, "Sleep-walking" (2017)
드림캐쳐, "거미의 저주" (2019)
한편 드럼앤베이스의 원류를 복원하여 더 하드하고 댄서블한 사운드를 지향하는 세부 장르로 '댄스플로어 드럼앤베이스 (Dancefloor DnB)'도 있는데, 현재 케이팝의 주류 장르는 아니지만 에이티즈나 드림캐쳐 등 몇몇 팀들이 시도한 바 있다. 특히 에이티즈의 경우 타이틀곡인 'Halazia'의 후반부를 긴박한 댄스플로어 디앤비 사운드로 채우며 팀의 폭발력을 극대화했다.
샤이니, "The Feeling" (2023)
샤이니, "Don't Call Me (Fox Stevenson Remix)" (2022)
언제나 케이팝의 트렌드를 선도해온 샤이니 역시 빠지면 섭하다. 지난해 발매된 정규 앨범 [HARD]의 선공개곡 "The Feeling"은 케이팝이 배출한 최고의 댄스플로어 디앤비 넘버 중 하나다. 이뿐 아니라 타이틀곡 "Don't Call Me"를 영국의 드럼앤베이스 아티스트 폭스 스티븐슨(Fox Stevenson)이 리믹스한 싱글 역시 장르의 기본에 충실한 웰메이드 디앤비 프로덕션이 돋보인다.
방탄소년단, "I'm Fine" (2018)
방탄소년단 역시 한 발 앞서 드럼앤베이스를 선보인 바 있다. 희망적인 가사와 댄스플로어 디앤비 비트가 어우러진 "I'm Fine"은 방탄소년단 팬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수록곡 중 하나다.
6. 그리고, 드럼앤베이스는 계속된다
트리플에스, "Speed Love" (2023)
지금까지 설명한 세 가지 세부 장르 이외에도 드럼앤베이스의 줄기는 끝없이 뻗어나가고 있다. 트리플에스의 "Speed Love"는 드럼앤베이스 리듬에 재즈 세션 악기들을 버무려 스타일리쉬하게 재조립한 재즈스텝(Jazzstep) 트랙으로, 지난해 케이팝에서 가장 창의적인 프로덕션을 보여주었던 작품들 중 하나이므로 반드시 들어보기를 권한다.
빈지노, "Life in Color" (2017)
허성현, "fuck'em up!" (2023)
이소, "Salad Days" (2023)
심지어는 힙합 씬에서도 드럼앤베이스를 시도하고 있는데, 빈지노의 "Life in Color", 허성현의 "fuck'em up!", 이소(iiso)의 "Salad Days" 등의 트랙이 대표적이다. 랩 또는 알앤비 보컬에 드럼앤베이스 사운드를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 알아볼 수 있는 좋은 작품들이다.
드럼앤베이스의 전신인 정글(Jungle) 장르를 접한 뒤로 10년이 넘게 이 장르를 사랑해온 필자로서는 메인스트림 씬에서 양질의 드럼앤베이스 뮤직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꿈만 같다. 드럼앤베이스 열풍이 단순한 유행으로 그치지 않고 꾸준히 사랑받는 음악으로 자리잡기를 기대해 본다. 길고 길었지만, 드디어 그날이 왔다. 드럼앤베이스 붐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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