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당신도 소중하니까

RIIZE 〈fame〉

by 문어

사람이 많이 모인 공연장을 떠올리면, 순간 조금 어지러워질 때가 있다. 숨이 턱 막히도록 터지는 함성, 휴대폰 플래시가 별처럼 반짝이는 객석, 손을 뻗기만 하면 닿을 것 같은 열기. 그런데 그 모든 소리와 빛이 무대를 향해 쏟아질 때, 정작 그 한가운데 서 있는 사람은 어떤 마음일까.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 밀려올까, 아니면 어느 순간부터는 ‘나’ 대신 무대 위의 캐릭터만 사랑받고 있다는 생각이 슬쩍 스쳐 지나갈까. RIIZE의 〈fame〉 가사를 듣다 보면, 이 질문이 꽤 구체적인 얼굴을 얻는다. 〈fame〉 가사 속 화자는 함성과 숫자 한가운데 서 있으면서도, 그 사랑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계속 되묻는다.


프랑스 사상가 장 자크 루소는 인간의 사랑을 두 갈래로 나누어 생각했다. 하나는 살아 있고 싶고 상처받고 싶지 않은 데서 나오는 아주 기본적인 애착, 그는 이를 ‘자기애’라고 불렀다. 숨 쉬고, 먹고, 내가 소중하다고 느끼고 싶은 마음. 다른 하나는 남들 앞에서 더 빛나고, 다른 사람들보다 우위에 서고 싶어 하는 마음이다. 루소는 이 두 번째 마음에 ‘허영적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중요한 건 이 둘을 선악으로 가르려는 게 아니라, 지향점이 다르다는 점이다. 자기애는 “나도 사랑받을 만한 존재야”라는 조용한 확신에서 출발하지만, 허영적 사랑은 “저 사람보다 내가 더 사랑받고 싶어”라는 비교의 무대 위에서 자란다. 박수와 순위, 숫자는 이 두 번째 감정에 가장 빠른 연료를 공급한다. 더 많은 팔로워, 더 큰 함성, 더 높은 차트. 그것들이 쌓일수록 사람은 점점 타인의 시선을 떠나서는 자신을 설명하기 어려워지고, 결국 다른 이들의 평가에 죄다 묶여 버리기도 한다.


〈fame〉 가사 속 화자는 딱 그 지점에서 말을 시작한다. 가사 속 “They don’t really love me”라는 독백에는, 박수의 한가운데서도 묘하게 외로운 사람이 서 있다. 눈앞의 군중은 뜨겁지만, 그 열기가 자신을 향한 것인지, 화면 속 이미지와 브랜드를 향한 것인지 점점 헷갈려지는 감각. 루소가 말한 허영적 사랑의 세계가 바로 이런 곳 아닐까 싶다. 타인의 인정이 필요 없다는 말은 애초에 쉽지 않다. 우리는 누구나 어느 정도의 시선을 필요로 한다. 문제는 그 시선이 나를 지탱해 주는 살결 같은 온도에서, 어느 순간부터는 나를 대신해서 살아 버리는 가면이 되어 버리는 순간이다. 화자는 이 어긋남을 감지한다. 그래서 가사 속 “All this fake fame, maybe I don’t need it”이라는 문장이 튀어나온다. 완전히 초연해졌다는 선언이 아니라, 적어도 지금 이 박수의 일부는 진짜가 아닐지 모른다는, 약간 늦게 도착한 직감에 더 가깝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모든 관계를 거부하거나 세상과 등을 지겠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fame〉 가사가 흥미로운 지점은, 화자가 군중과 완전히 결별하는 대신 방향을 살짝 틀기 시작한다는 데 있다. 후렴 가사에서 “Shout loud for your name, ain’t ’bout the fame”이라고 말할 때, 그는 ‘나’를 외치라고 부추기지 않는다. 오히려 “너 자신을 향해 소리 내어보라”라고 말한다. 루소식으로 말하면, 허영적 사랑의 회로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자기애의 자리로 되돌아가 보자는 제안에 가깝다.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거나 완벽해 보이지 않아도 괜찮으니, 적어도 나와 네가 서로를 한 사람의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관계를 먼저 살펴보자는 것이다. “날 보는 지금 넌 어때”라는 물음은, 상대의 감정이 공연장의 온도를 맞춰 주는 장치가 아니라 하나의 온전한 세계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가사를 따라가다 보면, 〈fame〉은 화려한 성공의 서사를 완성시키기보다는 점점 다른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Super hard, make it loud 어떤 날 원할까”라고 자문하던 화자는, 어느 순간 “We gon’ run and chase, make it everyday 함께라면 우린 이뤄내, You know that I need you”라는 가사 구절에 닿는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 천천히 저울질한 끝에, 그는 혼자 정상에 오르는 장면보다는 ‘함께 달릴 이유’를 지키는 쪽을 택한다. 여기서 ‘함께’는 단지 팀을 이룬다는 말 이상이다. 누군가와 나란히 서서 각자의 이름으로 불리면서도, 같은 방향을 비슷한 속도로 바라보겠다는 마음에 가깝다. 루소가 말한 건강한 자기애는 다른 사람을 밀어내는 힘이 아니라, “나도 소중하고, 너도 소중하다”는 감각이 서로 교차할 때 생겨나는 에너지다. 이 노래 속 화자도 그 지점을 조금씩 향해 움직이는 중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주는 소수의 얼굴을 떠올리며, 군중의 환호 한가운데에서 그들을 향한 통로를 찾고 있다.


어쩌면 우리 대부분도 형태만 다를 뿐, 비슷한 무대 위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회사에서, 학교에서, SNS 피드 위에서 우리는 각자 다른 방식의 “fame”을 쫓고 또 그것에 휘둘린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을 없앨 수는 없다. 다만 그 인정이 숫자로만 환산되는 순간, 어느 때부턴가 나 자신도 숫자의 일부가 되어 버린다는 사실을 조금 더 빨리 눈치채는 수밖에 없다. 〈fame〉 가사는 바로 그 눈치를 채는 순간을 노래한다. “Ain’t ’bout the fame”이라는 고백은 “명성이 전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나를 지워 가면서까지 붙들고 싶지는 않다는, 아주 작은 선 긋기다. 그 선을 긋는 일이야말로, 군중의 한가운데서도 자기 목소리를 잃지 않으려는 첫 번째 시도일지 모른다.


RIIZE 〈fame〉을 들을 때마다, 결국 사랑의 질문도 비슷한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지가 아니라, 누구 앞에서 어떤 얼굴로 서 있을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한 질문이 되어 버린 시대. 〈fame〉은 그 사이에서 조용히 말을 건넨다. 박수가 끝나고 무대 조명이 꺼진 뒤에도, 내 이름 대신 상대의 이름을 크게 불러 줄 수 있는 누군가를 선택할 용기가 있는지. 그리고 내가 그런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면서, 나 자신을 조금 덜 잃어버리는 방향으로 걸어갈 수 있는지. 명성이 무엇이냐고 묻는 노래 같지만, 끝까지 듣고 나면 오히려 이렇게 되묻게 된다. “사랑의 정의를 다시 써야 한다면, 숫자 대신 어떤 이름부터 적어 넣고 싶은지.” 〈fame〉 가사는 그 질문을, 묘하게 귀에 남는 리듬과 함께 우리에게 남겨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