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미스나인(fromis_9) 〈하얀 그리움〉
눈이 오면, 나는 이상하게도 “지금”에만 머무르지 못한다.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어느 겨울 골목과 그때 내 옆에 서 있던 얼굴이 동시에 떠오른다. 몸은 분명 오늘에 있으면서도, 지나가버린 사람과 계절을 떠올리다 보면 마음은 어느새 오래전 거리 쪽으로 옮겨 앉는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이런 시간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가 당연하게 믿고 있는 ‘순수한 지금’이라는 감각부터 의심했다. 그에게 현재란 이미 지나가 버린 것들의 자국,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것들에 대한 예감이 뒤섞이는 자리다. 그가 ‘흔적(la trace)’이라고 부른 것도 바로 이 구조다. 물론 더 정확히 말하면, 흔적은 의미와 기호가 생겨날 때 작동하는 구조적 조건을 가리키는 개념에 가깝지만, 나는 방향을 조금 틀어 이것을 겨울날 감정과 기억이 움직이는 방식을 이해하는 데 빌려 쓰려한다. 눈 내리는 거리를 걷다 보면, 이미 끝난 일들이 어떻게 여전히 지금의 나를 끌고 다니는지, 부인하기 힘들 때가 있기 때문이다.
프로미스나인의 〈하얀 그리움〉은 그런 시간을 노랫말로 말하는 것 같다. “하얀 눈이 내려와 / 내 맘을 아프게 해”라는 첫 줄은 익숙한 겨울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곧 이어지는 “기억해요 우리 처음 만났었던 / 그날에도 / 오늘처럼 눈이 내렸죠”라는 고백이 분위기를 바꿔 버린다. 여기서 흰 눈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처음 만났던 날의 공기와 지금 눈 쌓인 거리를 겹쳐 놓는 기호가 된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눈은 “온 세상이 하얗게 / 모두가 행복한데 / 너무 행복한데” 같은 이미지와 함께 떠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노래에서 눈은 다른 일을 한다. “사라져 버린 눈처럼 / 그댄 눈물로 흩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그런 겨울이 있다. 모두가 사진 찍으며 웃던 밤, 같은 눈을 보고 있으면서도 나만 이상할 만큼 쓸쓸했던 순간. 한 화면을 나눠 보고 있었지만, 각자의 마음속에 남는 색과 온도가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날이었다.
데리다의 관점에서 보면, 이때 흰 풍경은 부재를 다시 지금으로 데려오는 매개가 된다. 떠난 사람은 이 거리에 더 이상 없지만, “그대가 없는 난 / 하얀 그리움에 / 이 길을 걷고 있죠”라는 노랫말 속에서 다른 형식으로 존재한다. 흰 길, 서서히 젖어드는 코트 자락, 발밑에서 부서지는 소리까지, 그 모든 것이 한 사람을 가리키는 우회적인 이름이 된다. 현재는 그래서 텅 비어 있는 한 점이 아니라, 여러 시간이 겹쳐진 표면에 더 가깝다. 지금 내리는 눈은 동시에 예전의 눈을 불러내고, 그때의 나를 이 자리에 겹쳐 놓는다. 나는 분명 오늘의 거리를 걷고 있는데, 마음은 오래된 골목을 다시 밟고 있다. “그대가 없는 난…”이라는 문장은 이별의 상처를 말하는 동시에, 그 상실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지금의 나를 구성하고 있는지 드러낸다.
가사 중 내가 유독 주의를 기울이게 되는 곳은 “혹시 우연이라도 / 그댈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대목이다. 머리로는 안다. 그 사람을 이 거리에서 우연히 다시 만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걸. 그래도 괜히 한 번 더 돌아서 걸어 보고, 다 알면서도 같은 길을 다시 오가게 되는 날들이 있다. 이것을 단순히 미련이라고 부르기엔 어딘가 부족하다. 아직 끝나지 않은 장면과 함께 움직이는 몸의 습관, 그쪽에 더 가깝다. 과거는 어느 날 통째로 닫아 버릴 수 있는 서랍이 아니라, 계속 지금의 표정을 바꾸는 하나의 층 같다. 눈이 내릴 때마다 그 층이 살짝 비쳐 오른다. 그리고 나는 그 위를 서둘러 덮어버릴지, 아니면 조용히 인정한 채 밟고 지날지, 매번 다른 선택을 한다.
그런데 이 노래가 흥미로운 건, 그리움을 “과거에 매여 있는 상태”로만 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화자는 분명히 “그대가 없는 난”이라고 말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집 안에 숨지 않고, 눈 내리는 바깥으로 걸어 나온다. 떠나버린 사람의 자국과 함께 길을 걸어 나가는 쪽을 택한다. 데리다의 흔적 개념을 느슨하게 가져와 말하자면, 이 태도는 부재를 지워 없애려 하기보다, 현재 안에 배치해 두고 살아가는 방식에 가깝다. 없애기보다는 자리를 바꾸어 두는 일. 나도 어떤 계절에 대해서는 그런 선택을 했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다고 말하던 기억인데, 막상 그 계절의 노래가 들리면 이어폰을 빼지 못하고 끝까지 듣게 되는 밤들. 그때의 나는 아마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장면은 없애려 애쓰는 것보다, “여기쯤 있었지” 하고 적당한 위치에 내려놓는 편이 덜 아프다는 것을.
물론 앞서 언급했듯이 데리다가 말한 ‘흔적’은 애초에 개인의 연애사를 설명하려고 만든 개념은 아니다. 그는 의미라는 것이 언제나 다른 기호들과의 차이, 이전의 사용, 앞으로의 사용 가능성을 끌어안고 생겨난다고 보았다. 같은 단어를 쓰더라도, 그 말을 둘러싼 과거의 문장들, 앞으로 이어질 말들이 함께 겹쳐 들어온다는 뜻에서, 지금의 내 해석은 약간 비켜 나 있음을 안다. 다만 사랑이 끝난 뒤에도 계속해서 나를 움직이는 몇 장면이 있을 때, 그 감각을 “흔적”이라는 말로 불러 보면 내 안에서 구조가 조금 더 또렷해진다. 오늘의 눈이 단순한 오늘의 날씨가 아니듯, 어떤 그리움도 과거형 감정으로만 완전히 물러나 있지 않다. 〈하얀 그리움〉은 이 겹침을, 어려운 철학 용어 없이도 충분히 잘 보여주는 노래다.
마지막 부분을 떠올려 보면, 이 곡은 떠난 이를 향해 “다시 돌아와 줘”라고 매달리지 않는다. 대신 “그대가 없는 난”이라는 문장을 조용히 입 안에서 굴려 보면서, 그 말이 만들어내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본다. 나도 비슷한 인사를 여러 번 준비해 온 사람이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어떤 여름과 겨울에게, 언젠가는 “안녕”이라고 말해야 하는 시간들. 그 말은 과거를 부정하는 주문이 아니라, 그 계절을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겠다는 승낙에 가깝다. 흔적을 완전히 지우는 대신, 그 흔적이 묻어 있는 오늘을 내 몫으로 삼겠다는 쪽에 더 가깝다.
그래서 〈하얀 그리움〉은 내게, 눈이 올 때마다 떠오르는 얼굴들, 그 얼굴들이 사라진 자리에서 여전히 나를 움직이는 방식, 그리고 그 움직임을 더 이상 숨기지 않으려는 마음에 대한 노래로 들린다. 이 곡은 내 안에 남아 있는 여러 겨울들을 불러낸다. 모두가 행복했던 눈이 아니었던 날들, 다른 사람에게는 그저 “예쁜 풍경”이었을지 모를 순간들. 그런 화면들 속에서 나는 여전히 비슷한 길을 걷지만, 예전과 똑같은 사람은 아니다. 아마 앞으로도 눈이 내릴 때마다 다른 기억들이 조금씩 포개질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또 다른 나로, 또 다른 하얀 풍경의 거리를 걸어 나갈 것이다. 그러니까 내게 이 눈은, 끝난 사랑을 반복해서 소환하는 신호가 아니라, 여러 겹의 시간을 통과해 여기까지 온 나를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 아팠던 계절들까지 내 삶의 일부로 두고 계속 걸어가는 일, 어쩌면 그것이 내가 말하는 ‘하얀 그리움’의 진짜 얼굴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