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드라이브원(ALPHA DRIVE ONE) 〈FORMULA〉
나는 공식을 잘 따르는 편이 아니다. 학교 다닐 때도 선생님이 풀어 준 모범 풀이를 그대로 따라 적다가, 이상하게 손이 먼저 멈추곤 했다. 분명 이 단계에서는 이렇게 정리한다고 설명을 들었지만, 굳이 다른 길을 찾다가 괜히 식을 꼬아 버릴 때가 많았다. 공부뿐만이 아니다. 살아가는 방식도 마찬가지였다. 시험 준비는 이런 순서로 해야 한다, 이 나이쯤이면 이런 선택을 해야 한다, 사회 초년생이라면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 같은 말을 들었을 때, 머리로 이해가 되지 않으면, 몸은 그 리듬에 맞춰 잘 움직이지 못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계획성 없는 성격이거나, 협업이 힘든 고집처럼 보였을 것이다. 나도 스스로를, 남의 공식을 끝까지 따라 하지 못하는 사람, 그래서 반항아로 불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이런 의문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내가 유난히 제멋대로라서 정해진 방식을 거부하는 것인가?, 아니면 애초에 그 방식들이 나와 잘 맞지 않는 것인가?’. 그런 내게 답을 준 철학자는 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였다. 그는 인간과 사회를, 완성된 규칙을 나중에 발견하는 존재가 아니라, 규칙과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 내는 존재로 이해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자연법칙처럼 손댈 수 없는 구조가 아니라, 사람들이 함께 쌓아 온 상상과 관습의 결과라는 설명이었다. 어떤 직업을 좋은 선택이라고 부를지, 어떤 삶을 괜찮은 삶이라고 인정할지에 대한 기준이 모두 거기에 포함된다고 보았다. 그는 이 보이지 않는 공통의 감각을 사회적 상상적 의미라고 불렀다. 쉽게 말하면, 한 사회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가치와 삶의 모델들을 묶어 놓은 집합 같은 것이다. 문제는 이 의미들이 원래는 인간이 만들어 낸 것임에도 시간이 지나면 마치 처음부터 주어진 진리처럼 굳어져 버린다는 점이다.
카스토리아디스가 말한 자율이란, 남이 정해 준 틀을 무조건 거부하는 태도가 아니다. 먼저 되묻는 힘에 가깝다. 자율은, 지금 내가 따르고 있는 규칙은 어디서 온 것인지, 정말 내가 납득해서 선택한 기준인지, 아니면 그냥 다들 그렇다고 해서 따라온 것인지 다시 살펴보는 능력이다. 분명히 할 것은 자율이, 단순히 ‘나는 내 마음대로 살래’라는 호기로움이 아니란 것이다. 오히려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끝까지 따져 묻는 성향에 가깝다. 이 관점을 알고 나니, 공식을 잘 따르지 못하는 내 성향이 조금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단순한 귀찮음이나 미루는 버릇도 있겠지만, 최소한 어떤 경우에는 정말 이 길뿐인지 의심하는 마음이 함께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느끼던 불편함은 이미 굳어진 사회적 상상적 의미에 대한 작은 저항이었을지도 모른다.
알파드라이브원의 〈FORMULA〉를 들었을 때, 나는 그 오래된 감각이 노래 안에서 증폭되는 느낌을 받았다. 이 곡은 처음부터 누군가가 짜 둔 게임 규칙을 칭찬하거나, 그 설계에 잘 적응한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지 않는다. 대신 틀에 갇히지 말라고 말하고, 벽을 허물고, 룰을 새로 세우라고 주문한다. 나의 공식은 행동이라고 선언하고, 패턴은 내가 만든다고 말하는 화자의 목소리는 카스토리아디스가 이야기한 자율과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이 노래 속 인물은 이미 짜인 공식을 암기하여 올라가려는 사람이 아니다. 어느 트랙에 올라와 있는지 의식하면서, 그 트랙 자체를 변형해 보려는 사람이다. 불확실한 세계를 읽어 가며, 주어진 방식을 그대로 복사하지 않고, 자신만의 에너지와 스텝으로 다른 조합을 시험해 보는 주체다.
이 노래를 들으며, 나는 내가 종종 마주했던 문제들이 떠올랐다. 여러 사람과 함께 무언가를 진행할 때도 나는 정석적인 순서를 왜 지켜야 하는지, 그것은 누가 정했는지를 궁금해했다. 다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때, 어떤 전제는 애초에 합의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종종 스스로를 탓했다. 왜 이렇게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지, 왜 굳이 물을 흐리는 말을 꺼냈는지 자책했다. 그러나 카스토리아디스의 관점에서 보면 그런 순간은 이미 사회적 상상적 의미에 균열이 생기는 지점이기도 하다. 모두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방식을 따라가지 못하는 몸이, 사실은 다른 상상을 시험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FORMULA〉의 질주는 이런 어긋남을 부끄러운 실패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길을 만들고, 불확실한 세계를 읽어 내며, 계속 위로 올라가 보라고 부추긴다. 여기서 위라는 방향은 남들이 정해 준 서열의 꼭대기일 필요가 없다. 내가 납득할 수 있는 기준의 방향으로 조금씩 높이를 바꾸어 보는 움직임에 가깝다. 카스토리아디스는 사회가 스스로 만든 규칙을 잊지 않고 다시 질문할 때 비로소 자율적 사회가 시작된다고 보았다. 〈FORMULA〉 속 주체들은 거대한 혁명을 설교하지 않는다. 다만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방식의 공식을 다시 쓰겠다고 말한다. 내 공식은 행동이라는 가사는 머릿속에서만 떠다니는 상상이 아니라, 실제 선택과 움직임으로 드러나는 자율을 가리키는 문장처럼 들린다.
내 일상으로 가져와 보면, 공식을 잘 따르지 못하는 성향은 여전히 양날의 검이다. 때로는 어떤 것을 진행할 때 질문들로 인해 시간이 너무 지체되는 등, 스스로를 곤란한 상황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들을 모두 실패로만 인식하지 않으려 한다. 카스토리아디스를 떠올리면, 그 어긋남 안에도 작은 가능성이 숨어 있다고 느껴진다. 사회적 상상적 의미는 언제나 완성형이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너무 빡빡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허술하게 느껴지는 틀이다. 그렇다면 정해진 방식을 끝까지 따르지 못하는 몸은 그 경계를 조정해 보라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FORMULA〉는 그 신호를 조금 더 크게 재생하는 역할을 한다. 이 곡을 듣는 동안 나는 ‘왜 나는 이렇게 남들이 말하는 안정된 삶에 잘 맞지 않을까’라는 질문 대신, ‘지금 내가 서 있는 규칙은 어떤 상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을까’라는 물음을 떠올리게 된다. 남들이 말하는 성공의 법칙이나 괜찮은 사람의 모델이 무엇을 전제로 하고 있는지 한 번 더 되짚어 보고 싶어진다. 끝없는 성장과 끊임없는 효율을 전제로 한 설계는, 누군가의 시간을 계속 소진시키는 방식으로만 유지될 수 있다. 그런 구성을 잘 따르지 못하는 내가 단순히 게으른 사람이 아니라, 다른 리듬을 상상해 보라는 역할을 잠깐 맡고 있을 수도 있다.
자율은 결국 두 가지 과정을 함께 요구하는 것 같다. 하나는 납득되지 않는 공식을 더 이상 내 삶에 그대로 들여놓지 않겠다는 결심이고, 다른 하나는 그 대신 어떤 원칙으로 살 것인지 스스로 정의해 보려는 노력이다. 나는 남의 공식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에는 익숙하지만, 그렇다고 내 공식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깊이 고민해보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마음속 공책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미 누군가가 적어 둔 식을 따라 적는 대신, 연필을 들고 나만의 식을 한 줄씩 적어 넣는 장면을 상상했다. 이때 내가 적는 것은, 완벽한 정리와 같이 아름다운 식이 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저 내가 책임질 수 있는 기준, 내가 설득될 수 있는 리듬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아마 나는 앞으로도, 남이 만든 공식을 끝까지 잘 따르는 사람이 되지는 못할 것 같다. 대신 어긋나더라도 의식적인 방식인 사람이 되고 싶다. 왜 이 규칙을 힘들어하는지, 어떤 다른 가능성을 보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FORMULA〉는 그런 다짐을 상기시키는 노래다. 정답지에 맞춰 사는 인생이 아니라, 불완전하더라도 나만의 공식을 써 내려가는 인생을 선택해도 괜찮다고 말해 주는 곡 같이 여겨진다. 시간이 지나 훗날을 돌아보았을 때, 아무리 서툴렀더라도 그 공책 속 식들만큼은 분명히 나의 것임을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