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지만 둘, 둘이 다시 하나. 그리고 또다시 둘

지코(ZICO), 크러시(Crush), 〈Yin and Yang〉

by 문어

어제, 스마트폰에 꽂힌 이어폰이 하나의 선에서 양쪽 귀를 향해 나뉘듯, 마음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한쪽은 “이쯤이면 됐다”라고 중얼거리고, 다른 한쪽은 “아직 멀었다”라고 재촉한 것이다. 위로와 채찍이 같은 리듬으로 출렁였고, 그 사이에서 나는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 애매해졌다. 지코와 크러시의 〈Yin and Yang〉은 내가 어제 느낀 그 애매함을 성급하게 정리하지 않는 것 같다. 곡 초반에 등장하는 “perfect chaos, angels and demons / Both sides” 같은 구절은 조화로운 합의라기보다, 질서와 혼란이 이미 한 덩어리로 뒤엉킨 상태를 드러내는 쪽에 가깝다. 이어 “Burn Lights / Dark Side”, “We got the Yin and Yang” 같은 대비는 한쪽을 해답으로 세우지 않은 채, 밝음과 어둠이 서로를 밀어내면서도 동시에 서로를 필요로 하는 긴장을 반복해 들려준다. 이 노래에서 ‘양쪽’은 선악을 저울질하는 선택지가 아니라, 삶이 흔들리면서도 지속적으로 굴러가는 방식과 같다. 그리고 이때 헤겔 철학의 개념을 빌려보면, 이 곡이 조율하는 긴장이, 단순하게 콘셉트가 아닌, ‘세계는 왜 충돌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는가’라는 질문으로 연결된다.


독일 철학자 헤겔에게 세계는 균형을 맞추어 멈춘 것이 아닌, 계속 형태를 바꾸어 나가는 전개 과정이다. 즉, 그에게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미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서로 맞서는 힘들이 부딪치며 새로운 배열을 만들어내는 움직임에 가깝다. 이 곡을 읽어나갈 때 헤겔적 시선에서 잡힌 두 가지 개념은 변증법과 인정 투쟁이다. 먼저 변증법은 ‘둘이 함께 존재한다’는 말이 아니다. 어떤 입장이 스스로를 완전한 답이라고 내세우는 순간, 그 입장 안에서 감춰졌던 빈틈이 드러나고, 그 빈틈이 다음 국면을 열어젖힌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모순은 논리 퍼즐 같은 자기모순이 아니라, 삶과 세계를 안에서부터 밀어붙이는 긴장, 혹은 자기부정의 압력에 가깝다. 한편 인정 투쟁은 사람이 단지 힘의 크기로 서열화되는 존재가 아니고, 서로를 사람으로 대우하며 주체로 세우는 관계 속에서 자아와 질서가 함께 만들어진다는 주장이다. 여기서의 인정은 호감이나 칭찬만을 뜻하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사람 대 사람’의 자리가 성립하는 방식, 그리고 그 자리를 둘러싼 충돌과 경쟁까지 포함한다. 이렇게 두 갈래의 개념은, 이 노래가 왜 ‘둘 중 하나’를 고르지 않고도 계속 앞으로 밀려가는지 설명할 기반을 마련한다.


우선 변증법 개념을 앞세워 가사를 읽으면 초반부 “Both sides”가 단순한 중립 선언이 아니라 세계의 작동 방식을 건드리는 문장처럼 들리게 된다. 또 “perfect chaos” 역시 질서가 없다는 말이라기보다, 질서가 언제나 불안을 품고 있다는 말에 더 가깝다. 빛과 어둠은 둘 중 하나만 존재할 수 없다. 개념적으로 빛은 어둠을 대비하여, 어둠은 빛을 대비하여 그 경계를 가질 수 있다. 그래서 “Burn Lights / Dark Side” 같은 배치가 반복될수록, 우리는 ‘밝은 쪽이 정답’이라는 도덕적 결론으로 도망치기 어렵다. 오히려 한쪽을 선명하게 세우려 할수록 다른 한쪽이 더 강하게 되돌아와 판을 흔드는 느낌이 커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둘 다 맞다”는 느슨한 타협이 아니다. 되려 한쪽이 자신을 최종 답으로 단정할수록 균열이 커지고, 그 균열이 다음 형태를 요구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곡이 전개해 나가는 가사는, 단순한 “대립의 해소”가 아니라 “대립의 증폭”에 가깝고, 다시금 그 증폭이 곡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제 인정 투쟁의 관점에서 다시 가사를 읽으면 곡에 등장하는 권력의 이미지들이, 단지 과장된 세계관이 아니라 ‘주체가 어떻게 세워지고 흔들리는가’의 문제로 그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령 “Bow to no one Titan / 흑백의 Empire” 같은 표현은 어떤 질서가 스스로를 절대화하려는 몸짓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헤겔적 시선에서, 본디 절대화는 언제나 불안정하다. ‘누구에게도 고개 숙이지 않는다’는 선언조차 결국 타자의 시선과 반응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나는 혼자서만 완성되는 존재가 아니라, 타자가 나를 어떤 존재로 받아들이고 어떤 자리에 놓는지에 따라 나의 형태가 굳어진다. 그래서 권력은 상대를 굴복시키려 하면서도, 동시에 그 상대가 ‘인정해 줄 주체’로 남아 있기를 요구하는 모순에 걸린다. 만약 내가 상대를 완전히 대상화해 버린다면, 그는 더 이상 나를 사람으로 세워 줄 상대가 아니게 되고, 그 순간 내 우월성도 공허해질 수 있다. 제국이 흑백처럼 단순한 구도를 꿈꾸더라도, 인정이 성립하는 장은 그렇게 단순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관계의 불안정성에 착안한다면, 이 노래가 힘을 과시하는 동시에 긴장을 쉽게 내려놓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나아가 여기에 “너는 시스템 안의 픽셀”이라는 구절이 놓이면, 인정의 문제가 개인 사이의 시선에만 머무르지 않고 분류와 기록의 방식과도 얽혀 있음을 떠올리게 한다. 픽셀은 이미지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이며, 동시에 거대한 화면 속에서 개인이 ‘교체 가능한 점’으로 환원되는 감각을 불러오는 장치이다. 헤겔이 직접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인정’은 종종 제도적 이름표, 데이터의 분류, 기록의 형식과 결합해 작동한다는 점에서, 픽셀이란 단어는 확장된 읽기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Hit delete... 404 Not Found” 또한 마찬가지다. 삭제는 끝맺음처럼 보이지만, 404는 오히려 ‘찾을 수 없음’이 남아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사라짐이 완전한 침묵으로 닫히기보다, 결핍 자체가 흔적으로 남아 다시 호출되는 방식인 것이다. 변증법적으로 말하자면 부정은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이 다음 전개를 위한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또 이를 인정 투쟁의 언어로 바꾸면, 어떤 존재를 지우려는 시도조차 기록과 표기의 형식 속에서 다시 관계를 만드는 실마리가 된다. 결과적으로 이 곡의 디지털 표식들은 투쟁이 거리의 폭력만이 아니라, 가독성과 기록을 둘러싼 싸움으로도 번져 있음을 암시하는 장치로 읽힌다.


결국 〈Yin and Yang〉이 보여주는 것은 ‘양립’이라는 정적 평형이 아니라, 긴장이 관계를 재편하며 계속 다음 형식을 요구하는 과정이다. “perfect chaos”는 혼란을 찬양하는 구호가 아니라, 질서가 자신을 유지하려 할수록 균열이 새로 생기고 그 균열이 다시 움직임을 낳는 현실의 결을 압축한다. 또 “Burn Lights / Dark Side”와 “Both sides”는 선택을 포기하자는 말이 아니라, 선택 이전에 세계가 이미 길항 속에서 굴러간다는 사실을 반복해 환기한다. 만약 헤겔이 이 노래의 가사를 읽는다면, 그는 아마 ‘둘’이 반반의 절충이 아니라 부정과 충돌이 다음 전개를 여는 형식이라고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나는 다시 어젯밤으로 돌아간다. 어제 내게 말을 하던 두 목소리는 스스로가 나약하다는 방증보다는, 내가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속도로 살 것인지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신호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요즘 내 안의 두 방향을 서둘러 지우려 했었는지, 아니면 그 불편한 긴장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끝까지 들어보려 했었는지. 내가 원하는 인정은 타자를 주체로 세우는 방식이었는지, 아니면 타자를 점 혹은 단위로 환원하며 나만 안전해지려는 방식이었는지. 오류와 결핍을 실패로만 취급해 깔끔한 이미지로 삶을 마무리하려 했었는지, 아니면 ‘부족함의 표식’까지 포함한 리듬으로 다음 단계를 구성하려 했었는지. 지금 나는 당장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의 속도, 방향을 확인하고 마주치는 관계들의 결을 돌아볼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