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dle(아이들) 〈Mono, Feat. skaiwater〉
퇴근하고 돌아온 밤, 현관문을 닫는 순간부터 나는 이미 여러 명의 나와 이야기하게 된다. 신발장 앞 거울의 나는 “오늘 하루는 괜찮았냐”라고 묻고, 답하지 않고 들어간 거실 창에 비친 흐릿한 나는 “괜찮아 보이게는 행동했냐”라고, 보다 더 따져 묻는다. 아직도 거실 한편엔 뜯지 않은 택배가 쌓여있고, 세탁기 근처에는 미뤄둔 빨래가 서로를 짓누르고 있다. 동시에 내일 해야 할 일들이 뇌 속에 자리를 잡고, 몸집이 커진 생각은 그사이를 바쁘게 오가며, 곧 오늘의 내 스코어가 매긴다. 오늘의 말은 적절했는지, 표정은 무난했는지, 관계는 안전했는지. 그렇게 ‘나’는 내 안에 남아 있기보다, 남이 만든 기준의 방을 전전한다. i-dle(아이들)의 〈Mono〉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런 순간이다. 이 노래가 말하는 미니멀리즘은 정리정돈의 유행이라기보다, 산발적인 외부의 시선과 평가를 거두어 한 자리에 모으는 것에 가깝다. 이들이 쓰는 ‘모노’는 단조로움의 선언이 아니라, 외부의 효과음이 덧씌운 과장과 낙인을 낮추고, 끝내 내가 나로 남을 수 있게 해주는 기준점을 되찾으려는 태도의 은유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 태도는 칸트가 말한 자율(감정의 파도나 타인의 판정이 아니라, 스스로 세운 법에 따라 움직일 수 있다는 인간의 존엄)과 밀접히 닿아있다.
칸트가 살던 시대는 종교적 권위와 전통적 신분 질서가 흔들리고, 한편으로는 과학과 계몽이 인간 이성의 힘을 과신하던 시기였다. 그는 인간의 가치를 감정의 호오나 타인의 평가에서 찾는 길이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지, 또 ‘자유’가 단순한 기분이나 욕망의 변덕으로 오해될 때 얼마나 빨리 자기 파괴로 기울어지는지 경계했다. 그래서 칸트가 내세운 핵심은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가 아니라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스스로에게 묻는 주체성이었다. 이러한 궤에서 주목할 개념은 두 가지로, 첫째는 ‘자율(자기 입법)과 타율(외부 기준에 끌려가는 상태)의 구분’이다. 이때의 자율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욕망과 사회의 유행을 한 발 물리고도 끝내 따를 수 있는 원칙을 스스로 세우는 능력이다. 둘째는 칸트 윤리의 중심인 ‘인간성 정식(Formula of Humanity, 사람을 목적 그 자체로 대하라는 요구)’이다. 이는 타인을 내 취향을 충족시키는 소품이나 내 목표를 달성하는 도구로 대하지 말라라는 윤리적 입장에서의 금기이며, 동시에 나 자신도 ‘성과’나 ‘이미지’의 도구로 소모하지 말라는 자기 대우의 규범으로도 확장될 수 있는 개념이다. 〈Mono〉가 말하는 ‘효과를 낮추기’와 ‘소음에 휘둘리지 않기’는, 이 두 갈래 즉, 자율의 회복과 인간을 목적 그 자체로 대하는 존중을 일상 언어로 번역해 보여주는 장면처럼 읽을 수 있다.
노래는 먼저 ‘소음’이라는 외부의 압력을 정면으로 다룬다. “Don’t let the noise get in your way”라는 문장은 단순히 시끄러운 것을 무시하라는 조언처럼 들릴 수 있지만, 조금만 더 들어가면 칸트가 말한 타율의 구조와 적확하게 들어맞는다. 본디 타율이란 누군가가 억지로 나를 끌고 가는 폭력만을 뜻하지 않는다. 더 흔히 접할 수 있는 타율은, 내가 스스로 선택한다고 믿는 것들이 사실은 평가의 공포와 인정 욕망에 의해 이미 조정되어 있는 상태다. 그래서 ‘소음’이란 외부의 데시벨이 아니라, 내 판단 안으로 들어와 “그게 안전해”, “그게 더 나아 보여”, “그게 요즘이야”라고 속삭이는 타인의 목소리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때 자율은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판단의 출처를 확인하는 기술로 나타난다. 내가 지금 따르는 기준이 내 이성의 숙고를 통해 나온 것인지, 아니면 피드백의 파도에서 급히 건져 올린 임시방편인지 따져 보는 것과 같이 말이다. 이어서 “Turn the effects down”은 더욱 칸트적이다. 보통 ‘효과’는 장식이고 과장이며 포장이다. 오늘날 효과는 종종 ‘나’라는 인격을 설명하는 대신, ‘나’라는 상품을 설득하는 도구로 동작한다. 이것을 칸트식으로 말하면, 그 순간 나는 나 자신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취급하는 꼴이다. 그러니 효과를 낮춘다는 것은 감정의 색을 없애는 금욕이 아니라, 외부 평가에 맞춰 자기를 편집하는 습관을 잠시 멈추고, 내가 정말로 지키고 싶은 기준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절차에 가깝다. 이러한 절차가 있어야 “스스로에게 법을 세운다”는 말이 현실에서 작동하는 윤리적 훈련이 될 수 있다.
하지만 〈Mono〉가 멈추지 않는 지점이 있다. 이 노래가 말하는 미니멀리즘은 개인의 멘탈 관리에만 머물지 않고, 관계의 윤리로 확장된다. “Whether … straight or gay”라는 구절이 환기하는 것은 취향의 다양성에 대한 관용 정도가 아니라, 칸트의 보편성 요구 다시 말해, 내가 옳다고 여기는 기준이 특정 집단의 특권으로 작동하지 않아야 한다는 요구에 가깝다. 칸트가 말한 도덕 법칙의 핵심은 ‘내가 지금 하려는 행위를 모두가 해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두가 같아져야 한다’가 아니라, ‘누구를 예외로 만들며 내 이익을 챙기고 있지는 않은가’라는 점검이다. 차이를 꼬리표로 만들어 차별을 정당화하는 언어는, 누군가를 인격으로 대하는 대신 분류표의 항목으로 취급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히 칸트가 금지한 ‘사람을 수단으로만 대하는’ 태도와 들어맞는다. 이어 “Cause love is louder in Mono” 가사 또한 감정의 과잉을 칭찬하는 문장이라기보다, 사랑을 윤리적 형태로 재정의하는 문장처럼 읽힌다. 사랑이 ‘더 크게’ 들린다는 것은, 서로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거나 더 극적으로 증명한다는 뜻이 아니라, 상대를 내 기대에 맞춰 조정하려는 ‘효과’를 낮출 때 오히려 상호 간 존중의 대화가 가능하다는 뜻에 가깝다. 칸트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사랑은 상대를 내 행복의 밑천으로 쓰지 않으려는 절제, 즉 상대의 자율을 훼손하지 않으려는 의지 속에서 더 명료해진다.
그렇기에 ‘모노’는 단조로움의 찬양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관계에서 흔히 벌어지는 폭력적 합일, 그러니까 상대를 내 세계로 완전히 끌어들여 같은 색으로 덮어버리는 합의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읽히기에 충분하다. 스테레오처럼 두 채널이 선명하게 갈라질 때, 우리는 종종 각자의 채널을 키우는데 집중한다. 더 크게 말하고, 더 그럴듯하게 꾸미고, 더 유리한 서사를 만들며, 그 과정에서 상대를 “내가 듣기 좋은 소리”로 맞추려 든다. 〈Mono〉가 제안하는 ‘효과를 낮춘 자리’는 그 반대다. 소리를 하나로 합치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장식과 과장을 걷어내어 각자의 존재가 왜곡 없이 들리게 만드는 자리다. 이때 자율은 추상적 미덕이 아니라, 매일의 말투와 선택에서 연마되는 실전 기술로 변한다. 즉 내가 타인의 시선을 이길 만큼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시선이 내 기준을 대신 쓰지 못하게 하는 습관을 만드는 기술인 것이다. 그리고 그 습관이 작동할수록 사랑은 누군가를 바꾸는 기술이 아니라, 서로의 인격을 해치지 않으려는 자기 규율로 바뀌게 된다. 결국 칸트의 자기 입법과 〈Mono〉가 만나는 지점은, ‘고요’가 감정의 공백이 아니라 존중이 들릴 수 있는 조건이라는 데 있다. 남의 소리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내 안으로 들어온 남의 기준을 낮출 때, 비로소 존엄의 목소리가 뚜렷해진다.
정리하자면, 〈Mono〉의 ‘소음’과 ‘효과’는 단순한 스트레스 요인이 아니라 타율의 언어이며, 이를 낮추는 행위는 칸트가 말한 자율, 반복하자면 스스로에게 법을 세우는 능력을 일상에서 구현하는 훈련이라 볼 수 있다. 또한 “Cause love is louder in Mono” 가사는, 사랑을 감정의 과잉이 아니라 상대를 목적 그 자체로 대하려는 존중의 윤리로 재배치하는 시도다. 만약 칸트가 이 노래를 들었다면, 그는 아마 ‘미니멀리즘’을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 형식의 문제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즉, 외부의 평가가 내 의지를 대신 쓰지 못하도록, 그리고 내 욕망이 타인을 도구화하지 못하도록, 소리의 장식을 덜어내는 작업으로 바라봤을 것 같다. 이 지점에 이르렀을 때 나는 다시 어제의 밤으로 다시 돌아간다. 그리고 나를 둘러싼 다수의 내가 말하는 것들과, 그것들에 의해 발생하고 커져갔던 생각의 속도에 휘말려 버린 나를 발견한다. 어쩌면 어제의 나는 〈Mono〉를 통해 더 높은 볼륨을 내기 위해 노력하는 방향이 아닌 다른 방향을 찾았어야, 답을 급히 내리기보다는 나만의 기준을 조용히 복구하는데 집중했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지금 내가 ‘내 선택’이라고 부르는 것들 중 얼마나 많은 것이 사실은 소음에 대한 반응일까? 어쩌면 나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이름으로 상대를 내 세계의 기준으로 들이려 하는 것은 아닐까? 나 자신을 누군가의 기대에 맞춰 도구처럼 쓰고 있지는 않을까?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오늘 한번 떠올려 보고, 떠오른 답이 있다면 아로새겨두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