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하, 〈계절범죄〉
얼마 전 조금 풀린 날씨에 창문을 조금 열어 두었다. 그 옆에 놓인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문득 계절이 지나가는 게 아니라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달력은 분명 다음 장으로 넘어왔는데, 아직 마음의 온도는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것이다. 봄빛을 아주 살짝 머금은 것 같지만 여전히 겨울의 차가움을 가슴 한편에서 확인했던 것처럼, 지난여름엔 진작 끝났어야 할 끈적임이 끈질기게 버티던 게 기억난다. 윤하의 〈계절범죄〉가 포착하는 것은 바로 그 어긋남의 순간이다. “옅어지는 그날의 작은 기억이”라는 문장은 과거가 멀리 달아나는 풍경을 그리기보다, 현재를 떠받치던 여운이 얇아지며 지금의 감각이 바뀌는 장면을 정확히 그리고 있다. 이 노래가 말하는 ‘범죄’는 누군가의 잘못이라기보다, 시간이 한 줄로 정리되지 않고 자꾸만 현재를 뒤흔드는 사건성에 가깝다. 이 애매한 흔들림을 끝까지 따라가려면, 시계가 재는 시간에서 그치지 않고 의식이 체험하는 시간의 구조를 집요하게 파고든 후설의 현상학이 필요하다.
후설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 명료했다. '우리는 ‘지금’이라는 순간을 어떻게 경험하는 것인가'. 흔히 현재를 칼로 잘라낸 단면처럼 상상하기 쉽지만, 후설에게 현재란 애초에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 순간의 의식은 지금-여기에서 살아지는 것과 더불어, 방금 지나간 장면이 아직 얇게 겹쳐 있고, 곧 도착할 순간을 벌써부터 예감하는 흐름이 한 곳에 얽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후설에게 ‘보유(파지, retention)’란 막 지난 마지막 숨결이 현재에 가느다랗게 얹혀 있는 상태고, ‘예향(예지, protention)’은 다음이 올 것이라는 막연한 미리-향함이 현재를 살짝 앞으로 끌어당기는 미묘한 긴장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보유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회상(재생, recollection/reproduction)’과는 전혀 다르다는 데 있다. 회상은 이미 멀어진 과거를 억지로 다시 불러오는 의식적 행위에 가깝지만, 보유는 부르지 않아도 저절로 남아, 바탕을 이루는 감각에 더욱 가깝다. 이를테면 멜로디를 들을 때 방금 지난 음을 완전히 잊지 않기에, 각 음들이 어우러져 선율로 살아 움직이듯, 삶의 순간도 보유의 아슬아슬한 지속성 위에서 흐름이 된다. 예향 역시 ‘앞으로는 좋아질 거야’ 같은 희망 섞인 예측이 아니다. 그것은 다음 순간이 반드시 도착할 거라는 근본적 기대이며, 때로는 설렘이 아니라 두려움과 긴장된 감정으로 현재를 채색한다. 그래서 현재란 언제나 과거를 등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미래 쪽으로 몸을 활짝 열고, 매 순간 미묘하게 새로워지는 폭으로 뛰어든다.
〈계절범죄〉의 언어를 보유의 관점에서 들여다보면, 이 노래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추억’이 아니라 ‘여운이 어떻게 농도를 바꾸는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옅어지는 그날의 작은 기억이”라는 구절에서는 무엇을 기억했는가 보다, 그 기억이 옅어져 간다는 과정 자체가 훨씬 더 중요함을 보여준다. 어떤 관계가 분명 끝났다고 해도, 끝남이 곧 사라짐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끝이 방금 지나간 채로 현재에 배어 들어, 조용히 오늘의 감정에 새 빛깔을 더한다. 이어지는 “오늘도 눈을 감으면 / 또 사라져 버릴 듯한 어제를 그려가”라는 대목에서 ‘그려가’라는 단어는 어제를 억지로 꾸며내거나 미화한다는 뜻이 아닌, 옅어지는 여운을 따라가며 현재가 어제를 한 가닥 한 가닥 조심스레 이어가는 섬세한 몸짓을 말한다. 보유는 원래 힘을 들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남지만, 우리는 그 자취마저 흐려질 때 어느새 그 옅어짐을 붙잡으려 애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떨어지는 그림자 사이에 / 맴도는 향기” 같은 시적인 이미지는, 기억이 말로 명확히 정리되기 전, 감각의 흔적으로 먼저 남아있음을 시사한다. 이 잔상은 과거를 끌어내 재현하는 회상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속에서 조용히 이어지는 보유로 작동한다. 결국 망각이란 단순히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결핍이라기보다는, 여운의 흐름이 점차 흐릿해지거나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현재의 감각과 온도를 조금씩 바꿔놓는, 그런 변화의 순간이다.
노래가 흐를수록 가사의 중심은 점점 보유에서 예향 쪽으로 기울어진다. “내 생에 피어라 가장 아픈 겨울아”라는 가사에서, 그건 단순히 아픈 계절을 아름답게 치장하려는 주문이라기보다, 다가올 시간을 미리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에 더 가까워 보인다. 예향은 언제나 다정한 위로를 약속하는 법이 없다. 오히려 예향은 때때로 두려움의 옷을 덧입고, 지금 이 순간을 서서히 옥죄기도 한다. 그래서 “밝아오니까 그 시간이 두려워도 난 괜찮아”라는 고백은 미래가 모든 걸 해결해 주리라는 확신 같은 게 아니다. 오히려 두려움이 이미 현재의 작은 틈으로 스며들었음을 온전히 인정하면서도, 결국 나아가겠다는 소박한 다짐처럼 들린다. 예향이란 어쩌면 ‘다음이 온다’라는 방향성 그 자체이고, 그 안에는 설렘과 불안이라는 두 감정이 뒤섞여 있다. 또한 “흐렸던 날들만 바람에 날아가거라”에서는, 누구나 한 번쯤 느꼈을 ‘못 견디게 아픈 기억만 날려 보내고 싶다’는 소망을 읽게 된다. 그런데 후설의 시각에서 보유와 예향은 따로 분리된 시간이기보다는 한 덩어리로 흐르기 때문에, 내 안의 감정 중 일부만 콕 집어 떼어내 바람에 흘려보낸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기쁨과 슬픔은 언제나 같은 시간의 결 속에서 서로 얼룩을 남기기에, 어제의 일들을 온전히 돌려놓을 수 없음을 안다. 그래서 이 노래가 운을 떼듯 말하는 계절은 단순히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시간의 잔향과 예감, 그리고 문득 마음을 흔드는 두려움이 한데 섞여 만들어 내는 복합적인 감정의 날씨에 가깝다.
정리하자면, 〈계절범죄〉가 이야기하는 ‘사라짐’이란 과거가 점점 희미해진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바로 이 순간, 여운이 옅어지면서 현재의 결이 조금씩 다른 무늬로 바뀌는 사건에 가깝다. 그리고 이 노래가 말하는 ‘지속’도 미래에 언젠가 보상받으리라는 약속이 아니라, 불안이 밀려오는 예감 속에서도 조용히 다시 지금을 이어 붙이는 선택이다. 만약 후설이 이 노래를 들었다면, ‘계절’이라는 단어를 상투적인 상징으로 소비하기보다,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시간의 작동 방식을 꽤나 솔직하게 기록한 결과물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시간이 늘 직선 위에 가지런히 정렬되길 바라지만, 의식의 시간은 흐름으로, 물살처럼 어딘가로 흘러간다. 그 흐름 한가운데서 우리는 때때로 한 사람을 지난날의 상자에 가두려 애쓰다 번번이 실패하고, 그 실패의 자리에 남겨진 계절의 기후 즉, 차가운 공기, 오래된 습기 같은 것까지도 다시 살아나는 것을 확인한다. 마치 내가 얼마 전, 창문을 살짝 연 채 걸터앉아 밖의 공기가 바뀐 걸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내 마음속 감정은 여전히 제자리인 것만 같은 그 어긋남처럼 말이다. 그럴 때 느끼는 서운함이나 어정쩡함이, 사실은 내가 어딘가 뒤처진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시간이란 게 그런 모양으로 스며든다는 작고 조용한 깨달음임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시간을 억지로 한 줄로 꿰매려는 노력을 잠시 접어두는 일이다. 흐릿해지는 기억을 억지로 또렷하게 만들기 위해 애쓰기보다, 두려움이 어느새 마음에 닿을 때에도 그 두려움을 그냥 ‘그래, 이런 마음이구나’ 하고 스스로가 받아들이는 등의 태도가 그런 것 같다. 무엇을 오래 지니지 못한다는 사실은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아온 흔적이 아니다. 되려 모든 경험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그래서 계절이란 지나고 나서 비로소 이름 붙는 게 아니라, 아직도 내 안 어딘가를 조용히 흐르고 있는 어떤 것 같다. 창문 틈 사이로 스며든 바람이 오늘의 온도를 바꾸듯, 옅어지는 기억들도 온전히 사라지진 않으면서 지금의 결을 살짝 또 바꾸어 놓는다. 나는 그 변화 앞에서 대단한 결심을 하려 애쓰기보다, 그저 오늘 한 번 숨을 더 고르고, 지금의 순간을 하나씩 이어 붙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