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나 드라마에선 가끔 피고, 피고인 하는 용어가 나온다. 피고와 피고인, 둘은 다른 말일까?
전혀 다른 말이다. 피고는 민사사건, 가사사건, 행정사건에서 소 제기를 당한 사람을 말한다. 피고인은 형사사건에서 재판을 받는 사람 (쉽게 말하면 범죄자로 추정되는 사람) 을 말한다. 민사, 가사, 행정사건에서는 아예 피고인이 있을 수 없고, 형사사건에서는 아예 피고가 있을 수 없다.
그럼 민사사건, 가사사건, 행정사건, 형사사건은 뭐냐?
개인과 개인, 법인과 법인, 개인과 법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분쟁. 거의 대부분 돈과 관련된 분쟁이다. 돈을 빌려간 사람에게, 빌려간 돈을 갚으라! 면서 소를 제기한다면 그 소송은 민사소송, 그 사건은 민사사건이다. 소를 제기하는 나는 원고, 소 제기를 당한 상대방은 피고.
거의 대부분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혼인, 이혼, 친권, 양육, 입양, 파양과 같은 분쟁. 배우자와 이혼을 하고 싶은데 배우자가 이혼에 동의를 하지 않아 내가 어쩔 수 없이 이혼소송을 제기한다면 그 소송은 가사소송, 그 사건은 가사사건이다. 소를 제기하는 나는 원고, 소 제기를 당한 배우자는 피고.
사인(私人)과 행정권 사이에서 벌어지는 분쟁. 내가 음식점 영업허가를 받아 영업을 하고 있었는데, 구청에서 어떤 이유로 영업취소를 해서 내가 구청장을 상대로 영업취소처분의 취소소송을 제기한다면 그 소송은 행정소송, 그 사건은 행정사건이다. 소를 제기하는 음식점 주인은 원고, 소 제기를 당한 구청장은 피고.
개인과 국가 사이에서 벌어지는 분쟁. 범죄자로 추정되는 사람이 유죄인지 무죄인지를 가리는 절차이다. 민정수석이 자신의 지위를 남용해서 대기업을 압박해서 기부금을 뜯어냈다고 하자. 민정수석은 직권남용죄를 저질렀다는 혐의를 받는다. 국가를 대표해서 검사가 그 민정수석을 재판에 부치면, 민정수석은 피고인, 검사는 원고 아니고 그냥 '검사'다.
그러니까 '피고인'은 형사사건에서 유죄인지 아니면 무죄인지를 심판받는 사람, 일단 범죄자일지도 모르는 사람을 말한다. 범죄와는 상관 없는 다른 절차 - 민사, 가사, 행정사건 - 에서는 '피고'만 있을 뿐, 아예 피고인이 없다.
좀 감이 오시나요? 드라마 '하이에나'에 아주 좋은 예가 나온다. 먼저 형사사건의 "피고인"부터~~
이건 형사사건이므로 당연히 민정수석은 피고가 아니라 "피고인"이다. (전 민정수석 우병우를 생각해보세요)
주지훈이 형사법정에서 민정수석을 변호하는 스토리를 보시려면 여기~
마지막 화면에서처럼 형사법정에서는 재판부를 사이에 두고 왼쪽에 검사가, 오른쪽에 피고인과 변호인이 앉는다. 정 가운데에는 증인석이 있다. 검사와 피고인/변호인은 서로를 마주 보게 되어 있다. 그 이유는 현행 형사소송법에서 피고인은 검사와 대등한 지위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2020년 11월에 열린 화성시 연쇄살인사건의 재심 재판에서도, 검사와 피고인 윤성여님이 서로 마주 보고 있죠? (재심 사건도 형사사건이다.) 진범 이춘재는 정면을 보고 증인석에 앉아있고. 지금까지 범죄자로 몰렸던 윤성여님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열린 재심 재판에서는, 범죄자로 몰린 윤성여님이 피고인, "내가 진범"이라고 증언을 하고 있는 이춘재가 증인이다.
예전에는 정 중앙에 증인석이 아니라 피고인석이 있었다. 그래서 재판부가 정면으로 피고인을 내려다보고, 검사는 재판부의 왼쪽에서 피고인을 측면으로 바라보는 식이었다. 아예 구조 자체가 피고인은 이미 죄인이요, 행정부(검사)와 사법부(재판부)가 죄인을 단죄하는? 원님 재판 식이었다.
하지만 그런 법정의 배치구도가 무죄추정주의에도 반하고, 피고인의 방어권을 검사의 공격권과 대등하게 맞추어야 한다는 개정 형사소송법의 이념에도 반하기 때문에, 현재는 검사와 피고인이 서로를 마주보도록 배치구도를 바꾸었다.
형사사건에서 '피고인'이 나왔으니 이젠 '피고'가 나오는 민사, 가사, 행정사건을 살펴보자. 역시 '하이에나'에 좋은 예가 나온다. 재벌아들이 와이프를 상대로 이혼소송을 제기한 가사사건이다.
김혜수와 주지훈이 이혼소송에서 대치하는 스토리는 여기를 보시면 됩니다.
마지막 화면은 재판부 입장에서 본 원고석과 피고석이다. 형사재판의 자리 배치와 다른 점을 아시겠나요? 서로 마주 보고 앉을 검사와 피고인이 아예 없다. 원고와 피고만이 있을 뿐이다. 원고와 피고는 서로를 바라보지 않고, 각자 나란히 재판부를 바라보게 되어 있다.
그래서 변호사가 되어 가지고 형사사건에서 '피고', 민사나 가사사건에서 '피고인'이라고 칭하면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다 이유가 있다. 법조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피고'는 민사, 가사, 행정사건에서 소 제기를 당한 사람으로, '피고인'은 형사사건에서 유죄-무죄의 판단을 받는 사람으로 정의하자! 라고 자의적으로 정한 게 아니다. 법정 내 자리배치도 법조인들이 자기들끼리 맘대로 정한 게 아니다. 모두 법률에 근거가 있다.
우선 형사사건에서 '이렇게 저렇게 재판을 하자,' 라고 재판절차를 규정해놓은 법이 있다. 그게 바로 형사소송법이다. 형사재판은 형사소송법에서 정해놓은 절차대로 진행해야 한다. 지키라고 만든 법이니까요~
형사소송법 제275조 제3항과 제275조의2를 보면, '피고'라는 말을 안쓰고 '피고인'이라는 말을 쓰죠? 아무리 Ctrl+F 를 해서 "피고"라는 말을 찾아도, 형사소송법 안에서는 "피고"라는 단어를 찾을 수 없다. 피고는 민사, 가사, 행정소송에서만 등장하니까요.
제275조 제3항에서는 아예 검사석과 피고인석은 대등하게 마주 보게 배치하도록 정하고 있다. 예전처럼 피고인이 유죄로 추정되는 것 마냥 검사와 재판부 앞에서 일방적으로 심판 받는 모양새를 없애려고 한 것이다. 형사법정의 자리배치도 다 형사소송법에 근거가 있다.
형사소송 절차를 규율하는 법이 형사소송법이라면, 민사, 가사, 행정소송에 쓰이는 법은 민사소송법, 가사소송법, 행정소송법이다. 이 중에서는 민사소송법이 민사, 가사, 행정소송에 두루두루 적용되므로 대표적으로 민사소송법만 살펴본다.
제255조 제1항에서 규정한 것처럼, 원고가 소장을 법원에 제출함으로써 소를 제기하면, 법원은 그 소장을 피고에게 보낸다. 이렇게 소송이 시작되는 것이다. 민사소송법 중에서 Ctrl+F 를 아무리 해봐도 "피고인"은 찾을 수 없다. 피고만 나올 뿐.
그래서 피고와 피고인은 전혀 다른 용어이다. 피고와 피고인은 법정에서 앉는 자리도 다르다. "피고"는 소 제기를 당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민사, 가사, 행정소송에서 원고와 나란히 앞을 보고 앉는다. "피고인"은 형사법정에서 범죄의 유죄-무죄 판단을 받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형사소송에서 검사와 서로 마주보고 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