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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종화 Jan 30. 2019

지옥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단편집 <<지옥변>>에 수록된 작품들이 드러내는 세계는 어둡고 욕망에 사로잡혀 있으며 근원적으로 소통불가능하다. 등장인물들은 자기 욕망의 주체가 되어 근대적 개인으로서 면모를 보인다. 그러나 주체로서 욕망하고 행동하고 기억하는 모든 행위는 어쩔 수 없는 자기합리화로 이어진다. 주체로서의 나를 긍정하기 위해서는 주체가 욕망하는 행위 자체를 정당화해야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아쿠타가와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자 묘미가 생겨난다. 바로 인물 각자의 입장에 따라 한 사건을 두고 저마다 다른 기억과 해석이 펼쳐진다는 점이다. 단일한 진실 대신에 각자의 진실이 평행하게 존재한다. 이 진실들이 대결할 때 독자는 전율을 느끼고 또 나름대로 자신만의 진실을 새로 만들 수 있다. 그럼 내가 이 책을 읽고 본 진실은 무엇일까?


 <게사와 모리토> 


 모리토는 예전에 좋아하던 여자 게사를 우연히 다시 만나 그녀를 유혹한다. 게사는 자신을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 좋은 남편 와타루와 만나 결혼한 상태다. 그럼에도 둘은 불륜에 빠지고 남자가 여자에게 남편을 죽이자고 꼬드긴다. 마침내 게사가 이를 허락한다. 이 단편은 남편을 죽이러 가는 모리토와 남편 대신 죽고자 작정한 게사의 독백을 차례로 서술해 이 안에서 모든 이야기와 심리를 나타낸다. 이 둘의 관심사는 서로에게 향해 있지 않다.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사태를 정당화한다. 


 둘 모두 처음에는 상대를 사랑하지 않는다 말하지만, 마지막에는 사랑한다 고백한다. 내가 보기에 둘은 뒤틀린 사랑을 하고 있다. 비록 불륜일지라도 서로를 배려하고 공감하는 진실한 사랑이 불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둘은 자기의 방식대로 욕망을 밀어붙이고 죄책감과 공포에 사로잡힌다. 모리토는 정사가 끝난 후 게사가 추악하다 느끼고 증오를 품었다. 반면 게사는 모리토의 마음에 비친 자신의 추함을 보았다. 남자는 여자를 하나의 목표로 삼아 욕망한다. 자신을 보지 않고 상대만 본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든 합리화하고 있다. 반면 여자는 자기 욕망의 대상으로 남자를 보는게 아니라 그 남자가 욕망하는 자신을 본다. 여자가 주체로서 자신을 드러내고 욕망하는 일이 금지된 시대이기 때문에 게사는 자신을 볼 때도 남자의 시선에 비친 자신을 보아야 했다. 남자의 시선에 어린 증오와 경멸이 투영되니 그녀는 자신의 추악함을 볼 수밖에 없다. 게사가 모멸감을 느낀 이유는 그를 통해서 본 자신의 모습이 추악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를 통해서만 자신을 보아야 하는 상황 자체가 더없이 모멸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이처럼 둘은 게사의 추함을 보더라도 시선이 다르며, 의미하는 바도 다르다. 둘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모리토는 자신의 칼에 죽을 사람이 와타루가 아니라 게사라는 걸 상상도 못하며, 게사는 남자들의 눈에 비친 자신이 중요하지 막상 그들에겐 일말의 관심도 없다. 


 뒤틀린 사랑은 마음도 나락으로 빠지게 만든다. 모리토가 와타루를 죽여야 하지 않겠냐고 게사에게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치 마약에 중독되어 나쁜지 알면서도 약물에 의존할 수밖에 없듯이 이들은 악의 구렁텅이로 깊이 빠져드는 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 타락과 파멸로 향하는 마음은 인간의 본성 깊숙한 곳에 내재되어 있어 처참한 종말을 예감하면서도 벗어날 수 없다. 



<지옥변>


 권력과 예술은 같은 길을 갈 수 없다. 권력이 추구하는 안정, 질서, 도덕을 지향하는 예술이란 어용일 뿐이다. 예술이 지고의 경지에 다다르고 싶다면 인간 세상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가능하다. 만약 어느 예술가가 사람들이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기 위해 합의한 규칙과 윤리를 뛰어넘는다면, 그는 사회 또는 사회를 유지하는 권력과 불화할 수밖에 없다. 숱한 천재가 광기에 사로잡힌 이유는 두 가지다. 한계를 넘은 행위가 미친 것과 같거나, 불화를 감당하지 못해 미쳐버렸거나 둘 중의 하나다. 이 둘은 평범한 사람이 보기에 무슨 차이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그런데 질서를 유지하는 권력도 광기에 휩싸일 때가 있다. 안정과 질서는 불안정과 무질서가 있기에 의미를 가진다. 권력이란 자신이 유지하려 애쓰는 현재의 안정 상태를 깨뜨리는 힘과 맞섰을 때 본질이 드러나는 법이다. 그때 권력이   과연 차분하게 이성적인 해결책을 내놓는가? 그렇지 않다. 따라서 권력과 예술은 무시무시한 광기를 품고 있다는 면에서 같다. 나는 이 단편이 보여주는 진실이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위세가 드높은 권력자 ‘호리카와 나리’에게 화가 요시히데가 ‘지옥변’ 병풍을 그려 바친 일에 얽힌 이야기를 나리의 하인이 말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지옥변’이란 권선징악을 알리기 위해 지옥의 끔찍한 모습을 그린 지옥변상도(地獄變相圖)를 말한다. 보통 소설을 읽을 때, 화자가 객관적으로 사실을 전달한다고 가정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화자의 말에 휘둘려 ‘호리카와 나리’의 진면목을 쉽게 알아채지 못했다. 이야기의 끝에 가서 나리가 요시히데의 딸을 불태워 죽이라 명하는 장면에 와서야 뭔가 이상하다 깨달았다. 훌륭한 권력자가 어떻게 이런 명령을 내릴 수 있단 말인가? 나리의 하인으로 평생을 살아온게 틀림없는 사람의 입장이라면 어떻게든 나리에게 불리하지 않게 말할 것이다. 그러면 이제까지의 이야기가 완전히 다르게 느껴진다. 참으로 뛰어난 소설적 장치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화자의 시선과 입장에 따라 진실은 다르게 다가온다. 아쿠타가와에게 단 하나의 영원한 진리와 같은 진실은 없다. 


 나리는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핑계로 화가의 딸을 불태우라 명한다. 요시히데는 자신의 딸이 불타 죽는 광경을 보며 인간적으로 비통해 하지만, 지옥변 그림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을 그리기 위해 예술적 광기에 휩싸여 장엄하게 쳐다본다. 명령을 내린 나리는 오히려 새파랗게 질려 거품마저 물고 짐승처럼 헐떡거린다. 마침내 요시히데는 더없이 훌륭한 걸작을 완성해 바치고 바로 자살한다. 권력의 광기와 예술의 광기가 부딪혀서 예술이 이겼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예술과 권력 자체에서 우열이 나누어진다고 할 수 없다. 누가 더 미쳤는가에 따라 우열이 나뉜다. 이 작품에서는 요시히데가 나리보다 더 미쳐있기 때문에 예술이 뿜는 광기가 권력을 압도했다. 그러면 딸의 처소를 침입해 겁탈하려 한 괴인은 나리가 아니라, 요시히데일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을까? 나리라면 몰래 들어갈 필요도 없이 말 한마디면 될테니까.


 권력자나 예술가나 광기에 휩싸이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 요시히데가 지옥변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점점 광기에 물들자 나리도 이에 반응한다. 나리가 화가의 딸을 불태운 이유는 경쟁심에 있지 않았을까? 너의 예술보다 나의 권력이 강하다는 걸 보여주면 그가 굴복하지 않을까 여겼겠지. 그런데 더 미친 요시히데는 딸의 참혹한 죽음마저 예술에 보탠다. 신과 같은 위세를 뽐내던 권력자는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인륜을 뛰어넘은 예술가는 걸작을 남긴다. 그러나 예술이 이긴거지 예술가가 승리했다고 할 수 없다. 권력과 예술이 위대하지 인간은 악하고 나약하다. 



<덤불속>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이 단편을 메인 플롯으로 영화 <라쇼몽>(1950을 연출해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서구에 널리 소개된 데에는 이 영화의 힘이 컸다. 한 사내가 죽은 채로 발견된다. 이 사건과 관련된 7명의 사람이 진술하는데 제각기 다르게 사건을 해석한다. 진술에서 공통된 부분만 요약하면 길을 가던 부부를 도둑 다조마루가 덤불 숲으로 유인해 남자를 묶고 여자를 겁탈한다. 남편은 죽은 채 발견되고 도둑은 말에서 떨어져 나졸에게 잡힌다. 아내는 도둑이 잡힌 후 포청에 찾아온다. 마지막으로 (도둑과 아내의 진술이 달라 진상을 알기 어렵게 되어서) 무녀를 통해 죽은 남편의 혼령을 불러 그의 말을 듣는다.


 사건의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도둑, 아내, 남편(혼령)의 진술이 다르다. 도둑은 여자를 겁탈한 후 여자가 둘 중 살아남은 한 사람을 따라가겠다고 말해서 남편과 결투를 벌여 죽였다고 말한다. 아내는 겁탈당한 후 도둑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남편이 자신을 업신여기는 눈빛을 보이며 죽여 달라 말해 그리했다고 털어놓는다. 혼령으로 불려온 남편은 아내가 겁탈당한 후 도둑에게 자신을 죽이라 요구했는데 도둑이 자신을 풀어주는 동안 아내가 사라졌고 도둑이 떠난 후 자결했다 이야기한다. 재미있는게 이들은 저마다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다고 주장한다. 


 혼령이 불려내려와 말한다면 진실일 것이라 짐작하기 쉽지만, <지옥변>에서 화자가 중립이 아니듯, 혼령이라는 점이 진실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오히려 중세 일본에서 유일하게 발언권이 있는 남성 사무라이가 귀신으로 격하되었다. 범죄자, 여인, 혼령은 사회의 주류가 아닌 주변인이다. 그래서 그의 발언에 도둑이나 아내와 같은 만큼의 무게가 얹혀졌다. 셋 중 누가 진실인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이야기 속 연대는 근대가 오기 한참 오래 전이지만 이들은 근대적 주체로서 사고하고 움직인다. 더이상 주변인으로 사는 일, 즉 누군가의 배경이 되기를 거부하고 자신이 사건의 주체라고 선포한다. 내 삶의 주체가 되는 일은 살인죄를 뒤집어 쓰는 것보다 더욱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작품 속 화자들은 자신의 가치관과 입장에 따라 같은 사건을 다르게 해석한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하면 기억을 왜곡시켜 버릴 정도다. 나는 이들이 거짓말을 한다고 보지 않는다. 사람은 보는 것을 믿는게 아니다. 믿는 것을 본다. 이들은 모두 자신이 있는 그대로의 정확한 진실을 말한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아쿠타가와 단편집에 수록된 몇몇 작품을 내 시각에서 해석했다. 책을 읽는 재미도 컸지만, 이 글을 쓰면서 나름대로 진실을 구성한 일도 즐거웠다. 소개한 세 작품말고도 <갓파>, <참마 죽>, <톱니바퀴>, <오긴>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은 내용이 많은데 다음 독서 때 다루려 한다. 두고두고 읽고 생각할 책이다. 만약 누가 내게 일본 소설을 묻는다면, 이 책을 일순위로 소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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