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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종화 Jan 21. 2019

3.1절 백주년 기념 간송특별전 <대한콜랙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청자와 백자

 2019년 1월 15일 화요일, 하루 휴가를 냈다. 자동차 정기 점검을 하는 김에 평일 낮 시간을 이용해 조용하게 좋은 전시를 감상하자 마음먹었다. 요즘 대형 기획 전시가 많아서 모처럼 낸 시간에 무슨 전시를 볼까 오래 생각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마르셀 뒤샹전>,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하는 <피카소와 큐비즘전>, 중국 근대 미술 거장 <치바이스전>, 모두 관람하고 싶은 전시다. 그런데 내 선택은 동대문 DDP에서 개최한 <삼일운동 백주년 기념 간송특별전, 대한콜랙숀>이다. 여기 보고 온 사람들이 하나같이 동물모양으로 만든 고려청자연적을 극찬했다. 도대체 어떻길래 그런지 무척 궁금했다. 리움에서 도자기만 모은 전시를 본 적 있는데 그때도 은은하고 깊은 청자가 더없이 매혹적이었다. 아무래도 유럽과 중국의 근현대미술보다 더 마음이 간다. 그래, 청자 보러 가자!


 전시장에 들어서니 맨처음 보성고등학교 관련 글이 보인다. 간송 전형필이 인수해 경영했던 보성고등학교 연혁과 이 학교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교사, 졸업생을 소개했다. 보성학원은 1905년 대한제국 탁지부 대신이던 충숙공 이용익이 건립했다. 작년에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본 사람이라면 이정문 대감을 기억할텐데 바로 이용익을 모델로 캐릭터를 만들었다. 보성(普成)이라는 이름은 고종이 직접 하사했다. “널리 사람다움을 열어 이루게 한다”는 뜻이라고 전해진다. 보성학원 산하에 소학, 중학, 전문 등 각 과정의 학교가 있었다. 일제의 탄압으로 곧 경영이 어려워지자 1910년 천도교의 손병희 선생이 학원을 인수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손병희와 교장 최린이 투옥되어 다시 어려움에 빠졌다. 그러다 1932년 인촌 김성수가 보성전문만 인수해 현재 고려대학교의 전신이 되었고, 보성고등보통학교는 1940년 간송이 인수해 지금도 간송의 아들이 이사장을 맡고 있다.


 보성 출신 독립운동가의 면면을 보고 놀랐다. 최초 설립자 이용익과 천도교 3대 교주이자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손병희의 영향을 안 받을 수 없었겠다. 한글학자 주시경, 김두봉이 교사로 근무했다. 문인으로 염상섭, 현진건, 김해경(이상), 임화가 이 학교 졸업생이다. 그리고 윤기섭, 송계백, 엄항섭, 김사국, 김붕준 같은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보성고등을 졸업했다. 전 재산을 아끼지 않고 민족의 문화유산을 모은 간송은 교육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문화 유산을 모을 때, 단순히 수집하는 게 아니라 후대가 공부하고 연구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했다. 2019년 1월 5일, 중앙 SUNDAY 기사에 현재 간송미술관 관장을 맡고 있는 전인건의 인터뷰 기사를 보라. 간송 소장품의 특징을 묻는 기자의 말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간송의 수집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었다. 일제에 의해 사라지는 우리 문화재를 지켜내고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일이었다. 그냥 컬렉터가 예를 들어 김홍도의 그림만 모은다면, 간송은 단원뿐 아니라 그의 스승과 제자에 이르기까지 계통을 파악해 모두 수집했다. 후대가 미술사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이런 것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책도 중요한 것은 같은 책이라도 2권 이상 사들였다. 상태가 좋은 것은 보관용이고, 나머지는 연구용으로 쓰기 위해서다.”


  간송에 대해서 알수록 놀랍고 감사하다. 이제 본격적으로 소장 미술품이 나올 차례다. 맨처음 보이는 작품은 겸재 정선의 [금강내산]이다. 


 이 그림은 겸재 정선이 그린 <<해악전신첩>>에 실려 있다. 금강산을 중심으로 강원도와 동해안 일대 명승지 그림과 제화수로 구성되어 있다. 이 화첩을 간송이 소장하게 되기까지 놀라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골동품, 고미술품을 발굴해 수집가에게 팔던 장형수가 1933(4)년 가을 무렵 경기도 용인을 지나가다 소문난 친일파 송병준(1858~1925)의 집을 구경하게 되었다. 당시 집 주인이던 송병준의 손자 송재구가 자고 가길 청하여 밤에 변소에 가는데, 머슴이 무슨 문서 뭉치를 마구 아궁이에 넣으며 불을 때고 있더란다.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니 초록색 비단으로 귀하게 꾸민 책이 하나 보이길래 가지고 나와서 보니 겸재 정선의 화첩이었다. 주인에게 귀한 책이 불타 없어질 뻔 했으니 팔라고 해서 20원(!!)에 샀다고 한다. 그가 서울로 올라와 이 화첩을 간송에게 팔았고 덕분에 우리가 감상할 수 있다. 겸재 정선이 그린 금강산 그림 화첩이 친일파 송병준의 집 아궁이에서 소각되었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일런지!


 금강산 봉우리들이 마치 꽃잎처럼 펼쳐져 있다. 암석 봉우리들을 감싸고 있는 나무숲 봉우리는 검푸른 먹으로 채색해 꽃잎처럼 포근한 느낌이다. 그림을 보면 볼수록 다양한 느낌을 받으며 빠져들었다. 암석 봉우리들은 예리하고, 숲 봉우리는 부드럽다. 전체로 보면 웅장한데 가까이 들여다보면 금강산 명승지를 세밀하게 묘사했다. 호연지기의 호쾌한 감정을 느끼다가 누군가를 부드럽게 감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가장 단순한 붓과 먹으로 이토록 많은 감정과 감각을 느끼게 한다. 실제 보면 화첩이라 많이 크지 않은데 엄청난 대작으로 보인다. 그만큼 뛰어나다. 


 화첩의 다른 그림도 감상하며 발길을 옮겼다. 영롱한 빛의 청자가 방 한 가운데에 자태를 뽐내고 있다.


[청자상감운학문매병, 13세기, 높이 41.7cm, 국보 제 68호]

 매병(梅甁)은 입이 작고 어깨가 팽만하며 동체가 길쭉한 형태의 그릇으로 고려부터 조선 초기까지 제작되어 주로 술, 물과 같은 액체를 담는 용도로 쓰였다. 상감기법은 무늬를 나타내는 방법인데, 음각으로 새긴 무늬에 다른 색깔을 지닌 흙을 채워 넣어 가마에서 굽는다. 이 기술은 매우 어려우나 다른 방법보다 훨씬 다양한 색을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운학문(雲鶴文)은 구름과 학 무늬를 말한다. 청자를 보면 몸통에 흑백으로 상감된 원 안과 밖에 각각 학과 구름 문양이 있다. 원 안의 학은 위를, 밖의 학은 아래를 향하는데 하늘과 땅, 즉 음양의 조화를 의미한다. 구름과 학은 예로부터 장수를 상징한다. 자세히 보면 빙렬이 세세하게 남아 있다. 


 빙렬은 도자기의 유약 표면에 생긴 작은 금인데, 도자기에 유약을 씌워 가마에 넣고 굽기 시작하면 유약의 수분이 마르면서 수축할 때 유약 표면에 작은 금이 가득 생긴다. 온도가 더 높아지면 유약이 녹아 유리질이 되고 금들은 없어지게 되지만, 번조가 끝나고 도자기가 식기 시작하면서 태토와 유약의 수축도가 달라 유약에 금이 생긴다. 빙렬은 본래 소성할 때 나타나는 결함이지만 고대의 도공은 이를 독창적으로 장식처럼 사용하기도 했다.


 국보로 지정된 고려 청자가 많은데 인터넷에서 고려청자로 검색하면 이 운학문매병의 이미지와 설명이 제일 많이 나올 정도로 고려 청자 중에서도 단연 뛰어나다. 이 청자는 정말 아름다운 곡선을 뽐내는 전형적인 고려식 매병이다. 이처럼 목이 짧고 어깨가 풍만해 S 라인을 이루며 아래로 떨어지는 선은 관능과 생명력을 내뿜는다. 약동하는 에너지가 느껴진다. 도슨트가 설명하길, 이런 형태는 특히 무신정권 시기에 유행했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운동을 열심히 해서 승모근과 어깨 근육이 발달한 장사의 형태와 비슷하다. 무신 시대의 형태와 문인 시대의 형태가 어떻게 다른지는 나중에 백자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구름과 학의 문양은 또 얼마나 정밀하고 조화로운지 모른다. 고려 청자만 낼 수 있는 은은하고 매혹적인 푸른 빛에 조금도 거슬리지 않는다. 지금이야 국보를 그렇게 다룰 수 없지만 이 병을 책상 위에 놓고 빙글빙글 돌리면, 하늘빛 바탕에 날아오르고 날아내리는 학이 끝없이 이어진듯 볼 수 있다고 한다. 시각적 쾌감의 극치를 맛볼듯 하다. 


 간송이 이 청자를 얻은 데에도 뒷이야기가 있다. 간송은 1935년에 이것을 일본인 골동상 마에다 사이이치로에게서 구입했는데 당시 서울에서 가장 비싼 명동 기와집 20채를 구입할 수 있는 거금 2만 원을 줬다. 지금이라면 강남 아파트 20채에 맞먹는 셈이다. 구입 후, 일본의 수집가(공교롭게도 마에다 사이이치로의 장인)가 간송이 지불한 금액의 두 배를 제안했다. 간송은 이 제안을 듣고 이 청자보다 더 좋은 물건을 가져다주면 제값에 넘기겠다고 말했다. 일본의 수집가도, 거래를 중개한 일본인 신보 기조도 이 말에 크게 놀라고 감탄했다. 


 


 고려 청자 중에서도 최고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운학문매병을 오래도록 보았다. 주위를 천천히 돌며 보기도 하고, 빙렬이 주는 청자의 독특한 표면질감을 느끼려 애썼다. 사람들이 극찬한 청자연적도 봐야해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 전시실은 간송이 ‘경성미술구락부’에서 경매를 통해 구입한 고미술품을 소개한다. ‘경성미술구락부’는 일제 시기 경성에서 고미술의 경매를 전담한 유일한 단체였다. 경매에는 출자를 한 회원(주주)만 참여할 수 있어서 간송은 대리인 신보 기조를 내세웠다. 이와 관련한 글을 읽고 눈을 돌리자 방 한가운데에 유려한 백자가 전시되어 있다. 조선 백자 중에서도 최고의 완성도와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작품이다.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 18세기, 높이 42.3cm, 국보 제 294호]


 백자는 백토(白土)로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무색 투명한 유약을 입혀 1,300~1,350도 정도에서 환원염으로 구워 만든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야 백자가 유행한 이유는 먼저 가마 온도를 1,300도 이상 올리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사대부가 흰 색을 선호했던 취향도 크게 작용했다. 청화, 철채, 동채는 모두 모두 안료를 뜻한다. 청화는 산화코발트로 청색을, 철채는 산화철로 갈색을, 동채는 산화동으로 홍색을 나타낸다. 사진을 보면 난초의 청색, 국화의 홍색, 국화 줄기와 잎의 갈색을 볼 수 있다. 이 세 가지 안료는 모두 성질이 달라 소성 온도와 가마 분위기에 따라 발색이 달라져 제작하는 데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그때문에 이 작품처럼 세 가지 색상이 제대로 나온 백자는 극히 드물어 명품으로 일컬을 만하다. 


 초충난국문(草蟲蘭菊文)은 풀, 벌레, 난초, 국화 무늬를 말한다. 국화 꽃잎 주위 날아든 나비와 하늘을 날고 있는 잠자리가 새겨져 있다. 앞서 봤던 청자와 달리 무늬는 양각으로 조금 도톰하니 튀어 나와 있다. 이 백자의 형태적 특징은 먼저 주둥이가 아래로 거의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 있고, 입구가 단면처럼 직각으로 잘려 있다. 보통 물을 담는 병은 편의를 위해 입술처럼 약간 말려 있게 마련인데 이 병은 그렇지 않다. 서릿발같은 사대부의 엄정한 기상이 보이는 듯하다. 청자의 화려함, 풍성함과 다른 백자의 소박함, 엄격함이 보이는데 세 가지 안료로 채색된 양각 문양이 엄격함을 누그러뜨린다. 사대부가 그린 초충도처럼 간결하고 순백의 백자 표면에는 여백의 미가 넘친다. 조선 후기에 백자에도 여러 색과 문양이 들어가게 되었지만 결코 번잡하게 하지 않았다. 청자의 푸른 빛은 은은하지만 대놓고 매혹한다. 백자의 순백하고 말끔한 빛깔은 고고하니 홀로 뽐내는 듯하다. 내가 유혹되거나 말거나 상관없다. 그저 자체로서 기상을 뿜어낸다.


 이 백자는 1936년 11월, 경성미술구락부 경매 사상 최고가인 1만 4천 5백 50원에 간송의 대리인 신보 기조가 낙찰받았다. 세계를 주름잡던 거상 야마나카 상회와 이름 높은 수집가와 대결전을 펼친 끝에 간송의 품에 안겼다. 간송이 국보급 문화재를 입수한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놀랍고 고맙다. 문화와 교육에 쏟은 그의 열정은 이처럼 후대 한국인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고 있다. 


[예서대련(隸書對聯), 김정희(1786~1856), 지본, 보물 제 1978호]


 대련(對聯)은 문이나 기둥 같은 곳에 써 붙이는 대구로 이것은 추사 김정희가 말년에 살던 집 기둥에 붙여 두었던 글귀라고 한다. 나는 서예를 아예 모르는데 그 유명한 추사 김정희가 쓴 예서체가 어떤지 호기심이 생겨서 보다가 문구가 마음에 들어 좀 더 관심을 가졌다. 우선 예서(隸書)는 진시황 시절에 나온 소전체를 편하게 쓰기 위해 다시 간추린 서체로, 현재 한자체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첫 서체라고 할 수 있다. 예서에서 해서, 행서, 초서가 비롯되었다. 전서는 주나라, 진나라 시절 사용하던 서체인데 지금 보면 상형문자 시절에서 아주 조금 나아진 정도로 보인다. 예서는 특유의 반듯하고 고풍스러운 느낌을 가진 서체로 한국에서 인기가 높다. 특히 추사 김정희가 예서체가 극도로 예술적인 형태를 이루었다고 한다. 전시에서 볼 때는 이런 정보를 모르고 봐서 문구 해석 위주로 봤다.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고회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손자”


 큰 글자는 이런 뜻이고 옆에 작은 글자는 다음과 같다. 


 “이것은 촌 늙은이의 제일가는 즐거움이 된다. 비록 허리춤에 한 말만큼 큰 황금인을 차고, 음식이 사방 한 길이나 차려지고 시첩이 수백 명 있다 하더라도 능히 이런 맛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행농을 위해 쓴다. 칠십일과(七十一果)”


 칠십일과는 과천 사는 71살 노인이라는 의미로 추사 본인을 가리킨다. 추사는 1856년 10월 10일에 사망하는데 이해 8월쯤 이 글을 썼으리라 추정한다. 추사는 어릴 때부터 명필로 이름을 떨쳤으며 당대 세도가 집안의 자제였으나 이런저런 정쟁에 휘말려 두 번이나 긴 유배 생활을 했고 고문을 받아 생명이 위태롭기도 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유배에서 풀려난 해가 1852년이다. 말년에 이르러 자신이 누리지 못한 단란한 가족의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은 셈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찾아보고 나서 다시 사진으로 예서대련을 본다. 곧 죽을 사람이 썼다고 믿기지 않는다. 문외한인 내가 봐도 획에 힘이 넘치고 거침이 없다. 단정한 원래 예서체의 특징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필체를 더했다. 가로획은 곧지만 엄중한 직선이 아니어서 자유가 느껴진다. 세로획이 내려오다 옆으로 뻗칠때 곡선은 거침이 없고 간결하다. 한마디로 멋스럽다. 이 작품을 본 계기로 서예 작품도 많이 볼 생각이다.




 다음 전시실로 발길을 돌렸다. 간송 소장품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이라는 “갇스비 콜랙숀(Gadsby Collection)” 중 열 두 점이 있다. 간송은 1937년 영국 귀족 출신 변호사로 일본에 머물며 열성적으로 수준 높은 도자기 컬렉션을 모은 존 개스비(John Gadsby)로부터 스무 점을 일괄적으로 사들였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전운이 감돌며 일본에서 군사반란이 일어나는등 군국주의화가 가속되자 개스비는 자신의 컬렉션을 처분하기로 마음먹는다. 간송은 누구보다 발빠르게 움직여 컬렉션을 인수했다. 개스비는 “한국의 젊은이에게 한국 미술품을 맡기에 되어 더억 기쁘다”라고 했다. 총 22점의 컬렉션 중 자그마한 2점은 개스비가 기념으로 간직하고 나머지 20점을 모두 넘겼다. 이 중에서 국보가 4개, 보물이 5개나 나왔다. 


[청자모자원숭이형연적, 12세기 중기, 국보 제 270호]


[청자오리형연적, 12세기, 국보 제 74호]


 이번 전시에서 가장 돋보인 두 작품이다. 앞서 보았던 청자와 백자도 물론 대단했다. 오래도록 눈을 떼지 못하고 감상했다. 그러나 이 두 연적은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고 영롱했다. 상감이 없는 순 청자가 내는 빛과 매끈한 질감을 어떻게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기회가 되면 꼭 직접 보라고 권하고 싶다. 



 소개한 작품 말고도 숱한 보물과 국보급 문화재가 전시되고 있다. 끝나기 전에 꼭 다시 감상하러 가려고 한다. 간송 전시회는 DDP에서 개최한 이후로 몇 번 갔는데 갈때마다 한국 미술의 아름다움에 반한다. 그리고 간송이 전재산을 탕진하며 미술품을 수집했던 일에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 이번에는 보성고등학교 이야기와 국보급 미술품을 획득한 경위까지 알아서 감사하는 마음이 더 강했다. 전통 미술품에 대해 배경 지식이 없다보니 이 글을 쓰면서 배우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듭하면서 안목을 기르고 전통 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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