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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종화 Jan 18. 2019

페르난두 페소아

아르테 출판사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네번째

 <마법 천자문> 시리즈로 유명한 출판사 북이십일은 문학전문 브랜드 [아르테]를 두고 있다. 아르테 출판사는 작년부터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를 펴내기 시작했다. “내 인생의 거장을 만나는 특별한 여행”이라는 콘셉트 아래, 백 명의 국내 작가가 문학, 철학, 예술, 과학에서 활약한 백 명의 거장을 찾아가는 인문기행 프로젝트다. 첫 권이 ‘셰익스피어’인데  문학평론가 황광수가 셰익스피어가 태어난 스트랫퍼드, 활동한 런던, 작품의 무대가 되는 베니스, 덴마크, 아테네 등지를 누비며 셰익스피어의 문학 세계를 소개하는 형식이다. 단순히 작품을 분석하고 저자의 생애를 소개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작가의 생애와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공간을 함께 살펴보며 삶과 사상을 t생생하게 그려낸다. 거장이 활약하던 곳으로 시공간을 뛰어넘어 초대받는 기분이 들었다. 어렵게만 느껴지는 고전의 세계로 손쉽게 들어갈 수 있는 길잡이가 되는 시리즈다.


 한꺼번에 네 권을 구입했는데 그 중에서 <페르난두 페소아>를 제일 먼저 들추었다. 몇 년 전, 배수아 작가가 번역한 <불안의 서(불안의 책)>를 읽었는데 페소아 때문이 아니라 배수아를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상당히 두꺼운 책에는 단상들이 마치 일기처럼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때는 페소아를 읽는다기 보다 배수아가 번역한 문장을 읽는데 더 집중했다. 내용에 대해서 잘 이해도 되지 않았고, 정서에 공감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가끔 페소아의 글이 떠올랐다. 기운이 빠져 있을 때나 울적할 때에 <불안의 서>를 집어들어 아무 곳이나 소리내어 읽어보았다. 그러면 묘하게 마음이 편해지면서 위안이 되었다. 그렇게 페소아에 대한 관심을 키워오다가 이번에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에서 그를 만났다. 이 책을 통해 만난 페소아는 더없이 매력적이었다. 70개가 넘는 이명을 창조해 각각에 생명을 불어넣었고, 잡지 <오르페우>를 창간해 포르투갈 모더니즘 문학을 개척했다. 또, 신비주의에 빠져 괴이한 승려의 자살소동을 돕기도 하고, 물리적 여행을 폄하하는 대신 마음의 여행을 떠난 사람이다. 그의 삶과 공간이 녹아있는 리스본 거리를 돌아보며 다시 만난 그의 작품 세계는 전과 달리 흥미롭게 다가왔다.


 페소아를 처음 알게 된 사람은 아마 나처럼 그의 이명에 대해 커다란 흥미를 가지게 되리라. 이 책의 부제가 <리스본에서 만난 복수(複數)의 화신>이기도 하다. 프랑스 작가 로맹 가리도 다른 이름 에밀 아자르로 쓴 <자기 앞의 생>으로 콩쿠르 상을 수상했다. 이 사실은 그가 죽은 후 유서가 나와서 알려졌다. 이처럼 많은 작가들이 가명으로 글을 쓰기도 했는데 페소아의 이명은 이들과 차원이 다르다. 수십 개의 이명에 제각기 다른 문체와 정체성을 부여했다. 어떤 이명으로 쓴 시를 다른 이명으로 비평하는 글을 잡지에 쓰기도 했다. 그리고 페소아라는 한 인격이 마치 신처럼 다른 이명의 인격을 창조해서 조종하는 형태가 아니라 페소아 본인과 이명이 거의 동등한 수준에 이르기까지 한다. 그의 이명 중 알베르투 카에이루는 페소아와 다른 이명들의 스승이기도 하다. 페소아 본인의 말을 빌면


“나의 경우는 그들(이명)을 어찌나 강렬하게 살았던지 아직까지도 그들을 살고 있어. 그들이 진짜가 아니었다고 깨달으려면 별도의 노력이 필요할 정도로 기억한다네.”


 저자에 따르면 ‘페소아’라는 말이 포르투갈어로 사람을 뜻하고, 이 말의 어원은 ‘페르소나’로 가면을 의미한다. 그가 창조하고 살아간 수많은 이명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너무나 적절하지 않은가? 그런데 페소아의 이명을 알게 되면 의문이 생긴다. 먼저 정신적인 문제는 없었을까? 이거 완전히 정신분열증 혹은 다중인격이 아닌가? 이런 경향이 병인지 아닌지 누구보다 진지하게 돌아본 사람이 바로 페소아 본인이었다. 그는 할머니가 정신질환으로 오래 고생하다 죽은 일을 지켜보고 자신도 그녀의 병을 물려받은게 아닌지 걱정했다. 각종 의학서적, 정신질환 연구서들을 탐독하고 문학에 더욱 몰두했다. 결과로 보면, 페소아는 사회생활을 하며 친구도 만났고, 수많은 글을 썼으며, 연애도 했다. 자신의 이명에 대한 일이 정신질환이 아닐까 의심도 하며 평생 신경을 썼다.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정신질환은 분명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경계에 서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한편, 이명은 페소아에게 창작력의 보고이기도 했다. 1914년과 1915년에 주요 이명들이 대거 탄생했는에 이 시기는 그의 생산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때이기도 하다. 페소아는 모든 것이 되어 모든 것을 느끼고 싶어했을만큼 문학적 이상이 드높았다. 하나의 이름 아래에 묶이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창작 욕구를 이명을 통해 충족할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은 페소아가 당시 포르투갈 문단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향수주의 그룹에 도전하기 위해서 이명을 이용해 자신의 그룹을 만들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이명을 창조해 창작, 비평, 이명으로 살기를 지속한 흔적을 보면 이명을 쓴 목적이 아니라 결과이지 않을까? 여튼, 페소아의 이명은 각기 뚜렷한 개성과 문체와 생애를 가지고 있어 한 이명으로 발표된 작품만을 모아서 읽기도 한다. 


 페소아의 생애에서 특이했던 것 중 하나는 그가 물리적 여행을 매우 싫어했다는 점이다. 그가 <불안의 책>에서 한 말을 보자. 


 “여행은 무엇이고 무슨 소용이 있을까? 모든 석양은 그저 석양일 뿐인데 그것을 보러 콘스탄티노플까지 갈 필요는 없다. 여행을 하면 자유를 느낄 수 있다고? 나는 리스본을 떠나 벤피카(리스본 근처 외곽 도시)에만 가도 자유를 느낀다. 리스본을 떠나 중국까지 간 어느 누구보다 강렬하게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내 안에 자유가 없다면 세상 어디에 가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여행가 추스잉은 자신의 저서에서 비슷하게 말했다. “자신을 모르는 사람은 어디를 여행해도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루하루를 여행하듯 살지 못하는 사람은 깃발을 휘날리며 세계를 일주해도 여행을 오롯이 즐기지 못한다.” 페소아도 추스잉도 여행은 어디로 가는게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나는 요즘 여행을 인생의 구원처럼 여기는게 좋아 보이지 않는다. 여행은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다만 내 경우에는, 워낙 일상에 무심하기 때문에 여행을 가서도 딱히 얻을 게 없으므로 여행에 욕심내지 않을 뿐이다. 미국의 생물학자 데이비드 조지 해스컬은 1평 남짓한 숲속 공간을 몇 년간 관찰하여 <숲에서 우주를 보다> 라는 책을 냈다. 아주 작은 공간에도 몇 년간 매일같이 관찰하면 여행보다 더욱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다. 페소아는 물리적 여행 대신 마음의 여행을 했다. 내면의 여행은 다른 도시와 자연으로의 여행보다 더욱 풍부한 경험과 깨달음을 만들었다. 셰익스피어는 영국 밖을 나갔다는 증거가 없다. 그럼에도 <베니스의 상인>과 <로미오와 줄리엣>, <햄릿>과 같은 불후의 명작을 이탈리아나 덴마크를 배경으로 썼다. 그런즉,


 “삶이란 우리가 삶으로 만드는 것이다. 여행이란 결국 여행자 자신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가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존재다.”


 페소아에 대해서는 아직도 할 이야기가 많지만 그의 작품을 통해서 더 알아가보기로 마음먹었다. <불안의 책>에 나온 말 중 가장 자주 읽게 되는 구절을 소개한다.


 “우리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어떤 사람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생각이다. 이는 우리가 만든 개념이므로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사랑의 전 영역에 걸쳐 적용된다. 성적인 사랑에서 우리는 다른 이의 육체를 매개로 얻는 쾌락을 추구한다. 성적이지 않은 사랑에서는 우리 자신의 생각을 매개로 얻는 쾌락을 추구한다. 자위행위는 비루하지만, 정확히 말해서 자위행위야말로 사랑의 가장 논리적인 표현이다. 아무도 속이지 않고 속지 않는 유일한 사랑인 것이다.”


 누구든 연애하는 상대에게 나를 믿으라고 말한 적 있을 것이다. 사랑은 믿음이라고 믿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사랑은 상대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을 믿는 것이다. 페소아의 글은 이 부분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이제 페소아의 작품 세계로 뛰어들 준비가 되었다. <불안의 책>과 그의 시집 몇 권을 가지고 있다. 술을 마신 다음 날 숙취로 머리가 아프고 우울할 때, 피곤하고 짜증이 날 때,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날 그의 책을 들고 깊은 상념에 빠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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