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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종화 Jan 16. 2019

노만 파킨슨 사진전

2019년 1월 15일 화요일, 모네의 해돋이 그림처럼 하늘이 뿌옇다. 폐포에 미세먼지가 축적되는게 느껴질 정도로 공기가 나빴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대부분은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다. 숨쉬기 고통스러운 날이다. 하늘이 혼탁하니 실내에서 보는 감각의 기쁨을 느껴보기로 마음먹었다. 홍대 상상마당에서 열리고 있는 영국 사진가 노만 파킨슨(1913~1990) 전시가 곧 끝난다고 해서 밤이 아닌 한낮에 홍대 앞으로 갔다. 홍대에서 약속을 잡을 때, 상상마당을 많이 언급했는데 그 안에 들어가기는 처음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갔다. 평일 낮이라 관람객이 별로 없이 조용했다. 휴가 내고 평일에 온 보람이 있다. 


 패션 사진 전시는 전에 두어번 본 적 있다. 2016년에 대림미술관에서 [닉 나이트 사진전]을 보았고, 2017년에는 예술의 전당에서 [보그 라이크 어 페인팅 사진전]을 관람했다. 닉 나이트의 사진은 패션 사진이 보여줄 수 있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미감의 극치였다. 보그 전시는 유명한 그림과 닮은 구도로 찍은 패션 사진을 원화 복제품과 함께 전시했는데 사진과 그림의 차이를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두 번의 사진전을 다 즐겁게 본 덕에 ‘노만 파킨슨’을 잘 모르지만 평일 휴가 보내기에 부족하지 않으리라 여겼다.


 노만 파킨슨은 런던 태생으로 18세부터 사진 경력을 시작했다. 1934년, 21살 때 개인 스튜디오를 차렸고, 1935년부터 약 5년 동안 <하퍼스 바자> 영국판 화보촬영을 맡았다. <하퍼스 바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미국의 패션지다. 이 시기 노만 파킨슨은 미국 사진가 “마틴 문카치”의 영향을 받아 실내 스튜디오에서 벗어나 바깥에서 실제로 움직이는 신체를 담았다. 당시에는 초상화나 그리스-로마 조각을 흉내낸 정적인 자세를 한 모델을 찍는 시기였다. 


photo by Martin Munkacsi(마틴 문카치, 헝가리의 사진가) 1930, <탕가니카 호수의 세 소년>, 탕가니카 호수를 향해 발가벗은 아이들이 뛰어드는 모습을 역광으로 찍은 사진.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이 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았으며 평생 이 사진에 빚을 지고 있다 생각했다. 흑백에 역광이지만 아이들의 몸짓과 파도가 어우러져 삶의 역동성이 강하게 느껴진다. 마틴 문카치가 누군가 찾다가 본 사진인데 원초적 에너지가 가득해 보는 사람에게 활력을 준다. 



 노만 파킨슨이 찍은 사진도 보자. 




위에서 보듯이 모델이 들판에서 골프를 하는 장면, 바다에서 뱃놀이를 하는 장면 등 일상적 공간에서 여성 모델의 모습을 담았다. 그는 액션 리얼리즘(action realism)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장본인으로 “나의 여자들 이렇게 하죠 : 뛰기도 하고, 벽으로 점프도 해요”라는 말을 남겼다. 지금도 여전히 사회는 여성의 모습을 규제하는 경향이 있는데 여성 참정권조차 없던 시기 영국에서 이런 사진을 찍는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지 싶다. 아무리봐도 스튜디오에서 증명사진처럼 각잡고 찍은 사진보다 이 사진들이 훨씬 생동감이 넘친다. 패션이 실내에서 앉아 있을 때만 필요한게 아니니 이렇게 실제 움직이는 상황을 찍는게 패션 잡지 사진의 기능에도 더 알맞다. 



 노만 파킨슨은 194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보그>에서 활동했다. 서구는 2차 대전이 끝나고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 유래없는 호황을 누렸다. 항공산업이 발달하여 인도, 동남아시아와 같은 먼 곳으로 이전보다 손쉽게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파킨슨은 이같은 흐름을 타고 이국적인 풍경을 배경으로 멋진 사진을 찍었다. 



 지금이야 이런 이국적인 풍경을 배경으로 하는 패션 사진이 넘쳐 흐르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단다. 이 사진들은 인도가 배경이다. 이국적 배경과 모델이 서로를 돋보이게 한다. 백인 여성 모델과 그녀가 입고 있는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옷이 오리엔탈리즘을 돋보이게 한다. 그때 이국적인 자연을 낯설게 느끼는 사람에게는 커다란 감흥을 주지 않았을까? 지금 관점으로 보면 조금 촌스럽게 혹은 익숙하게 느껴지는데 파킨슨이 이런 양식의 사진을 널리 유행시켰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위 두 사진은 이집트에서 찍었는데 인도에서 찍은 사진보다 훨씬 좋다. 스핑크스 하면 사막 한 가운데 뜨겁게 있는 느낌인데 차가운 블루 톤이 색다른 인상을 준다. 스핑크스의 눈동자도 차갑게 느껴진다. 입술은 냉소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도보다 이집트가 유럽 문화권에서 더 친숙해서일까. 오리엔탈리즘의 혐의가 덜하다. 아래 말달리는 사진은 정말 좋았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이미지인데 그래도 자꾸 눈길이 갔다. 남성으로서 여자 모델의 아름다운 몸에 끌린걸까? 그보다는 모델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는 거대한 해방감에 사로잡혔다. 모델의 표정연기가 여우주연상 뺨칠 정도거나 아니면 그녀가 실제로 환희를 느낀게 아닐까? 나는 후자라고 생각하고 싶다.



오른쪽 사진은 예전에 보았던 타마라 렘피카의 그림을 떠올리게 했다. 차갑고 도도하며 아름다운 여성, 그러나 그녀는 단순히 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인생을 주도하며 살아간다. 웬만한 남자도 몰기 어려운 스포츠카나 항공기를 몰 능력도 있다. 자신감이 하늘을 찌를듯하다. 기계 문명 아래에 살아가는 사람은 차가워야만 할지 의문이지만 멋진 구도긴 하다. 


 왼쪽 사진은 구 소련, 소비에트 동상 옆에서 찍었다. 냉전 시대에 러시아까지 가서 이런 사진을 찍다니! 해외 로케이션의 끝판왕이 아닐까? 솔직히 이 사진은 단순한 시각적 아름다움보다 사회적 배경에 더 의미를 둘 수밖에 없다. 소비에트, 즉 소련 체제를 상징하는 여성 동상 옆에서 미국인 여성 모델이 붉은 천을 치켜 들고 있다. 아마 소련 관계자가 이 촬영을 지켜봤을텐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하다. 그리고 파킨슨은 무엇을 노렸을까? 정치의 미학화일까, 미학의 정치화일까? 사회주의 특유의 팔을 길게 뻗은 동상과 수영복을 입고 가슴을 활짝 펴고 팔을 높이 치켜든 모델이 닮았다. 동상의 딱딱함과 모델의 생동감이 대비되며 크기도 이 대비감에 한몫한다. 



이 두 사진의 모델은 네나 폰 슐레부르그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피튀기는 복수극 영화 “킬 빌” 여주인공을 맡은 우마 서먼의 어머니다. 노만 파킨슨의 뮤즈 중 하나로 많은 사진에 등장한다. 그녀의 이미지는 우아하다. 천진하게 분수 사이를 뛰어놀아도, 멋진 빨간 차 본넷에 기대어 담배를 피워도 기품이 넘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귀족 출신이라 그런가. 오드리 헵번이 살짝 떠오르기도 한다. 


 귀족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노만 파킨슨은 영국 왕실 전속 사진가이기도 했다. 이번 전시에도 몇 작품 나왔는데 나는 앤 공주의 사진이 좋았다. 그녀의 사진을 커튼이 쳐진 창으로 보는듯 꾸며 놓았는데 공주의 사생활을 살짝 엿보는 듯한 컨셉이라고 했다. 나름 좌파라 자처하는데도 영국 공주의 사진을 그렇게 보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전시를 둘러보면서 모델이 누구인지도 살펴보는데 귀족 여성이 제법 있었다. 전문 모델은 아닐텐데 모델 뺨치게 자연스럽고 어울렸다. 태생부터 고귀(?)하고 주목받는 인생을 살아서일까? 아니면 그만큼 노만 파킨슨이 뛰어난 사진가이기 때문일까? 아마 둘 다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의 분위기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흑백 사진 모델은 리즈 공작부인, 해변에서 말과 함께 있는 모델은 페리아 공작부인이다. 전문 모델이라 해도 좋을 외모, 신체조건, 담대함을 다 갖추었다. 속물인 내 눈에는 웬지 아우라도 느껴질 정도다. 



소말리아계 미국인 모델 이만과 그녀의 남편 데이빗 보위다. 둘 다 파킨슨 작품이다. 이만은 소말리아 상류층 출신으로 5개 국어에 능통할 정도로 재원이다. 피부톤이 어두운 여성을 위한 화장품 브랜드 이만의 대표이기도 하다. 보위와 1992년 결혼했으며 그가 사망하기 전까지 화목하게 잘 살았다. 


 노만 파킨슨이 활동을 시작한 때가 1930년대인데 거의 100년 전이다. 그럼에도 지금 패션 잡지에 실어도 어색하지 않을만큼 시대를 초월한 뛰어난 감각을 자랑했다. 그는 1990년 싱가포르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는데 로케이션 작업 중이었다. 노년에도 열정을 불태운 사람이다. 60년에 걸쳐 최정상에 군림한 사진가는 그 말고 다시 나오기 힘들거라 한다. 이전에 보았던 다른 패션 사진 전시에 비해 황홀한 아름다움이나 화려한 시각적 효과는 덜했다. 그러나 패션 사진의 고전을 본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자연스러운 활동이 자아내는 역동적인 신체를 담은 사진과 그냥 지나치기 어렵게 선정한 풍광이 인상깊다. 


 불과 3,4년 전만 해도 사진을 전시회까지 가서 볼 필요가 있을까 여겼다. 복제품에 지나지 않고 인터넷으로 얼마든지 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전시라는 기획과 전시실이라는 공간에서 보는 일은 확실히 다르다. 모니터가 아닌 고화질로 인화된 사진을 눈으로 직접 보며 얻는 감각은 좀 더 직접적이다. 주제별로 작품을 모아 배치하고 때로는 컨셉에 맞추어 조명과 소품을 활용해 보는 행위에 다양한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다. 얼마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본 사진전 <문명>을 보고 사진이 지금 현재를 보는 특정한 관점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지 깨달았다. 패션 사진이 단순히 시각적 쾌감에만 호소하지 않는다. 시대를 읽는 창으로도 기능한다는 사실을 깨우친다. 물론 다른 장르가 그쪽으로는 훨씬 효율적이지만 시각이 주는 아름다운 쾌감과 함께라면 아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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