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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종화 Jan 13. 2019

나쓰메 소세키 <도련님>

가라타니 고진 <세계사의 구조>에 비추어

‘도련님’이라는 제목은 선입견을 준다. 이 말은 귀하게 자라 세상을 모르는 철없고 순진한 사람을 떠올리게 만든다. 악의는 없으나, 오히려 선의가 더 크지만, 세태에 어두워 주변에 민폐를 끼친다. 그럼에도 순수함 덕분에 주위 사람의 사랑을 받기도 한다. 나쓰메 소세키의 두 번째 소설 <도련님>에 나올 이 ‘도련님’도 아마 비슷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어릴 때부터 악동으로 자랐고 커서는 고집불통에 중학교 교사가 되어 학생보다 더한 골통이 아닌가? 좌충우돌 하면서 성장하기도 않고 처음 그대로 머문다. 유쾌한 성장소설처럼 이야기가 좌충우돌 흘러가는데 ‘도련님’은 변화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고집을 더욱 굳게 지킨다. 주인공을 ‘도련님’으로 부르는 사람은 늙은 하녀 기요 말고는 없는데 어째서 ‘사고뭉치’나 ‘망나니’가 아니라 ‘도련님’일까?


 일본의 메이지 시대는 1867년~1912년에 걸쳐 있다. 나쓰메 소세키가 1867년에 태어나 1916년에 죽었으니 그의 생애는 메이지 시대와 거의 일치한다.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이들은 에도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 중심으로 국가를 개편해 전면적으로 개국을 추진했다. 이 시기 일본은 서구 문물이 물밀듯이 몰려와 본격적으로 근대화 바람이 불었다. 시대가 급격하게 바뀔 때는 필연적으로 전통이 몰락한다. 사람들은 전통대신 새로운 가치관을 맞이하지만 정수를 익히지 못하고 겉모습만 흉내낸다. 세상이 혼란해 앞날을 예측하기 어려우니 사람들은 물질적인 부와 권력에 의존해 살 길을 도모한다.


 ‘도련님’은 이런 세태에 한 발 물러서 있다. 공부를 해서 출세하는 길도, 장사를 벌여 돈을 버는 삶도 원하지 않는다. 권력에 아부하거나 물욕에 빠져 거짓말을 해서라도 돈을 모으려는 사람과 거리를 둔다. 그러나 그런 이들이 자신의 삶에 개입하면 적극적으로 방어하고 몰아낸다. 다른 사람 시선에는 천지분간 못하고 제멋대로 설쳐대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도련님’에 대한 통념처럼 순진하고 부드러운 성격이 아니고, 세상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단지 물질적 이익만을 탐하는 세태에 동참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것이 일반적인 ‘도련님’과 가지는 공통점이다. 소세키는 ‘도련님’이 아닌 ‘도련님’을 내세워 근대화 물결에 침식당해 사라져가는 인간미를 안타까워한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가라타니 고진의 책 <세계사의 구조>가 떠올랐다. 고진은 이 책에서 세계사를 생산양식이 아니라 교환양식을 중심으로 재구성했다. 교환양식 A는 증여-답례가 순환고리를 이루는 호수(서로 주고 받음)이다. 지금도 남아 있는데 가까운 사이에 주고 받는 선물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국가가 탄생하기 이전 인류가 소규모 공동체를 이루어 살 때 지배적인 교환양식이다. 교환양식 B는 주로 국가에서 일어나는데 세금을 걷어 다시 재분배하는 일을 떠올리면 된다. 또는 과거 거대한 제국이 자신의 영향력 아래 있는 집단에게 조공이나 세금을 받고 그대신 보호해주는 관계다. 교환양식 C는 자본주의에서 계약을 통해 거래하는 양식이다. 고진은 이런 교환양식의 변화와 생성을 중심으로 세계사의 구조를 분석했다. 그런데 교환양식 B는 권력과 지배를 낳고, 교환양식 C는 계급분열을 초래한다. 고진은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는 교환양식 D를 상정하는데, 과거 그대로가 아닌 고차원적으로 회복된 교환양식 A를 의미한다.


 ‘도련님’은 은연중에 권력(교환양식 B)과 부(교환양식 C)를 거부한다. 대신 자기에게 조건없이 사랑을 베푸는 기요를 소중히 생각한다. 책에 보면 그가 기요에게 빌린 돈 3엔을 갚지 않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기요에게 3엔을 빌렸다. 그 3엔은 5년이 지난 지금까지 갚지 않았다. 갚을 수 없었던 게 아니라 갚지 않은 것이다. 기요는 조만간 갚겠지 하며 내 주머니 사정을 헤아려보거나 하지 않는다. 나도 곧 갚아야지 하면서 마치 남처럼 의리를 내세우지는 않을 생각이다. 내가 그런 걱정을 하면 할수록 기요의 마음을 의심하는 일이 되어 기요의 아름다운 마음에 먹칠을 하는 것과 같아진다. 돈을 갚지 않는 것은 기요를 무시해서가 아니다. 기요를 나의 일부분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비록 빙수든 감로차든 남에게 신세를 지고도 가만히 있는 것은, 상대를 어엿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고 그 사람에 대한 후의에서 나오는 것이다. 내 몫을 내면 그뿐인 것을 마음속으로 고맙게 여기는 것은 돈으로 살 수 없는 보답이다. 아무런 지위가 없다 해도 나는 한 사람의 독립된 인간이다. 독립된 인간이 머리를 숙이는 것은 백만 냥보다 소중한 감사라고 생각해야 한다.”


 교환양식 C가 지배적인 요즘이라면, 돈을 갚지 않기 위해 시답잖은 핑계를 댄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교환양식 A에 비추어 보면 그렇지 않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순환하는 증여의 구조에서 먼저 받고 다시 주지 않는 일은 커다란 빚이다. 과거에 빚은 채무자를 노예로 만들어 쇠고랑을 차게 만들기도 했다. 그만큼 마음의 빚은 엄청난 무게를 지닌다. ‘도련님’은 자청해서 그 무게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책에 나온 ‘도련님’과 기요의 관계가 고진이 상정한 교환양식 D라고 할 수는 없다. “‘도련님’의 시대”는 아직 교환양식 C가 활짝 꽃피운 시기도 아니다. 그래서 나는 ‘도련님’이 유약한 성격이 아님에도 시대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는 이유를 이해한다. 이 변화는 이제 막 시작했고 앞으로 긴 시간에 걸쳐 세상을 바꿀 예정이다. 여기에 저항하는 일은 가능하지도 않고 오히려 더 큰 슬픔과 고통을 가져올 뿐이다. 그러므로 ‘도련님’은 그저 세상의 흐름에서 한 발 떨어져 있기만 한다. 기요와 함께.


  그러고 보니, 19세기 사실주의 소설 주인공과 소세키의 ‘도련님’은 인물의 지향점이 완전히 다르다. 스탕달이나 발자크의 소설 주인공은 출세와 성공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든다. 누군가가 그런 모습을 “사랑과 야망”이라고 표현했다. 그에 반해 ‘도련님’은 변화에 몸을 담지 않고 물러선다. 나는 이 모습은 “허무와 패배”라고 말하겠다. 근대화를 자력으로 이끈 서유럽과 거대한 힘에 굴복해 근대화를 이식한 일본의 차이가 아닐까? 그렇다면 이 일본이 우겨 넣은 근대화를 맞은 우리의 모습은 문학에서 어떻게 나타났을까? 알아보고 싶은 주제다. 한국과 일본이 서양 과학을 받아들인 역사에 관한 책을 읽었다. 근대화의 정수는 과학 기술 자체가 아니라 이런 과학 기술을 낳은 사고방식에 있다. 일본이나 우리나 그 정수를 늦게 알았다. 일본의 과학은 철저하게 자본과 국가에 종속되어 수단으로만 활용되었다. 하물며 일본에 의해 두 번이나 꼬인 근대를 수용한 우리 모습이 어떨까? 이런 세태가 문학에서 어떻게 나타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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