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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종화 Jan 12. 2019

<리비우스 로마사>

1-5권

 <리비우스 로마사>는 티투스 리비우스(기원전 59~기원후 17)가 로마의 건국(기원전 753)부터 로마 제국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있었던 드루수스의 사망(기원전 9년)까지 다룬 역사책이다. 10권씩 한 단위 묶음으로 구성되었는데 140권에 달하는 대작이다. 현재 140권이 다 전해지지 않고 1-10권, 21-45권만 남아있다. 마키아벨리는 첫 10권을 다룬 <로마사 논고>를 썼다. 이번에 이 책을 읽은 이유 중 하나가 <로마사 논고>를 읽을 때 이해를 돕기 위해서다. 고대 로마의 역사에 관한한 현존하는 최고, 최선의 역사서로 현재 남아 있는 35권은 고대 로마의 역사를 다룬다면 반드시 참조해야 할 일차사료로 쓰인다고 한다. 이처럼 서양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책인데 놀랍게도 이번에 처음 한글로 번역되었다. 일차로 1-5권까지 한 권으로 나왔고 앞으로 계속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1-5권은 로마의 건국과 왕정시대, 오만왕 타르퀴니우스의 아들 섹스투스가 루크레티아를 겁탈한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을 수립한 사건, 로마가 주변 라틴계 도시와 에트루리아 도시들과 패권을 다투는 과정, 농지법을 둘러싸고 평민과 귀족이 대립하는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이어지는 6-10권에서는 로마가 이탈리아 전역을 제패하는 과정이 자세하게 나온다. 개인적으로 무척 재미있게 읽었고 생각할 거리도 많았다. 책을 읽고 리비우스의 역사관, 인상적인 사건, 그리고 특징을 정리해보았다.


1. 리비우스의 역사관과 로마사를 서술한 태도


 (1) 리비우스는 로마 제정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기원전 63~기원후 14)와 동시대를 살았다. 그가 젊은 시절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내전(기원전 49), 옥타비아누스(훗날 아우구스투스)와 안토니우스의 내전(기원전 42~)이 있었다. 그는 당대 로마에서 가장 뛰어난 문인이었던 키케로 문하에서 공부했다. 키케로는 쓰러져가는 로마 공화정을 수호하려 애썼다. 그의 최후가 로마 공화정의 종말을 상징할 정도였다. 리비우스 또한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가 


“제국 시민들의 힘이 제국의 멸망을 촉진하기 시작한 오늘날”


이라 평가하며 부정적으로 보았다. 그가 보기에 고대 로마의 번영을 이끈 힘은 자유를 열망하는 공화제 정신과 이익을 탐하지 않고 공평무사하게 공직을 수행했던 부패하지 않은 지도자들에 있었다. 그래서 이탈리아와 지중해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다. 그런데 로마가 강대해질수록 부와 권력에 취한 로마인들은 점점 부패했다. 리비우스 당대는 유력 장군들이 개인적 이익에 따라 전쟁을 벌였고, 내전도 서슴지 않았다. 리비우스는 당대 사람들이 자신이 저술한 로마사를 이런 관점에서 보기를 권했다.


 “우리의 조상이 어떤 삶을 살았고, 그들이 어떤 사람이었으며, 로마의 권력이 처음 획득되어 그 후 계속 확장되어나가는 과정에서 어떤 정치와 전쟁의 수단을 사용했는지 등을 좀 더 진지하게 고려해 보기를 촉구한다. 그런 다음 우리나라의 도덕적 쇠퇴의 과정을 살펴보기를 권한다.”


 리비우스는 로마가 얼마나 타락하고 부패했는지 이렇게 표현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악덕을 견디지도 못하고 또 그 악덕을 치료하는데 필요한 조치를 해낼 용기도 없다.” 


 아우구스투스가 제정을 수립해 점차 안정시키고 있던 상황이었다. 공화정으로 돌아갈 전망이 보이지 않았다. 검소하고 순박한 로마의 선조들과 달리 후대는 탐욕과 자만심에 빠졌다. 사람들이, 마키아벨리 식으로 말하면 원료가, 부패했기 때문이다. 리비우스가 역사와 현실을 보는 관점이 이렇다면 초창기 로마 공화정 시대를 매우 높게 평가하는게 당연하다. 마키아벨리 또한 리비우스의 역사관을 거의 그대로 계승했다. 그러면 왜 공화주의자인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군주의 덕을 다루었을까? 그는 당시 이탈리아 정세가 극도로 혼란해서 일종의 ‘예외상태’, 곧 ‘비상사태’라고 보았다. 그런 상황을 강한 군주가 수습해 새로운 질서인 이탈리아 통일을 이루기 원했다. 혼란 속에서 질서를 세우려면 평상시 수단으로는 어렵다. 그래서 그토록 악명 높은 내용이 가득한 <군주론>을 저술한 것이다. 


 (2) 한편, 리비우스의 시대에도 로마의 건국이나 공화정이 성립한 때(기원전 509)는 까마득한 옛날이었다. 로마의 건국 이야기는 우리의 단군 이야기처럼 신화의 영역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이번 번역본 말미에 나오는 갈리아 족의 로마 점령(기원전 390) 때, 많은 기록이 불타 없어지기도 했다. 리비우스는 부족한 사료를 상상력으로 대신했다. 


 “나는 아주 오래전 고대의 사건들이 진실과 비슷하게 보인다면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만족하겠다.”


 그런즉, 이 책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들이 실제 있었던 사건이나 대화라고 볼 수 없다. 역사적 흐름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면 다른 지역의 고사를 비슷하게 가공해 끌어오기도 하고 신화적인 이야기도 포함시켰다. 덕분에 리비우스의 로마사는 문학의 향기가 진하게 넘친다. 덕분에 마치 소설처럼 흥미롭게 읽었다. 특히, 역사적 인물이 주요 고비에서 발언하는 연설을 읽을 때마다 감탄했다. 적절한 비유와 설득력 높은 논리 전개는 수천 년 후의 독자마저도 빠져들게 만들었다. 역사 속 인물들이 지금 내 옆에서 살아 숨쉬며 열변을 토하고, 논쟁하고 있는 듯 생생했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는 신화를 현실에서 있을법한 이야기로 바꾸어 제시하기도 한다. 로물루스의 탄생과 성장 이야기가 그 예다. 전승에 따르면 바구니에 담겨 버려진 로물루스와 레무스 쌍둥이를 늑대가 거두어 젖을 주며 키웠다. 리비우스는 이 전승에 대해 쌍둥이를 거두어 기른 여성이 ‘늑대’로 불렸다는 다른 이야기도 소개했다. 


2. 공화정 초창기 로마인들이 보여준 공평무사하고 용감한 기상


(1) 오만왕 타르퀴니우스의 아들 섹스투스가 콜라티누스의 아내 루크레티아를 강간했다. 루크레티아는 남편과 아버지에게 복수를 호소하며 자결한다. 이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왕정이 몰락한다. 이를 주도한 사람은 왕의 여동생의 아들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였다. 왕정이 몰락하고 첫번째 집정관으로 브루투스가 뽑혔는데 왕정 복귀를 모의하는 음모에 그의 두 아들이 연루되었다. 브루투스는 자신의 아들들을 처형하라 명령을 내렸고 처형은 집행되었다. 


(2) 오만왕 타르퀴니우스가 클루시움 왕 포르세나의 도움을 받아 로마를 침공(기원전 507)했다. 로마인들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평민들이 죽음을 두려워해 차라리 노예가 될지라도 평화를 주장할지 몰랐다. 원로원은 평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식량을 제공하고, 관세와 세금을 면제했다. 손실은 부자들이 떠맡았다. 도시는 일치단결하여 침공에 맞섰다. 


(3) 귀족과 평민들이 농지법과 관직에 출마할 권리를 두고 대치했다. 두 계급은 타협책으로 집정관의 권한을 지니고 평민과 귀족 모두 선거에 나설 수 있는 “집정관금 정무관” 직을 새로 만들었다(기원전 445). 선거가 시작되었고 후보자들은 유세를 펼쳤다. 리비우스는 선거 결과를 두고 이렇게 평했다.


       “자기 자유와 특권을 위해 싸운 투사들은 계급 갈등이 끝나고 투표권을 행사할 때가 닥쳐오자 격정이 사라져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선출된 후보자 세 명이 모두 귀족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평민은 그와 같은 공직에 출마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이 일에서 로마 평민 계급이 보여준 품위 있는 정서, 공정함, 관대함은 안타깝게도 오늘날에는 단 한 사람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다.”


 (2)와 (3)의 사례는 공화정 초기 로마 귀족과 평민이 격렬하게 대립하면서도 국가를 위해 계급의 이익마저 포기한 일이다. 리비우스는 이를 통해 로마인들이 얼마나 애국심이 강했는지 보여줬다. 이 두 사건에 대해 마키아벨리도 극찬했다.  


(4)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킨키나투스의 아들 카이소 퀸크티우스는 평민과 대립하는 귀족 세력의 선두에 서는 바람에 호민관에게 고발당하고 로마를 떠나 에트루리아로 망명했다. 막대한 보석금을 지불한 킨키나투스는 조용히 시골에서 작은 오두막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로마가 아이퀴 인과 전쟁 도중, 집정관과 휘하 부대가 적에게 포위되는 위중한 상황이 발생한다. 킨키나투스는 독재관으로 임명(기원전 458)된다. 밭을 갈다가 독재관이 된 그는 즉시 군을 이끌고 아이퀴 인을 물리친다. 원래 독재관은 6개월 한정이지만 킨키나투스는 임무를 다하고 15일만에 사임한다. 그리고 다시 농사일로 돌아간다. 리비우스의 표현을 보자.


 “나는 이제 돈이 이 세상에서 최고이고 지위와 능력은 돈과 불가분의 관계라고 믿는 많은 사람들에게 특별한 주의를 환기시키고 싶다. 로마 시민들이 국가의 존망에 처하여 유일하게 희망을 걸었던 청빈한 사람인 킨키나투스를 보라. 그는 당시 티베르 강의 서쪽에 있는 자그마한 3 에이커 농장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아들이 평민과 대립해 로마에서 추방당하고 막대한 벌금을 물어 가난하게 살게 되어도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자 막중한 역할을 맡아 임무를 성공리에 수행했다. 독재관은 항소권을 허용하지 않는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자리지만 국가의 어려움이 해소되자 미련없이 자리를 내려놓았다. 훗날 술라나 카이사르는 자신을 종신 독재관으로 임명해 권력을 장악했다. 리비우스가 킨키나투스를 높이 평가한 이유는 자신의 시대와 너무 대비되기 때문이다.


 역자 해설을 보면 지금 미국 신시내티(Cincinnati)가 바로 킨키나투스(Cincinnatus)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5)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는 독재관으로 활약해 오래동안 전쟁 상대였던 베이이를 함락(기원전 396)시키는 등 엄청난 군공을 세웠다. 집정관이 되어 팔레리이를 공략할 때, 그곳의 명문가 자제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아이들을 이끌고 카밀루스에게 왔다. 이들을 활용하면 손쉽게 도시를 함락할 수 있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카밀루스는 제안을 거절하고 교사의 옷을 벗기고 포박해 아이들이 그를 때리며 팔레리이로 돌아가게 했다. 팔레리이 시민들은 사정을 알고 카밀루스의 고결한 인품을 칭송했고 이런 인물을 배출한 로마의 지배아래 스스로 들어가겠다고 자청했다. 


 화려한 군공을 세운 카밀루스이지만 평민과 귀족의 분쟁에 휘말려 아르데나로 망명하게 된다. 이때 갈리아 족이 로마를 점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기원전 390) 그는 로마에서 쫓겨났음에도 애국심을 잃지 않았다. 독재관으로 임명되어 패잔병을 모아 로마로 돌아가 갈리아 족을 물리친다. 


 킨키나투스처럼 카밀루스도 억울할만한 일을 겪었다. 그럼에도 로마가 위기에 처하자 두말않고 달려가 위급한 사태를 다스렸다. 역자의 말처럼 선공후사(先功後私)의 정수가 아닐 수 없다. 부와 권력을 위해 수많은 로마인을 희생시키는 내전도 불사한 리비우스 당대의 장군들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귀족과 평민이 각기 국가를 위해 양보하는 미덕과 선공후사에 투철한 뛰어난 인물들 덕에 로마 공화국은 번영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큰 문제가 있었다. 



3. 귀족과 평민의 대립


(1) 이 책에서 가장 눈여겨 봐야 할 내용은 평민과 귀족의 투쟁이다. 두 계급간의 적대감은 공화정 초기부터 생겨났으며 로마가 이웃 도시를 정복하며 팽창할수록 커져갔다. 로마 시민은 평상시에는 생업(주로 농업)에 종사하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징집되어 병사가 되었다. 로마가 강성해질수록 전쟁은 늘어났다. 동시에 여려 군데에서 군사작전을 펼쳐야 할 때도 있었다. 귀족이나 부유층은 자리를 비워도 노예가 대신 노동할 수 있지만 평민의 경우 농사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젊은 남자가 없으면 매우 곤란했다. 전쟁에서 돌아오면 빚을 지고 땅을 잃고 무산자로 전락하는 일이 늘어났다. 반면, 귀족 계급은 이런 평민의 땅을 사들이고, 돈놀이를 하며, 정복으로 확장된 영토를 독점하여 부가 늘어났다. 평민 계급의 불만과 분노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평민들은 마침내 폭발하여 징집을 거부하는 방법으로 저항을 시작했다. 원로원은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뉘었고 온건파 행정관이 평민들의 빚을 탕감하는 정책을 제안했다. 평민들은 징집을 받아들이고 전투에 나갔다. 그러나 전투가 끝나면 강경파가 득세해 이런저런 핑계로 빚을 없앤다는 정책 실행을 미루기만 했다. 


(2) 이런 상황이 몇 차레 일어나자 평민들은 더이상 참을 수 없었다. 기원전 494년, 병사들은 군무를 이탈하여 평민들과 함께 ‘성스러운 산’으로 몰려갔다. 원로원도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평민 대표와 협상하여 ‘호민관’ 관직을 신설했다. 이 직위는 신성했다. 만약 누구라도 호민관에게 위해를 가하면 그는 ‘호모 사케르’가 되었다. 호모 사케르는 누가 그를 죽여도 처벌받지 않고,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할 수도 없었다. 호민관은 평민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다. 명목상 주어진 권한은 막대했다. 나중에 아우구스투스는 군단 지휘권과 종신 호민관 직위 두 가지만 가지고 황제로 군림했다. 그러나 호민관은 최대 10명까지 뽑혔기 때문에 그들 중 일부는 원로원의 영향 아래 있어 상호 견제가 가능했다. 


(3) 기원전 486년, 집정관 스푸리우스 카시우스가 농지법을 제출했다. 이 법은 두 가지 중요한 내용을 포함했다. 하나는 시민들이 일정한 단위 이상의 토지를 소유할 수 없다는 조항이다. 다른 하나는 새로 획득한 영토를 시민들에게 분배한다는 조항이다. 이 둘은 귀족의 이익에 심각한 위해를 가했다. 귀족은 법이 규정한 단위 이상의 땅을 가졌으므로 초과한 땅을 내놓아야 하고, 적에게 얻은 영토를 평민에게 나누어 주면 더 부유해지는 기회를 잃기 때문이다. 이 제안은 귀족의 분노를 샀다. 또, 평민들도 반대했다. 로마 시민 뿐만 아니라 동맹국 사람에게도 땅을 나누어 주어서 이들의 환심을 사 왕이 되려는 시도가 아닌가 의심했기 때문이다. 결국 카시우스는 임기가 끝난 후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4) 이 농지법은 이후에도 귀족과 평민의 다툼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다. 평민은 이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파업과 군무이탈을 벌였으며, 귀족은 이를 막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이처럼 이 법이 거론될 때마다 심각한 갈등이 빚어졌다. 훗날 포에니 전쟁 이후, 그라쿠스 형제가 호민관으로 이 법안을 제출했는데 둘 다 살해당했다. 호민관이 신성한 직위임에도 그런 사태가 일어났다. 결국, 이 법안을 둘러싼 갈등이 로마 공화적 몰락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5) 리비우스는 평민과 귀족의 대립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책을 읽으면 그가 귀족의 주장에 조금 기울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평민들의 군무 이탈이나 전투에서 벌인 태업을 비판적으로 보았다. 또, 책을 보면 주로 귀족이 갈등을 해소하는 역할을 맡았다. 아마 공화정 말기 군사 독재를 한 마리우스나 카이사르가 평민파였기 때문에 그러지 않았을까? 그러나 리비우스가 일방적으로 귀족의 손을 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중도적 입장이다. 그런데 공화정 초기에 일어난 계급 갈등을 리비우스가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가 제국이 되어가면서 일어난 갈등은 심각했고 결국 공화정의 몰락과 제정 성립으로 이어졌다. 반면에 공화정 초기에 벌어진 정치적 갈등과 대립은 오히려 로마에 활력을 더했다.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토론과 제안이 이어져 호민관, 집정관급 정무관, 독재관, 항소권, 공소권과 같은 법률이 만들어졌다. 극심한 갈등을 봉합하려는 노력이 성문법의 기원이 된 로마법을 낳았다. 탄탄한 제도와 법률은 로마가 강성해지는 원동력이 되었다. 또, 그 시대에 계급 간 갈등이 표출된다는 자체가 대단하다. 자유는 필연적으로 이해관계의 대립을 낳는다. 로마는 이 갈등을 대체로 성숙하게 다루었다. 자유와 공화제를 누릴 만하다. 



4. <리비우스 로마사>를 읽는 내내 고대 로마인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주위 세력과 끝없이 벌이는 전쟁과 이 와중에도 일어나는 계급투쟁은 로마에 수많은 위기를 가져왔다. 그때마다 로마인들은 적절한 인물을 지도자로 세웠고, 조금씩 양보해 타협하며 국가를 수호했다. 지중해 세계를 제패한 제정 로마인들이 당대보다 과거를 더욱 영광스럽게 기억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앞으로 남은 부분도 빨리 번역되어 나오길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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