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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종화 Feb 21. 2019

인간의 본능

인간은 왜 자유의지를 갖도록 진화했는가

1. 들어가며


이 책의 제목은 <인간의 본능>이다. 본능이라 하면 대개 성욕이나 식욕처럼 개체 보존 및 종족 번식을 위해 유전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질을 말한다. 그런데 부제가 “인간은 왜 자유의지를 갖도록 진화했는가” 이다. ‘자유의지’가 본능이라고? 자유의지는 현재 과학과 철학 양 쪽에서 골치 아픈 문제다. 자유의지가 있는지 없는지, 있다면 도대체 무엇인지 규명하는 일은 역사적으로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더 나아가면 정신과 육체의 문제, 의식과 자아의 문제와 연관된다. 현재까지 자유의지를 증명하는 확실한 증거나 유력한 이론이 제시되지 않았다. 그런데 저자는 어째서 자유의지가 인간의 본능이라고 말하는 걸까?


 저자 케네스 밀러는 미국 브라운 대학의 생물학 교수다. 그는 카톨릭을 믿는다. 종교가 있지만 과학적 사고방식과 증거에 따라 진화론을 지지하며 지적 설계론을 비롯한 창조 과학에 반대한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지적 설계론을 학교에서 가르치려 한 적이 있다. 2005년, 아홉 명의 학부모가 이에 반대하여 ‘키츠밀러 대 도버’ 재판이 열렸다. 밀러 교수는 지적 설계론을 가르치는 데 반대하는 원고 측 증인으로 나섰다. 재판에서 지적 설계론은 과학이 아니라 종교이며, 이를 학교에서 가르치면 정교 분리를 천명한 헌법에 위반된다는 판결이 나왔다. 이처럼 저자는 지구에 있는 모든 생명체가 자연선택에 따른 ‘진화’를 통해 형성되었다는 견해를 받아들인다. 그런데 그는 카톨릭 신자로서, 진화론에서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몇 가지 결론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진화론을 불편하게 여기는 이유도 이해한다. 수많은 과학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진화론 대신 창조과학 혹은 지적 설계론을 믿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그럴 만한 이유를 갖고 있다. 



2. 진화론을 부정하는 사람들


 이 책 표지에 쓰인 그림은 윌리엄 블레이크가 1795년에 그린 ‘뉴턴’이라는 작품이다. 그림에서 뉴턴은 몸을 구부린 채 컴퍼스를 잡고 도형을 응시하고 있다. 그런데 자세가 많이 불편해 보인다. 뉴턴을 싫어했던 블레이크는 이 그림을 통해 뉴턴이 복잡한 세상을 기하학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믿는 단순한 사람이라고 풍자했다. 블레이크는 “신이여, 제발 우리를 깨어 있게 해주옵소서. 외눈박이 시각과 뉴턴의 잠으로부터…” 라며 뉴턴을 비판했다. 뉴턴이 고전역학 체계를 정립한 결과, 우리는 자연과 우주를 수학적 원리로 표현할 수 있게 됐다. 만약 우리가 자연 법칙에 대해서 모두 알고, 특정 시점에서 세계가 어떤 상태인지 완전하게 알 수 있다면, 미래를 완벽하게 예측할 수 있다. 미래가 완벽하게 예측가능하다는 말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자유로운 의지로 무언가를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이 있을 수 없다. 모든 일이 이미 물리 법칙에 따라 결정되어 있는데 여기에 인간의 정신이나 자유의지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유럽인들은 고대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 신학을 받아 들여 사고의 근간으로 삼았다. 그들은 정신과 육체를 별개의 실체로 여기며 영혼의 불멸과 신의 구원을 믿었다. 계몽 사상과 자연과학이 발달한 이래 인간 정신이 고귀한 이유는 이성과 자유의지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성이 발전시킨 물리학이 인간 정신과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역설을 낳았다. 물질 세계는 물리 법칙의 지배를 받아 결정되어 있지만 인간 정신은 물질 세계와 별개로 실재해 자유의지로 물질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원론은 이런 역설을 해결하기 위해 고심했다. 데카르트는 송과선이 정신과 육체가 만나는 곳이라 주장했다. 칸트는 순수 이성과 실천 이성을 구분해 실천 이성이 자유의지를 ‘요청’하며 ‘자유’란 자신이 세운 법칙, 즉 자율에 복종하는 힘이라고 이해했다. 이처럼 인간의 정신과 자유의지를 구원하기 위한 노력은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진다. 


 한편, 다윈이 내세운 진화론 역시 고전 역학과 비슷한 결론에 다다른다. 진화론은 인간이 지렁이나 세균처럼 하등하고 보잘것없는 생명체와 다르지 않은 원리, 즉 우연에 따른 유전자 조합과 자연선택이라는 냉혹한 생존경쟁의 결과로 나타났다고 알려 준다. 진화생물학은 인간 고유의 특징이라고 여겼던 문화, 의식, 언어, 유희와 같은 속성이 다른 동물에게 있다는 사실도 밝혔다. 또, 인간이 만든 위대한 문명과 예술이란 그저 유전자를 많이 남기기 위한 적응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이럴진대 인간 정신의 위대함과 고귀함은 사라지고 아무런 의미가 없는 물질과 본능에 따른 이기심만 있지 않는가? 작가 메릴린 로빈슨은 이렇게 말했다.


“아담이라는 이름은 지구를 의미한다. 이 천사에 가까운 존재인 오래된 아담을 다윈주의자들은 아직 신의 은총을 입지 못한 미개한 상태로 추레하게 행동하는 짐승과 같은 속성을 갖는 생명체로 대체해버렸다. 창세기 이야기는 인간 예외주의를 기술하려 하고, 다윈주의는 그것을 깎아내리려 한다.”


“우리의 비대해진 뇌, 낭비벽의 사치인 뇌, 그 비축분과 자산, 그리고 그 모든 깊은 공포와 가벼운 즐거움을 담고 수많은 대저택을 거느린 집과 같은 뇌, 그 오랜 시간 동안 우리 삶의 본질로 간주되고, 타인의 동정심과 예의와 관심에 대한 주장의 근거가 되어주었던 그 뇌가 종교, 예술, 위엄, 정중함 등 그 앞으로 언급된 총체적 삶의 모든 부분과 같은 전철을 밟고 있다.”


 심지어 다윈도 고민했다. 그는 한 편지에서 이런 의문을 드러냈다.


“하등동물의 정신에서 발달해 나온 인간의 정신이 과연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인가, 혹은 조금이라도 신뢰할 만한 존재인가 하는 의심이죠. 원숭이의 정신 속에 어떤 확신이 들어 있기는 하다면 과연 그 확신을 신뢰할 수 있을까요?”


 물리학과 생물학은 인간이 다른 생명체와 질적으로 다르지 않으며 정신 또한 물리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특별하며, 인간의 정신이 고귀하다 믿는 사람들에게 과학이 밝혀낸 사실은 문화와 문명의 근간을 허물어버리는 충격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진화론을 지지하는 수많은 증거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특별한 존재로서 고귀한 정신과 불멸의 영혼을 지녔다고 믿는다. 그런데 케네스 밀러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 책에서 진화론이 결코 인간의 특별함과 정신의 고귀함을 깎아내리지 않는다는 점을 보이려 노력한다. 그는 진화론이 인간이 쌓아올린 학문이며 예술이며 도덕을 폄하하지 않으며 오히려 더욱 숭고하고 의미있게 만들어 준다고 주장한다. 



3. 생물학적 결정론



 밀러는 우선 진화론이 수많은 증거를 통해 증명된 진실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책 부록에 다른 영장류의 염색체와 인간의 염색체를 비교한 내용이 있는데 인간과 영장류가 공통 조상을 가졌다는 강력한 증거다. 그런데 진화론을 받아들이면 어떤 결론에 다다를 수 있다. 이른바 생물학적 결정론이다. 에드워드 윌슨은 이렇게 주장했다.


 “뇌가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한 것이라면 특정한 윤리적 판단이나 종교적 믿음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 또한 분명 똑같은 기계론적인 과정에서 등장했을 것이다. 이 능력은 고대의 인류가 진화했던 과거의 환경에 대한 직접적인 적응이거나, 기껏해야 엄격한 생물학적 의미에서 볼 때 한때는 적응에 유리했던, 눈에 덜 띄는 더욱 은밀한 활동에서 2차적으로 비롯된 구성물일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우연이 낳은 생명으로 그 존재가 무의미하며, 자연선택의 요구에 의해 빚어진 환상의 세계에 살고 있고, 인간의 행동 또한 반사와 반응이라는 결정론적인 신경화학에 의해 로봇처럼 좌우된다.” 


 즉, 자유의지는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행위는 유전자에 각인된 본성과 주위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학습한 내용이 결합해 특정 상황에서 어떻게 선택하고 행동할지 미리 결정되어 그대로 이루어진다. 신경회로에 새겨진 ‘가치함수’가 우리의 모든 행동을 결정한다. 그러면 우리가 자유의지라고 느끼는 관념은 자기합리화를 위한 사후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관점을 따르면 최근 개봉한 영화 <알리타, 배틀 앤젤>의 원작 만화 <총몽>에 나오는 다음 대사가 세계의 진실일 것이다. 


“삶의 시작은 화학반응에 지나지 않고 영혼은 존재하지 않고, 정신은 신경세포의 스파크에 불과해. 인간 존재는 다만 기억 정보의 그림자일 뿐이지. 신이 없는 무자비한 세계에서 홀로 살아가야 한다 해도……”




4. 저자의 견해


 <총몽>에서 노바 교수는 위 대사 바로 다음에 이렇게 말한다. “여전히, 여전히 난 의지의 이름 아래 명령하겠다. '살아가라'고 말이야.” 케네스 밀러도 노바 교수처럼 인간이 물리적, 생물학적 바탕에 근거해 이루어졌지만 자유의지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진화적 적응은 분명 인간의 두뇌를 만들어내고, 그와 함께 우리가 세상을 배우고, 세상과 상호작용하고 이해할 때 사용하는 기본적인 정신적 틀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런 틀은 인간 발달의 출발점이지 종착점이 아니다……우리가 그런 사슬을 인식하고, 그 사슬을 뛰어넘어 생각과 행동의 독립성과 창의성을 달성한 유일한 생명체로 진화했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 함께해야만 한다. 그런 생각과 행동의 독립성과 창의성 덕분에 우리 종의 위대하고 영속적인 달성이 가능했다.”


 생물학적 결정론이 인간의 문화나 사회까지도 생물학 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과학의 적용 범위를 지나치게 과장한 결과다. 인간은 진화의 사슬에서 비롯되었으나 다른 진화의 산물과 분명 다르다. 


 “인간이란 동물을 다른 모든 동물과 차별화시켜주는 것은 몸의 구조도, 구체적인 생리학적 메커니즘도, 다른 진화 계통 가지와의 특별한 관계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만의 독특한 학습 능력, 존재의 본성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능력, 자기 자신을 만들어낸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다. “


 우리가 특별한 이유는 신의 모습을 본따 창조되어 만물을 다스리는 지위를 부여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지구상에서 우리만이 우리가 왜 이렇게 태어났는지 탐구하고 이해하는 능력 때문이다. 그런데 자유의지를 부정한다면 이 능력도 부정하게 된다.


 “뇌과학을 이용해 생각의 실제성이나 철학의 가치를 부정하려 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자기 자신의 활동에 어떤 함축적 의미를 갖는지 보지 못하고 있다. 만약 인간의 정신이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진짜인지에 대해 판단할 능력이 없다면, 그 사실 자체는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정말 이상한 문제다. 우리가 전혀 생각할 수 없다는 ‘생각’을 만들어낼 수 있고, 그다음에는 그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퍼뜨려 그들 역시 자신들의 생각이 착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다니 말이다.”


 만약 자유의지가 없다고 한다면, 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가 과학을 발전시키고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을 연구하고 검증할 수 있단 말인가? 또, 자유의지가 없다는 실험 결과를 어떻게 옳다고 확신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자유의지를 부정할 수 없다. 자유의지 역시 진화의 결과로 우리가 가진 능력이다. 그 결과로


 “‘우주는 우리를 통해 자기 자신을 이해한다.’ 마침내 자기 자신의 존재를 탐험하고 설명할 능력을 갖춘 종을 만들어낸 물질세계는 의문의 여지 없이 자신의 역사에서 중대한 전환점에 도달한 것이다.”


 저자는 수렴진화를 설명하면서 진화가 필연적으로 우주와 물질세계를 탐구하고 이해하는 능력을 갖춘 지성 생명체가 탄생시킬 것이라 암시한다. 인간은 수많은 우연이 거듭된 진화의 결과로 빚어진 종이다. 하지만 환경과 물리적, 화학적 법칙에 따른 환경의 제약으로 어떤 방향성을 가지게 되며, 결국 우주가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매개체로서 지적 생명체가 되었다. 



5. 의문점


 저자의 문제의식과 생물학적 결정론에 대한 비판은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 나도 진화론을 부정하는 사람이 어찌 그리 많은지 궁금했다. 이 책을 읽고 따로 기독교 역사에서 벌어졌던 자유의지 논쟁을 참조한 후, 왜 사람들이 진화론에 대해 감정적으로 거부하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자유의지를 부정한다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타락과 구원이란 개념이 생겨날 수가 없다. 신의 구원이 없다면 기독교는 존립이 불가능하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자유의지를 부정하거나, 생물학적 원리로 인간을 설명하는 이론에 반감을 가지는 이유를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했다. 한때, 진화심리학이 설명하는 인간의 심리와 행동을 맹신했는데, 실제 경험한 세상은 그보다 훨씬 다양했다. 자연법칙과 규범법칙은 같지 않다. 그래서 생물학적 결정론이 인간의 모든 행동을 설명하려는 야심에 대한 비판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일 수 있었다.


 저자는 자유의지를 옹호하는 근거로 과학적 근거를 들지 않았다. 그보다는 언어의 논리로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점을 증명하려 했다.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일이 자기 참조의 역설과 같으므로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식의 논리다. 크레타인 에피메니데스가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이다.” 라고 한 말이 어떻게 해석해도 논리적으로 모순이 된다는 점을 보여준 것과 같다. 그런데 자유의지와 같이 중대한 문제를 이런 역설로만 구제할 수 있을까? 좀 더 실증적인 증거를 들어야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지 싶다. 또, 저자가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을 바탕으로, 예전에 데카르트와 칸트가 시도한 것처럼, 물질세계의 결정론적 법칙과 정신의 자유의지를 조화시키려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진화론을 증명할 때는 수많은 실증적 증거를 제시했으면서, 자유의지는 언어논리로만 옹호한 것은 물질의 법칙과 정신의 법칙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우리가 우주를 이해하고, 우리 자신이 태어난 과정을 이해하는 일이 의미있다는 점은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지적 생명체가 태어난 일이 마치 필연인 것처럼 생각하는 건 진화에 목적을 개입시키는 결과가 아닌가? 분명히 진화는, 아니 자연은 목적이 없이 흘러가는게 아닌가? 풀리지 않는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자유의지에 대해 자료를 찾아보았다. 그러다가 뇌과학자 송민령 선생이 웹진 <사이언스 온>에 연재한 글을 보았다. 




6. 뇌과학자 송민령의 견해


  <인간의 본능>에서도 나온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실험으로 유명한 벤자민 리벳의 실험이 있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기로 마음먹기 전에 이미 뇌에서 준비전위가 나온다는 결과 때문에 자유의지 논쟁에 불을 붙인 실험이다. 송민령은 이때 나온 준비전위가 ‘자발적인 뇌 활동(spontaneous brain activity)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사람의 뇌는 쉬는 동안에, 컴퓨터의 대기 모드와 달리, 끊임없이 외부 환경의 상황을 예측하고 이미 일어난 일을 학습한다. 이를 내정상태(default mode network)라고 한다. 자발적인 뇌 활동은 무작위적인 잡음이 아니라 주위 환경, 몸 상태, 감정 상태, 과거의 경험 등과 연관되어 있다. 리벳의 실험처럼 뭔가를 하라고 요구받았다면, 뇌에서 이 행동에 대한 자발적 뇌 활동이 일어날 확률이 높다. 


 다른 어떤 실험에 따르면 와인 가게에 독일 음악을 틀면 독일 와인이, 프랑스 음악을 틀면 프랑스 와인이 더 많이 팔렸다.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이 배경음악에 영향을 받았다는 걸 몰랐으며, 실험 후 자신이 음악에 영향을 받아 와인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과연 자유의지로 와인을 골랐다고 말할 수 있을까?


 환경과 독립해 작용하는 ‘의식’이 존재하고 이 의식이 뇌 활동과 행동을 결정한다면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여러 실험들은 분명 충격을 준다. 그러나 뇌과학에 따르면 의식은 특정한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란다. 의식은 뇌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활동을 조율하고 ‘자아’라는 내적 표상에 걸맞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작용을 한다고 보면 자유의지 문제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자유의지는 확실히 ‘자아’와 ‘의식’을 기반으로 한다. 그런데 이 자아와 의식이 실체가 아니라 현상에 불과하다면 자유의지가 실재하냐는 문제도 다르게 접근해야 할 것이다.


 ‘자아’는 운동을 계획하는 뇌가 만든 내적 표상이다. 동물의 감각기관은 외부 세계를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운동에 필요한 정보를 얻기에 적합하다록 진화했다. 쉬운 예로 우리는 여러가지 착시를 경험한다. 그런데 외부 정보가 전달되어 처리되는 속도는 감각기관마다 다르다. 시각은 청각보다 느리며, 촉각은 시각보다 더 느리다. 이처럼 다른 속도로 전달되는 여러 감각 정보를 통합해 ‘나’에게 일어난 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나’라는 통합된 내적 표상이 있는 것이 효율적이다. 나아가 ‘나’가 어떤 행동을 할지 계획하고, 실제로 수행하며, 행동을 반성하고 수정하려면 ‘나’라는 내적 표상이 필수적이다. 


 ‘자아’와 ‘의식’은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우리의 뇌가 진화에 따라 발달하면서 필요에 의해 만들어낸 현상이다. 그런데 이 현상은 뇌와 행동을 바꾸는 작용을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자아와 의식 덕분에 주의를 기울여 우리 행동을 숙고하여 결정할 수 있다. 이 과정을 자유의지가 작용한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은가? 자유의지는 인간과 환경을 분리하는 개체분절적인 시각, 자아와 의식을 실체로 보는 관점, 그리고 모든 일에 딱딱 맞아떨어지는 원인이 있다는 환원적인 태도와 얽혀 있다. 이런 방식은 복잡한 현상을 단순화하여 이해하고 지식을 쌓는데 도움이 되지만 대상을 객체로 바라보게 한다. 



7. 맺음말


 나는 송민령의 관점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케네스 밀러의 견해는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에 근거해 있으며, 그러다보니 이 둘을 조화시키기 위해 목적론까지 도입하는 무리수를 둔 것 같다. 자아와 의식, 자유의지는 실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뇌가 만들어내는 현상이며, 이 현상은 자신의 육체 및 주위 환경과 상호작용하여 행동을 계획, 실행, 수정할 수 있다. 진정한 자유는 여러 가지 중에서 무언가를 선택하는 자유가 아니라 하기 싫은 일을 그만둘 수 있는 자유라는 말이 있다. 우리 인간은 신경 신호가 무엇을 하게 만들어도 의식의 작용으로 주의를 집중해 그 일을 멈출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실험으로 유명한 벤자민 리벳 또한 준비 전위가 작동한다 하더라도 실제 실행하기 전에 행동을 멈출 수 있는 힘에 대해 언급했다. 


 이 책을 읽는 시간에 더해 종교, 동양철학, 서양사상, 법학, 생명과학에서 자유의지 문제를 찾아 읽었다. 워낙 중구난방이라 제대로 정리는 못했지만 어설프게나마 어떤 맥락인지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기회가 되면 자유의지 논쟁에서 중요한 쟁점만 따로 정리해 보고 싶다. 특히, 동양철학에서 다루어진 자유의지와 기독교 역사에서 이루어진 자유의지 논쟁은 무척 흥미로운 주제였다. 꼭 다시 공부해보고픈 내용이다. 한 책을 읽으며 관련 주제를 폭넓게 찾아보는 일은 힘겹지만 즐거운 과정이다. 내가 여러모로 부족하기 때문에 들인 시간과 노력에 비해 얻는 바가 적지만 앞으로도 이런 느낌으로 독서하고 생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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