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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종화 Jun 07. 2019

개인의 발견

어떻게 개인을 찾아가는가 1500 ~ 1800

 나는 1980년대 초중반에 국민학교(지금은 초등학교)에 다녔다. 당시 작은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는 자주 “개인주의가 우리나라를 망친다. 개인주의자는 빨갱이만큼 나쁜 놈들이야. 나라에 해만 끼쳐.”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기주의가 나쁘지 개인주의는 좋은거 아니냐며 반박했다. 그때는 공산주의에 온갖 나쁜 관념을 다 갖다 붙이던 시절이었다. 학교에서 자본주의는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을 보장하지만 공산주의는 전체주의라서 당이 시키는대로만 해야한다고 배웠다. 자본주의는 개인주의, 공산주의는 집단주의며 그래서 공산주의는 나쁘다고 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일이 공산주의만큼 나쁘다고 믿었다. 농경 사회에서 오래 내려온 가문과 집단을 중요시하는 전통 사상과 분단 이후 남한 전체를 지배하던 반공 사상이 아버지 안에서 충돌하고 있었다.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다. 근대적 개인이나 공산주의나 모두 근대 유럽이라는 특수성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 근대적 개인을 창출하지 못했고 서양 문명을 압축적으로 이식했다. 그들이 수백 년에 걸쳐 이룩한 근대 과학 문명은 단순히 기술과 과학이 아니다. 과학과 기술이 이루어지기 위해 우선 인간과 세계에 대한 관념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했다. 우리는 이런 사정을 깊이 따지지 않고 겉으로 보이는 껍데기부터 급히 도입해 버렸다. 그 결과 겉으로는 화려하고 풍요한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지만 내면에서는 자본주의적 근대와 어울리지 않는 전통 가치가 남아 근대 사상과 충돌했다. 지금도 우리는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근대적 개인으로 살아본 적이 별로 없다. 


 그런데 정신 없이 변화하는 정보통신 시대는 전통 가치와 근대적 가치가 경합을 벌이는 와중에 또다른 변화를 일으켰다. 개인(indivisual)이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존재로서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 단위이다. 그러나 스마트폰과 SNS는 이 개인이 파편화되는 현상을 보여준다. 세월호 사건은 사회가 개인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각인시켰다. 사회가 제 역할을 못하면 개인도 의미를 잃는다. 전통과 근대의 부조화만 해도 머리가 아픈데 근대도 무너지고 있다. 이 시점에서 근대란 무엇인지 알아가는 공부가 사소한 일은 아닐테다. 근대(성)에 대해 이해해야 진정한 근대를 완성하거나, 근대를 극복하지 않겠는가?


 우선 근대적 개인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며 근대 이전의 사람과 어떤 면에서 다른가? 먼저 ‘개인’이라는 단어의 역사를 살펴보자. 야나부 아키라 저 <번역어의 성립>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indivisual은 오늘날 ‘개인’으로 번역되는데, 그 근원지는 아무래도 에도막부 말기에 일본에서도 널리 퍼져 있던 여러 종류의 영어-중국어 사전이었던 것 같다. <영화자전>(1822)에서는 indivisual이 ‘단單, 독獨, 단일개單一個’로 설명되어 있다. 다른 <영화자전>(1847~1848)에는 indivisual이 ‘독일개인獨一個人’이라고 나온다. 메이지 시대에 이르면 형용사로서 an indivisual man 을 ‘일개인一個人’으로 번역했다. 점차 一이 떨어져나가 ‘개인’으로 정착했다.”


 동양에서는 ‘개인’이라는 단어가 없었으며 여기에 해당하는 관념도 없었다. 근대적 개인이 아니라 그냥 개인 자체가 없었다. 사람은 흔히 자신의 사고방식을 다른 시대나 다른 지역에 사는 이에게 투영하는 경향이 있다. 경제학을 비판하는 내용 중에 자본주의에 철저한 합리적 인간형을 자본주의 전 시대에도 적용한다는 점이 있다. 이는 실제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마찬가지로 개인과 사회가 모든 시대와 지역에 존재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indivisual은 유럽 역사에서 가령 man이나 human being 등과는 사상적인 배경이 다른 단어다. 신에 대해 혼자인 인간, 그리고 사회에 대해 궁극적인 단위로서 혼자인 인간이라는 사상과 더불어 쓰여온 단어인 것이다.” <번역어의 성립> 


 그러니까 원래 개인은 기독교 신학의 전통에서는 신에 대한 대응 개념으로서 기능했다. 이를 나타내는 가장 극적인 말이 키르케고르가 언명한 “신 앞에 선 단독자”이다. 또,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물리적 단위인 원자처럼 사회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로 생각되었다. 그런데 동양에는 기독교 전통도 없었고 ‘Society(사회)’라는 개념도 없었다. 한국, 중국, 일본은 번역을 통해 개인과 사회라는 단어를 받아들이면서 비로소 개인과 사회를 발견하거나 만들었다. ‘개인’이나 ‘사회’라는 번역어를 따져보면 현실이 언어를 만든다고 할 수 없다. 반대로 언어가 현실을 구성한다. 서양에서도 마찬가지다. 단지 우리보다 긴 시간 동안 발견과 구성이 이루어졌을 뿐이다. 이 책 <개인의 발견>은 서유럽에서 ‘개인’이 어떻게 발견되었는지 탐구한다. 다시 말해 “‘근대’적 개인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개인들이 자신의 사적인 목표와 소망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또 개인들이 자신의 길을 발견하려고 어떤 시도를 했는지, 그런 가운데 어떻게 전통의 관계망을 부수고 나왔는지”를 살펴본다.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명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1860)>에서 개인이란 르네상스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의 말에 따라 ‘개인’이 이탈리아 도시에서 생겨나 르네상스 문화와 더불어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여겼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그의 가설은 힘을 잃었다. 개인의 발견은 유럽 각지에서 다양한 배경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지역적 특색을 보이며 일어났다. 이 과정에는 여러 요인이 결합되어 있다.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나름대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1. 오랜 기독교 역사가 개인주의의 전통에 들어간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는 원죄를 가진 사람이 신의 은총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데 있다. 이 구원은 집단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개인 하나 하나에게, 독립적으로, 단독으로 주어진다. 그가 노예인지 귀족인지 신분이 구원에 미치는 영향은 없다. 그의 가족이나 친구가 이교도라 할지라도 그가 신실한 신자라면 구원이 주어질 수 있다. 신은 집단의 일원으로서가 아니라 단독자로서 개인에게 다가간다. 저자의 말대로 “기독교는 처음부터 개인을 상대로 이야기하는 종교였다.” 물론 사람들이 고대와 중세에는  근대와 달리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살았지만 기독교 교리 안에 개인주의의 전통이 있던 것도 눈여겨 보아야 한다.


 그리고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루터가 주창한 ‘만인사제주의’를 통해 신자 개인은 성직자를 통하지 않고 단독으로 신 앞에 서게 되었다. ‘성경지상주의’는 스스로 성경을 습득하고 깨우치게 만들었다. 신학자의 해석은 한 신자의 양심에 입각한 해석과 일치할 때에만 의미가 있었다. 이로서 개인은 신과 자신의 양심에만 책임을 지게 되었다. 신교도는 공개적으로 구교와 절연하고 새로운 교리를 따르겠다고 선언했다. 종교적 판단을 개인이 내리고 이에 대해 자신이 책임진다는 생각은 개인이 스스로를 인식하기에 충분할 만큼 지적으로 성숙하다는 점을 드러낸다. 이 새로운 사상은 특히 가정에서 개인의 지위를 강화했다. 


 재세례파나 성령주의자들과 같은 종파는 신교가 주창한 바를 더욱 철저하고 극단적으로 몰고 갔다. 교회와 관련된 모든 전통과 결별하고, 신교 교회조차 의심하며 자신의 양심 하나에만 의지했다. 이들은 뚜렷한 개성을 가졌고 자신의 확신과 견해에 따라 행동했다. 이들의 행보가 드러낸 특징은 자기인식, 자기통제, 자기분석에 다름 아니었다. 이 특성은 그들 신앙의 바탕이 되는 요소임과 동시에 나중에 근대적 개인이 되기 위한 요소이기도 했다. 


2. 글과 그림 등으로 자신을 표현하기 시작한 점이 개인주의의 전통에 자리했다. 르네상스 시기부터 다양한 영역에서 세속적인 고백이 이루어졌다. 특히 16세기 초반부터 글을 쓰는 기술이 향상된 점과 관련되어 ‘자기’를 드러내는 기록이 이전과 달리 부쩍 늘었다. 상세하게 쓴 자서전이나 사적인 편지가 주된 형식이었다. 글쓰기가 가능하려면 언어에 체계가 잡혀야 한다. 유럽의 각 언어는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표준어로서 탄생했다. 민족어가 체계를 이루면서 라틴어가 아닌 생활언어로 글을 쓰는 일이 가능해졌다. 라틴어가 여전히 학술어로 기능했지만 일상적인 글은 각 민족어로 쓰기 시작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이 말이다. 


 자서전이나 사적인 편지는 자기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가능하다.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관찰하고 분석해야 자신의 일생을 글로 쓸 수 있다. 르네상스 시기 이후 화가들의 자화상이 늘어난 배경도 이와 같다. 화가들이 예술가로서 자의식을 가지면서 이전 시대와 다른 특징이 나타났다. 르네상스 이전에도 초상화가 있었지만 어떤 관념을 표현하는데 치중했다. 자의식을 가진 화가들은 인물을 표현할 때 개인적 특성, 즉 개성을 작품에 부여했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가죽옷을 입은 자화상>(1500)을 보면 자신을 예수와 비슷한 모습으로 그렸다. 자신이 창조자로서 작품을 생산하는 예술가라는 모습을 분명히 나타냈다.  


                                          [알브레히트 뒤러, 가죽 옷을 입은 자화상, 1500]


 3. 국가가 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이 역설적으로 개인을 만들어갔다. 절대 왕정 혹은 전제 국가가 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이 어째서 개인을 발견하고 구성하게 되었을까? 오히려 국민을 통제하고 동원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을까?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교회, 학교, 국가는 나름의 규율을 강제하는데, 겉으로만 지키는게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올 것을 요구했다. 자아, 내면, 개인은 별개가 아니라 하나의 현상을 다른 측면에서 표현할 뿐이다. 규율이 내면화되려면 자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자신을 분석하고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먼저 교회의 제도로 카톨릭의 고백(고해)성사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가라타니 고진은 <근대 문학의 기원>에서 “고백이라는 형식, 또는 제도가 고백해야 하는 내면 또는 진실한 자아라는 이름의 어떤 것을 만들어냈다. 고백이라는 의무가 감춰야 할 무언가를, 혹은 내면을 창조한다.” 라고 말했다. 고백이란 가지고 있던 생각이나 마음을 숨김없이 드러낸다는 뜻이다. 고백을 하기 위해선 고백을 할 내용이 있어야 한다. 이 내용은 개인의 내면 속에 들어 있다.  내면이 먼저 존재해서 고백할 내용이 생기고 이를 드러내는 게 아니다. 고백이라는 형식이 내면과 그 안에 숨은 비밀을 만든 것이다. 고백(고해)성사는 다음과 같이 이루어진다. (1)고해자는 지은 죄를 모두 알아내고 (2) 진정으로 뉘우치며 (3) 다시는 죄를 짓지 않기로 굳게 결심하고 (4) 기도를 바친다. 


 자신이 지은 죄를 알아내기 위해선 자신을 분석하고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뉘우친다는 말은 규율이 내면화되어 양심이 만들어졌다는 의미다. 다시 죄를 짓지 않으려면 자신을 성찰하고 단련하여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해야만 한다. 고백성사는 개인의 도덕화를 이끌면서 양심이 형성되는 데 이바지했다. 사람들은 매일의 행동을 성찰하면서 이를 개선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렇게 고백성사는 개인의 내면과 양심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주세페 몰테니, 고해성사]


 신교는 성사로서 고해를 없앴지만 종교 생활을 통제하는 역할로 ‘고백’을 활용했다. 신자들이 잘못된 행동을 해서 이를 발견하면 공개적으로 의논했다. 종교개혁 시기에 신교로의 개종은 공개적으로 신앙을 말해야 했다고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다. 덕분에 신자들은 선과 악의 구분을 첨예하게 받아들였으며 개개인은 자신의 죄악을 내면으로부터 통찰했다. 신자들은 양심을 갈고 닦아 스스로 선악을 구분해 삶에서 실천하도록 요구받았다. 구교와 신교를 막론하고 기독교는 신자들이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신앙과 도덕을 갖추기를 주문했다. 그럼으로써 내면과 양심이 구성되었다. 


 둘째, 국가의 사법제도도 기독교의 고백성사와 유사한 기능을 발휘했다. 중세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강력한 왕권을 갖춘 국가 체제가 정비되면서 사법제도도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근대 초기의 형벌 제도가 개인의 발견과 개인화를 촉진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떼도둑처럼 단체로 범죄를 저질러 붙잡힌 경우에도 범죄자들은 개인으로 재판받았다. 심지어 스페인의 종교 재판, 마녀 재판도 그러했다. 모든 사람은 ‘개인’으로서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졌다. 사형 판결을 내리기 위해서는 객관적 증거와 함께 죄인의 자백 또한 필수였다. 자신의 죄를 인식하는 것은 자기를 인식하고 성찰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2) 법정이 내린 판결은 사실상 공적으로 실행되었다. 이를 지켜본 일반 민중도 새로운 체제에서 지켜야하는 도덕과 규율을 배웠다. 국가는 무엇이 범죄인지, 그것을 저지른 대가가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그럼으로써 근대 초기 사법제도는 민중들의 삶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공개 처벌은 규율이 내면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루이 15세 암살범 다미앵의 처형장면 삽화(1757)]




 (3) 범인의 체포도 중요하지만 범행 동기를 따져 책임을 묻는 일도 중요했다. 범행이 고의로 저질러지지 않았을 때에는 의도가 분명한 때보다 약한 처벌을 받았다. 한국에서 살인죄의 경우 고의적 살인은 ‘모살’이며 고의가 없는 경우는 ‘과실치사상죄’로 구별하는데 처벌 강도가 분명히 다르다. 이런 구별은 범죄 행위의 과정과 결과만 조사하는게 아니라 범인이 죄를 저지른 동기, 나아가 범인의 사상까지 조사하는 결과를 낳았다. 법정은 범행의 주변 상황과 발생하게 된 사정, 그리고 범인의 일생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비록 타의에 의한 결과이지만 지식인이 자서전을 쓰는 일과 개인의 발견이라는 점에서 통한다.


 (4) 사법제도가 국가체계 안으로 들어가자 객관적인 사실 관계를 입증할 의무가 생겼다. 증거 제시와 증인의 증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법정이 모든 사람을 믿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판결, 특히 사형의 경우 범인이 분명하게 자백을 하고 공개적으로 이를 반복할 때만 내릴 수 있었다. 만약 죄를 고백하지 않고 고문을 끝까지 버틴 자는 처벌하기 어려웠다. 진실이 밝혀진 다음에는 죄의식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달리 말하면 판사는 범인의 개성을 존중하고 그의 양심에 호소하고 그의 동의를 얻어서 범인을 처벌할 때에만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다. 


 (5) 위의 결과로 범인 신문 조서는 자서전적 기록이 되었다. 법정의 신문은 사회적 기능을 발휘했는데, 범죄자의 ‘자기발견’ 과정이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국가 체계 안에 포섭된 사법제도는 개인이 법을 내면화하고 양심적으로 간직하도록 강제해서 개인의 발견을 촉진했다. 



  셋째, 학교교육이 개인을 단련시켰다. 근대 초기 학교가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고 강화하는 역할을 수행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보편적인 규범을 내면화하는 교육을 통해 교회가 수행한 역할을 뒷받침했다. 기본적인 읽기, 쓰기, 계산하는 능력을 가르쳐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글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게 하는 최초의 디딤돌이 놓였다. 이를 통해 학생의 교양이 두드러지게 넓어졌다. 거듭 말하지만 규율을 습득해 내면화하는 일은 공동체의 일원으로 무리 없이 살아가는 데 필요할 뿐만 아니라 자기 인식과 성찰을 통해 개인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이처럼 사회가 전반적으로 체계를 갖추며 규율화가 진행되었다. 규율의 내면화는 스스로의 행동을 돌아보고 잘못된 행동에 자신이 책임을 지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기통제, 양심의 가책, 선악의 구분을 날카롭게 의식했다. 나아가 나 자신이 남과 다른 독립적 존재로서 스스로의 내면과 양심을 만들어야 하는 개인으로서 개성을 가진 존재임을 분명히 인식하는 데로 나아갔다. 사람들은 원래 금지되었기 때문에 하지 않던 일을 나중에는 자유의지로, 스스로의 양심으로 하지 않았다. 올바른 사회적 행동에 대해 후천적으로 인식해 내면화한 결과 이것이 삶을 통제하기에 이른다. 규율화 과정은 새로운 사상, 인간의 존엄에서 비롯하는 개인의 성찰적 독자성으로 나아가는 주춧돌이 되었다. 


 4. 자본주의의 발달이 마침내 공공의 이익보다 개인의 이익을 중시하는 경제적 개인주의를 낳았다.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이전에 사익을 추구하는 일은 법적, 도덕적, 종교적으로 악한 행위로 취급받았다. 자본주의 경제는 공익을 중시하는 오랜 전통을 뒤집었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그 유명한 ‘보이지 않는 손’을 언급한 구절을 보자. 


“사실 그는 공공의 이익을 증진시키려고 의도하지도 않고, 공공의 이익을 그가 얼마나 촉진하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노동생산물이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그 노동을 이끈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다. 이 경우 그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서 그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그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흔히, 그 자신이 진실로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키려고 의도하는 경우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그것을 증진시킨다.” <국부론 제 4편 제 2장>


 사익 추구가 곧 공익을 낳는다는 인식의 대전환은 자본주의 경제 뿐만 아니라 철학과 신학에서 인간의 본성을 새롭게 본 데에서도 비롯된다. 인간의 감정에 대해 부정적으로만 여기지 않게 되면서 정열과 자기애를 새롭게 해석해 경제적 개인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다. 자본주의의 핵심 원리 중 하나가 토지와 신분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개인들이 신용에 바탕을 둔 자유로운 계약을 맺어 이행하는 것이다. 재산권과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국가가 보장하면서 자본주의의 발전은 궤도에 올랐다. 누가 강제하지 않는 계약을 맺는다는 말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제 개인은 경제 활동에서도 공동체에서 독립하기에 이른다. 


 5. 계몽주의가 근대적 개인의 발견 및 발전에 강력한 추동력을 행사했다. 칸트는 <생각을 지향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1786)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기 생각이란 진리의 최고 시금석을 자기 안에서(즉, 자기 자신의 이성 안에서) 찾는 것이며, 계몽이란 언제나 자기 스스로 생각하라는 격언이다.” 


 또,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에서 계몽을 이렇게 정의했다.


“계몽이란 인간이 스스로 책임져야 할 미성년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미성년 상태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이용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미성년 상태를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것은, 그 원인이 지성의 부족에 있지 않고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 지성을 사용하려는 결단과 용기의 부족에 있는 경우이다. 그러므로 과감히 알려고 하라! 너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하는 것은 계몽의 표어이다.”


 반 뒬멘은 계몽이 개인주의에 미친 영향을 세 문장으로 표현했다. “스스로 생각하라, 스스로를 교육하라, 스스로 결정하라!” 칸트가 계몽에 대해 서술한 내용 그대로다. 스스로 생각하고 교육하는 일은 자기실현의 일부분이다. 시민계층에게 자기실현이란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고 삶을 여기에 맞출 수 있도록 계몽의 모든 수단을 이용한다는 뜻이었다. 


 자기 생각과 자기교육은 자기실현의 일부분이라고 생각되었고, 이는 사실상 새로운 교육에 대한 헤게모니를 요구하면서 등장한 사회집단, 즉 시민계층이 자리를 잡았음을 의미했다. 자기실현은 시민계층의 남자들에게는 자신의 이익을 실현시키고 삶을 그에 맞추도록 계몽의 주어진 수단을 모두 이용하라는 것을 의미했다. 계몽주의에 이르러  한 개인이 자아실현을 이룬다는 근대적 개인의 의미가 뚜렷이 드러났다. 근대적 개인이 드디어 구체적으로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기독교, 글쓰기, 제도가 강제한 규율화, 자본주의 경제, 그리고 계몽주의가 모두 근대적 개인의 발견과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내용은 규율화가 개인주의에 미친 강한 영향이다. 개인주의를 형성하는데 방해가 되리라 생각했던 제도의 정비와 규율의 내면화가 오히려 내면을 창출하면서 개인화를 불러왔다는 사실이 새로웠다. 국가가 사법제도를 정비하고 학교를 설립해 운영한 이유가 개인의 발전에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한 목적이 더 강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규율을 강제한 덕분에 개인이 탄생했다. 재미있지 않은가? 


 저자는 이 책에서 결혼, 핵가족, 가정의 구조, 소설 등에서 개인화로 나아가면서 이전과 실생활에서 바뀐 부분에도 상당한 분량을 할애해 설명했다. 실생활의 변화가 이루어진 부분을 읽으며 수백 년에 걸쳐 형성된 ‘개인’을 수십 년만에 체득하는게 얼마나 무리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또, 근대가 보편이 아니라 특수한 역사적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으며 새삼 느꼈다. 이 책은 ‘근대적 개인’을 발견하는 과정을 다루지만 실제로는 ‘근대’ 그 자체의 발견과 거의 일치하는 내용이다. 


 나는 깊이 숙고하지 않고 때로는 근대를 완성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어느 때는 근대를 극복해야 한다고 여기기도 했다. 지금은 근대를 완성하거나 극복하거나 하는게 중요한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는 규정하기에 따라 달라지며, 세상을 이론에 꿰어맞추는데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제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어떤지 아는게 재미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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