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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종화 Jun 09. 2019

번역어의 성립

번역어 성립 사정

  인문사회과학 책을 읽다 보면 개념어의 어원이 궁금한 때가 많다. 한국어에서 개념어는 대부분 한자어로 이루어져 있으니 한자의 뜻을 풀면 약간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개념을 첨예하게 정립하는 일이 인문학에서 가장 중요하지 않는가? 역사적으로 어떤 맥락에서 이런 개념어가 쓰였는지 이해하면 더 쉽게 그 개념에 대해 구체적이고 명확한 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독일에서 출간된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은 ‘문화’, ‘문명’, ‘진보’, ‘노동’, ‘전쟁’, ‘평화’와 같은 단어가 시대적으로 어떤 변천을 겪었는지 자세하게 조사한 책이다. 이 단어들은 누구나 아는 쉬운 개념을 나타낸다. 하지만 이런 뜻으로 정착할 때까지 기나긴 의미의 변천을 겪었다. 언어와 시대와 지역이 다르니 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서구에서 이 단어들을 사용할 때 숨어 있는 뜻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알았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개념어들은 대부분 일본이 서구를 번역할 때 사용한 단어를 그대로 수입했다. 일본은 서양 문명을 따라잡아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 그들의 지식을 받아들이는데 사활을 걸었다. ‘철학’, ‘개인’, ‘근대’와 같은 단어는 모두 일본이 번역을 통해 만들어낸 조어다. 왜 이런 단어로 번역했는지 안다면 이 개념들이 애초에 어떤 의미를 가졌고 나중에 어떻게 변화했는지 이해하기 쉽다. 그런 책이 있는지 찾다가 마침 이 책 <번역어의 성립>을 발견했다. 일본의 언어학자 야나부 아키라가 ‘사회(社會)’, ‘개인(個人)’, ‘근대(近代)’, ‘미(美)’, ‘연애(戀愛)’, ‘존재(存在)’, ‘자연(自然)’, ‘권리(權利)’, ‘자유(自由)’와 같은 개념어와 대명사 ‘그/그녀’가 번역어로 정착한 과정을 정리한 책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단순하게 개념어가 어떤 맥락으로 만들어져 쓰였는지가 궁금했다. 그런데 처음부터 충격을 주는 내용이 나왔다. 


 “‘사회’라는 말을 알기 이전에 ‘사회’에 해당하는 의미가 없었으며, ‘미’를 알기 이전에 ‘미’라는 개념이 없었다.”


 이 책에서 소개한 번역어는 모두 우리가 일상생활과 학문에서 많이 쓰는 단어들이다. 사회, 개인, 자연, 존재, 자유, 권리와 같은 단어의 뜻을 우리는 잘 안다고 생각한다. 이런 단어가 표상하는 개념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떠오르기 때문에 먼 옛날부터 이런 개념이 있었다고 여긴다. 그런데 이 단어들은 빨라야 19세기 중엽에 중국이나 일본에서 만들어졌다. ‘개념’은 언어로 표현한다. 만약 해당하는 언어가 없다면 그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책에서 소개한 첫 단어가 ‘사회’인데 이와 관련한 저자의 언급을 보자.


 “본래 society는 번역하기가 매우 어려운 말이었다. 무엇보다도 society에 해당하는 말이 일본어에 없었기 때문이다. 해당하는 말이 없었다는 것은 곧 society에 대응할 만한 현실이 일본에 없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다가 얼마 후에 ‘사회’라는 번역어가 만들어져 정착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 즉 society에 대응할 현실이 일본에도 존재하게 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정은 오늘날 우리가 쓰는 ‘사회’라는 말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사정이 오늘날에도 무관하지 않다! 개인적으로 느낀 하나의 예를 들어볼까 한다.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라는 영화가 1990년 한국에서 개봉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로빈 윌리엄스가 인습에 가득한 사립학교에서 학생들의 자유로운 활동과 개성을 독려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제목이 좀 요상하다. 죽은 시인의 ‘사회’가 무슨 뜻일까? 영화에서는 학생들이 만든 일종의 동아리를 ‘society’라고 표현했다. 나중에 그런 뜻을 알았지만 ‘사회’가 동아리 정도 작은 모임에도 쓰인다는게 직관적으로 와닿지 않았다. 우리가 보통 일상에서 쓰는 사회는 이보다 훨씬 넓은 범위를 담고 있다. 원래 동양에서는 ‘사회’ 대신 ‘천지’ 혹은 ‘나라’를 썼다. 이런 단어는 인간 뿐만이 아니라 인간을 둘러싼 환경이나 자연까지 포괄하는 의미다. 동양에서는 인간만의 모임이라는 개념이 별로 없이 자연과 인간이 어우러진 세상을 총체적으로 인식했다. 내가 ‘사회’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에는 사람들의 모임,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더해 이를 둘러싼 제도, 자연까지 포함되어 있다. 여전히 전통적인 사고를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한 것이다.


 서양에서 사회는 어떻게 정의될까? 1933년 옥스퍼드영어사전 society 항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동료에 해당하는 사람들과의 결합, 특히 친구끼리의 친밀감이 담긴 결합, 동료끼리의 모임


같은 종류의 사람들끼리의 결합, 모임, 교제에서의 생활 태도, 또는 생활 조건. 조화를 이룬 공존을 목적으로 하거나 상호 이익, 방어 등을 위해 개인의 집합체가 이용하는 생활 조직이나 생활 방식



 후쿠자와 유키치는 처음에 society를 ‘인간교제’ 혹은 ‘교제’로 번역했다. ‘사회’로 번역한다면 나처럼 동양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해 본래의 뜻이 혼동되리라 생각해서 그런게 아닐까? 아니나 다를까 ‘세상’이라고 번역한 사람도 몇몇 있었단다. 사실 우리가 쓰는 ‘사회’는 서구에서 성립된 원뜻보다 동양에서 내려온 ‘세상’이라는 뜻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후쿠자와 유키치도 결국 ‘사회’로 번역했지만 아무래도 ‘인간교제’가 더욱 원뜻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번역 과정에서 성립된 개념어들은 대개 두 글자로 이루어진 한자어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외국에서 새로운 의미의 단어에 대해 일본인에게 친숙한 단어를 대응시키지 않음으로써 의미의 어긋남을 피하고자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럼으로 해서 필연적으로 뜻이 명확하지 않은 단어를 만들어내게 되었다.” 


 Society를 ‘인간교제’나 ‘세상’으로 번역했다면 우리가 직관적으로 의미를 이해하기 쉬웠을테다. 그럼에도 굳이 ‘사회’가 선택된 이유가 위와 같다. ‘인간교제’는 society를 너무 협소하게 이해하게 하고, ‘세상’은 원래보다 더욱 넓은 범위를 포괄한다. 그래서 번역자들은 차라리 아예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society와 ‘사회’가 일대일로 대응시키면 이 문제가 해결되리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일본에는 없는 현실을 새로운 단어로 결합하다보니 의미하는 바가 너무 추상적이라는 문제가 생겼다. 새로운 단어다보니 구체적인 사용례가 드물어 뜻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저자는 일본인이 주로 한자어 조어를 번역어로 만든 결과 ‘카세트(cassette) 효과’가 생겼다고 말한다. 카세트는 작은 보석상자인데 내용물이 뭔지 몰라도 사람들을 매혹해 끌어당기는 물건이다. 서구 문명의 전통에서 생겨난 개념을 평이한 일본어로 번역하면 중요한 의미를 놓치게 마련이다. 그래서 표현하기 어려운 단어를 생소한 한자어에 떠넘겼다. 그런데 이 한자어조차 원어를 표현하기에 한계가 있다. ’사회(社會)’의 한자어 의미는 ‘모일 사’, ‘모일 회’인데 이런 한자어의 의미에 society의 의미가 그대로 들어맞지는 않다. 한자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society의 참된 의미가 떠오를까? 새로 만든 이 단어에 society의 의미가 있다는 약속만이 맴돌 뿐이다. 번역한 글을 읽는 사람들은 번역된 한자어 조어 안에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지 않을까 그저 막연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원어 본래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다보니 원뜻과 일치하지 않는 전통적인 관념이 끼어들 여지가 생겼다. 내가 ‘사회’를 사용하는 용법처럼 말이다. 


 이처럼 번역어의 뜻이 구체적이고 명확하지 않아서 발생한 기발한 사건이 있다. 저자는 미시마 유키오가 ‘미(美)’를 이중적으로 사용하여 대중을 미혹했다고 소개한다. 미시마 유키오는 소설 <금각사>를 비롯한 탐미적인 소설로 유명하다. 그런데 그는 평론에서는 ‘미’에 대해서 무시하듯이 경멸조로 말했다. 이렇게 한 작가가 작품과 평론에서 ‘미’를 말하는 방식이 다르다면 그가 의도한 바라고 보아야 하겠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독자는 소설 속에서 ‘미’가 인생을 좌우해 파멸에 이르게 할 정도로 중요하고 무서운 것이라 느낀다. 그런데 같은 작가가 평론에서는 ‘미’를 폄하한다. 독자는 ‘미’가 알쏭달쏭해서,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다. 그래서 더욱 매혹되고, 알듯말듯 모르는채로 숨겨져 있는 깊은 의미가 있다고 느낀다. 


 이 책에 모두 10가지의 번역어가 성립한 이야기가 나온다. 처음에는 겨우 10개 단어로 무엇을 알겠는가 실망했지만 읽어나갈수록 단어의 양이 중요한게 아니라 어떤 성찰을 보여주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실감했다. 번역어의 ‘카세트 효과’는 정말 절묘한 개념이었다. 내가 인문사회과학 책을 읽으며 분명히 의미는 통하는데 무슨 말인지 모를 때가 많았다. 이 책을 통해 그 이유의 절반이 번역어의 ‘카세트 효과’에 있다는 걸 알았다. 원뜻을 짐작하지 못한채, 일상에서 자주 쓰이지만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은 단어를 통해 개념을 이해하려고 하니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이 책을 통해 개념어의 근원이 어땠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상당히 풀었다. 또, 번역어의 이중성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책을 읽고 잘 이해가 가지 않으면 번역자를 욕할 때가 많았다. 앞으로는 정말 잘못된 번역이 아니면 제대로 된 뜻도 모르고 개념어를 오용한 내 자신을 탓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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