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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종화 Jun 12. 2019

그리스 비극 깊이 읽기

그리스 비극의 역사적 배경

 비극tragedy의 어원은 그리스어 tragos(염소) + ode(노래)의 합성어로 ‘염소의 노래’가 된다. 그리스 신화의 한 전승에 따르면 디오니소스는 어릴 때 염소의 형상으로 지낸 적 있다. 그런즉 비극의 원래 의미는 디오니소스 신에게 바치는 제의로서의 노래라는 의미다. 따라서 비극이 꼭 슬픈 이야기일 필요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의 전신을 엔코미아(Enkomia)라고 했는데, 이는 찬양하고 높이는 노래라는 뜻이다. 원래 비극은 아테네에서 디오니소스 신에게 바친 여러 제의 가운데 하나인 무대극이 기원이다. 그런데 이 극의 소재로 당시 아테네가 처한 정치적 상황과 관련된 적국의 왕실 이야기를 많이 다루었다. 적국이니만큼 그들의 오만과 어리석음이 자초한 저주와 몰락을 소재로 삼았다. 그래서 비극에 피와 복수로 얼룩진 잔인한 이야기가 많다. 이런 내용이 주로 남아 지금까지 전해졌기 때문에 비극을 슬픈 이야기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 책 <그리스 비극 깊이 읽기>는 이런 관점으로 비극을 바라본다. 당시 비극은 요즘으로 치면 오락과 언론, 집회의 기능까지 수행했으므로 당대의 정치적 현실과 동떨어져 있을 수 없다는 분석이다.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 책의 내용을 나름대로 재구성해 소개하고자 한다. 


 우선 비극이 주로 상연된 기원전 5세기 전후 그리스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자.  


 이 지도를 보면 아테네가 그리스 동남쪽 아티카Attica 지방에 있다. 그 위쪽 보이오티아Boeotia 지역에 테바이Thebes가 있다. 두 지역의 국경에 해당하는 지역 서쪽으로 좁은 지역이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연결되는데 여기에 메가라Megara가 있다. 코린트Corinth가 메가라에 이어져 있고, 아래쪽이 아르고스Argos다. 트로이 전쟁 시기 그리스의 맹주를 자처한 미케네가 아르고스 지역에 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 아래쪽에 스파르타가 위치한다. 


 트로이 전쟁 시기에 전성기를 누렸던 미케네 문명은 기원전 1100년 경에 원인을 알 수 없이 갑자기 몰락하고 이후 300여 년 동안 그리스에 암흑기가 지속된다. 기원전 8세기에 이르러 암흑기 이전 에게 문명과 연관이 없이 독자적인 문명이 다시 번성한다. 에게 문명의 선형B문자 대신 페니키아에서 기원한 알파벳 문자를 사용한 이들은 폴리스Polis라 불리는 도시국가를 건설하고 고대 그리스 문화를 꽃피운다. 가장 영향력 있는 폴리스는 역시 스파르타로 강력한 군사력 덕분이었다. 그리고 아테네, 테바이, 아르고스, 코린트가 지역의 주도권을 쥐는 정도였다. 


 각 폴리스는 독립적인 정치 단위로서 그리스 인이라는 동질성을 갖지 않았다. 이들이 어느 정도 그리스 인의 정체성을 갖게 된 계기는 페르시아의 침략(기원전 490~480)에 맞서 동맹을 맺고 저항한 경험이다. 이때도 모든 폴리스가 페르시아에 적대하지 않았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에 저항했는데 테바이와 아르고스는 페르시아 편에 섰다. 페르시아의 침략을 막아낸 이후 아테네는 이오니아 지역 및 에게 해 섬들과 해상동맹(델로스 동맹)을 맺어 맹주의 지위에 오른다. 아테네는 전통의 강국 스파르타와는 점차 거리를 두게 된다. 제 2차 세계 대전에서 나치를 상대로 동맹을 맺어 함께 싸웠으나 나중에 냉전으로 대립한 미국과 소련의 관계와 비슷하다. 


 페르시아 전쟁이 끝나고 전성기를 구가하던 아테네가 기원전 460년에 코린트와 전쟁을 벌이던 메가라를 지원하면서 제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된다. 스파르타는 코린트의 동맹으로 이 전쟁에 참전한다. 이 전쟁에서 아테네가 맹주인 델로스 동맹 세력에 맞서 스파르타, 코린트, 테바이가 참전했다. 아테네가 페르시아를 약화시키기 위해 감행한 이집트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고 메가라가 스파르타 편으로 돌아서면서 육지를 통한 스파르타 군의 침공로가 열리게 되자 페리클레스가 계략을 써서 스파르타와 휴전을 맺는다.(B.C.445) 


 B.C.433년에 에피담노스 분쟁이 일어나 이를 계기로 코린트와 아테네가 다시 전쟁에 들어가고 B.C.431년 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한다. 이번에도 테베, 코린트, 스파르타는 동맹을 맺고 아테네와 대적했다. 처음에는 아테네에 유리하게 전황이 전개되었다. 그러다 아테네가 스파르타의 주요 식량 제공처인 시칠리아 원정에서 실패한 후 전세가 역전된다. 마침내 B.C.404년 자랑하던 해전에서도 스파르타에 패하고 아테네는 항복한다. 


  고전 그리스 비극의 전성기가 기원전 5세기다. 3대 비극 작가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가 모두 이 시기에 활약했다. 이 책의 저자가 지적했듯이 유명한 비극의 배경이 대부분 아테네의 적국이다. <오이디푸스 왕> <안티고네>의 배경은 테바이며,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아르고스 왕가 이야기다. <메데이아>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곳은 코린트이다. 이런 정치적 상황과 비극의 내용 및 배경이 어떤 관련이 있을까? 먼저 테바이 왕가의 저주에 대해 알아보자. 


 페니키아의 티루스 왕 아게노스의 아들인 카드모스는 제우스가 납치한 누이동생 에우로페를 찾아 헤매다 그리스 테바이에 이르러 큰 뱀을 죽였다. 아테나 여신이 그 뱀의 이빨을 뽑아 땅에 던지라 조언했다. 조언에 따라 이빨을 땅에 뿌리자, 거기서 스파르토이(Spartoi), ‘씨 뿌려진 자들’이 태어났다. 카드모스가 그들 사이에 돌을 던지자 그들끼리 싸워 5명이 살아남는다. 카드모스는 이들과 함께 나라를 세우고 토착 그리스인에게 알파벳과 문자를 전해주었다. 카드모스는 아레스와 아프로디테 사이의 딸 하르모니아와 결혼하여 네 명의 딸과 아들 폴리도로스를 두었다. 막내딸이 바로 세멜레로 제우스와의 사이에서 디오니소스를 낳는다. 폴리도로스의 아들이 랍다코스이며 랍다코스의 아들이 바로 오이디푸스의 아버지 라이오스다. 라이오스는 한때 아르고스에서 지냈는데 펠롭스가 총애하던 사생아 크리니코스를 강간해 자살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펠롭스에게 “네 자식이 너를 죽일거다”라는 저주를 받는다. 오이디푸스의 비극이 여기서 연원한다. 



 아티네인은 테바이의 건국왕 카드모스가 페니키아에서 온 이방인 출신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아테네와 테바이는 페르시아 전쟁 이전 두 폴리스의 접경지대 플라타이아이를 둘러싸고 분쟁을 벌였고, 페르시아 전쟁 때는 테바이가 페르시아에 협력해서 아테네와 적국이었으며,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도 서로 치열하게 싸웠다. 아테네 입장에서 국경을 맞댄 앙숙인 테바이의 건국자가 이방인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면 그리스 토박이로서 아테네인의 자부심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또, 라이오스가 파렴치한 짓을 저질러 저주를 받아 이후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의 비극이 일어났다고 지적한 이유는, 적국 테바이를 심리적으로 짓밟고, 외교적으로 공격하려는 의도를 가졌기 때문이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 따르면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고 스스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된 오이디푸스는 딸 안티고네와 함께 테바이를 떠나 방랑한다. 둘은 콜로노스 지역에 도착하는데 아테네의 영향력 아래 있는 아티카 지방이다. (소포클레스가 태어난 고향이기도 하다.) 주민들이 이곳은 복수의 여신들에게 바쳐진 신성한 땅인데, 오이디푸스 때문에 자신들도 저주에 휘말릴지 모르니 떠나 달라 요청한다. 오이디푸스는 아폴론의 신탁을 떠올린다. 자신이 복수의 여신들에게 바쳐진 땅에서 죽게 되며, 그가 묻힌 곳은 축복을 받으리라는 내용이었다. 오이디푸스는 아테네의 왕 태세우스를 만나길 간청한다. 마침 오이디푸스의 다른 딸 이스메네가 와서 테바이 소식을 전한다. 그의 아들 에테오클레스가 테바이의 왕이 되었으며, 쌍둥이 형제 폴리네이케스가 아르고스의 힘을 빌어 자신이 왕이 되고자 군대를 이끌고 테바이를 공격한다는 이야기다. 이와 함께 오이디푸스가 묻힌 지역의 나라가 승리한다는 신탁이 있어 크레온(오이디푸스의 외삼촌이자 처남)이 오이디푸스를 테바이에 묻어 승리를 얻으려 한다는 말도 한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누구의 편도 들지 않을 것이며, 테바이가 아닌 이곳 콜로노스에 묻힐 거라고 대답한다. 태세우스가 와서 오이디푸스를 돕겠다고 한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아티카 땅에 묻히면 아테네에 축복이 될 것이며, 장차 테바이가 아테네를 침략한다면 아테네가 승리하도록 돕겠다고 말한다. 


[프랑스 화가 샤를 잘라베르(1819~1901)의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1842, 유화, 115㎝×147㎝) 프랑스 마르세유미술관 소장]



 아테네가 테바이와 피터지게 싸우는 시기에 이런 비극 내용이 나온 이유가 뭐겠는가? 테바이는 오이디푸스를 추방해 방랑하도록 만들었지만 아테네는 저주에도 불구하고 그를 받아들이고 영원한 평온을 약속한다. 아테네의 도덕적 우위를 드러내는 내용이 아닌가? 또, 고대 그리스 인에게 매장과 무덤은 무척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안티고네>에서 안티고네가 죽은 이유는 테바이 왕 크레온이 금지했음에도 오라비를 매장해 장사지냈기 때문이다. 테바이의 영웅 오이디푸스의 무덤이 아테네 지역에 있다면 아테네가 테바이의 영웅이 지니는 상징적 위상을 가지게 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처럼 소포클레스는 적국 테바이가 저주가 넘치는 나라이며, 영웅 오이디푸스조차 아테네 편으로 만들어 아테네의 우위를 확인하려고 했다.


 소포클레스 이전 전승에서 오이디푸스 이야기는 좀 다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따르면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일은 사실이지만, 그가 사실을 안 후에도 테바이의 왕으로 지냈으며, 장님이 되지도 않았다. 물론 아테네 지역에 묻히지도 않았다. 소포클레스가 다분히 의도적으로 원래 전승을 각색한 것이다. 그 의도는 앞서 말한 바와 같다. 아테네의 정치적, 도덕적 우위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이 묘사한 오이디푸스 가문의 이야기가 원래 전승을 뒤엎고 후대에 널리 퍼졌다. 우리는 원래 전승보다 소포클레스가 정치적 의도로 재구성한 내용을 더욱 친숙하게 접한다. 역사는 승자의 편이라 했던가. 아테네가 그리스 문화의 헤게모니를 쥐면서 그들 입장으로 각색된 비극이 다른 전승을 뒤엎었다. 우리는 아테네 입장에서 재구성된 신화가 마치 정통인 것처럼 받아들인다. 


 그리스 비극이 즐겨 다루는 또다른 줄기는 아르고스 왕가다. 트로이 전쟁 때 그리스 연합군의 사령관이었던 아가멤논과 전쟁의 원인인 헬레네의 남편인 메넬라오스 형제가 속한 가문이다.  


 이들 가문의 시작은 탄탈로스로 제우스의 아들이며 아나톨리아 지역 시필로스 산의 왕이었다. 그는 제우스의 아들이라 신들의 연회에 초대받았는데 신들을 시험하려고 자신의 아들 펠롭스를 죽여 요리로 만들어 신들에게 대접했다. 다른 신들은 그의 속셈을 간파하고 먹지 않았지만, 당시 딸 페르세포네가 지옥에 가서 제정신이 아니던 데메테르만 펠롭스의 어깨부위를 먹었다. 신들이 펠롭스를 부활시켜줬지만 탄탈로스는 제우스의 분노를 사 지옥의 맨 밑바닥 타르타로스에 갇혀 영원한 배고픔과 목마름에 시달리는 형벌을 받았다. 


 펠롭스는 이후 그리스로 건너갔다. 스파르타와 아르고스가 위치한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이름은 펠롭스에서 온 것이다. 그는 엘리스의 왕 오이노마오스(전쟁의 신 아레스의 아들)의 딸 히포다메이아에게 반해 청혼하는데, 오이노마오스가 자신과의 전차 경주에서 이기라는 조건을 걸었다. 펠롭스는 오이노마오스의 마구간지기 미르틸로스를 매수해 왕의 마차를 고장내 오이노마오스가 경주에서 죽도록 만들어 승리한다. 펠롭스가 목적을 달성하고 히포다메이아와 결혼하지만 미르틸로스와의 약속(왕국의 절반을 주고 히포다메이와 하룻밤을 보내는 것)을 지키지 않았다. 분노한 미르틸로스가 강제로 히포다메이아를 겁탈하려 하자 펠롭스는 그를 절벽에서 밀어 죽이는데, 이때 미르틸로스가 펠롭스에게 저주를 내린다. 이후 이 가문은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온갖 엽기적인 사건이 연이어 일어난다. 가족살해, 근친강간, 식인 등 그 내용이 정말 끔찍하다. 


 펠롭스는 히포다메이아와 슬하에 여러 자식을 두는데 그 중 아트레우스와 티에스티스가 유명하다. 아버지 펠롭스가 사생아인 크리시포스를 총애하자 아트레우스와 티에스티스는 크리시포스에게 성욕을 품고 있던 라이오스를 부추겨서 그가 크리시포스를 납치하도록 만들었다. 결국 크리시포스는 라이오스에게 강간당하다가 자살했고 펠롭스는 라이오스 왕에게 "네놈도 언젠가는 네 자식에게 죽임을 당할것이다"라는 저주를 내리고 아트레우스와 티에스티스는 동생을 죽였다는 죄로 미케네로 추방했다. 저주에 저주가 더해진 셈이다. 


 한편 아트레우스의 아내 아에로페는 시동생 티에스티스와 위험한 사랑에 빠지고 말았을 뿐만 아니라 남편이 몰래 숨겨놓은 황금빛 새끼양을 시동생에게 갖다주기까지 했으며 티에스티스는 이것으로 형을 몰아내고 미케네의 왕이 되려고 했다. 아트레우스는 이 일을 알고 티에스티스의 아들들을 죽인 다음, 손과 발만 남기고 요리해서 티에스티스에게 대접했다. 그리고 티에스티스가 먹은 고기가 아들들인 것을 알려주며 미리 잘라놨던 아들들의 손과 발로 약올린 후, 추방했다. 자신을 배신한 아에로페 또한 살려두지 않았다.


 분노한 티에스티스는 복수를 다짐하고 딸과 낳은 아이가 아트레우스에게 복수를 할 것이라는 신탁을 듣는다. 그래서 자신의 딸 펠로피아를 강간해서 아들 아이기스토스를 낳았다. 펠로피아는 아이기스토스를 수치스러워 하며 들가에 버렸지만, 목동이 그를 주워서 아트레우스에게 데려갔고 아트레우스는 아이기스토스가 조카인 줄도 모르고 양자로 키웠다. 후에 아트레우스는 티에스티스로부터 진실을 들은 자신의 조카에게 죽임을 당했으며 아트레우스의 자식들은 스파르타로 추방당했다. 그 자식들이 바로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다. 이들 형제는 각각 스파르타 왕의 딸들인 자매 클뤼타임네스트라와 헬레네와 결혼한다. 그리고 트로이 전쟁이 발발한다. 


 아이스킬로스가 지은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트로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아가멤논을 클리타임네스트라가 죽이고, 이들의 아들 오레스테스가 돌아와 아버지의 복수로 어머니와 아이기스토스를 살해한 이야기를 다룬다. 모친을 살해한 오레스테스를 복수의 여신들이 쫓아가는데 아테네에 와서 오레스테스의 죄는 정화되고, 복수의 여신들도 자비로운 여신으로 거듭난다.  


[피에르 나르시스 게렝(1774~1833)의 1822년작,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아가멤논 살해]



 아르고스(미케네)와 아테네는 복잡한 관계였다. 아테네는 페르시아 전쟁 이후 페르시아 편에 가까웠던 아르고스를 경원했다가 스파르타와 경쟁하면서 아르고스와 우호관계를 쌓았다. 특히 반 스파르타 파였던 데미스토클레스는 도편 추방 후 아르고스에 몸을 맡기기도 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간 동안 아르고스는 중립을 지키거나 아테네와 동맹을 맺기도 했다.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통해 아이스퀼로스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아르고스를 향한 경고 및 화해의 메시지이다. 아가멤논 왕가는 배신과 죽음의 저주가 가득한 왕가였으며 오레스테스 역시 존속살인이라는 저주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런 오레스테스에게 용서의 의식을 베풀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해 준 곳은 아테네다. 아테네는 아르고스의 영웅 오레스테스의 모친살해죄를 씻어준 도시이니, 아르고스는 이 은혜를 잊지 말고 아테네의 동맹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책에는 테바이와 아르고스 말고도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통해 최고의 적국이던 스파르타와 코린트가 배경인 비극에 대해서도 나온다. 스파르타의 수호신이자 영웅 헤라클레스를 치졸한 모습으로 그려낸 작품들을 소개하고 <메데이아>에서 그녀를 괴롭히는 코린트 왕가의 비윤리적인 행태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그럼으로써 아테네의 우월성과 정치적 대의명분을 확인하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지금까지 그리스 비극에 대해서는 개인의 발견이나 신의 섭리 앞에 나약한 인간의 운명, 또는 비극의 카타르시스 효과 등 문학적, 철학적 해석을 주로 했다. 그런데 비극이 창작된 당대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 역사적으로 내용을 분석하는 시도는 별로 없었다. 이 책을 통해 피와 저주, 그리고 복수가 가득한 비극이 성행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덤으로 복잡한 테바이 왕가나 아르고스 왕가의 가계에 얽힌 전설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리스 비극에 대한 이해를 다각도로 하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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