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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종화 Jun 14. 2019

종이 동물원

켄 리우 단편집

 아침 출근길, 지하철에 올라타 전자책 앱을 실행한다. 최초로 세계 3대 SF 문학상을 석권한 중국계 미국인 작가 켄 리우의 단편집 <종이 동물원>을 펼친다. 얼마나 놀라운 상상의 세계가 구성되어 있을까? 아니면 어떤 기발한 이야기가 나올까? 명성에 걸맞는 훌륭한 작품을 기대하며 첫 단편, 표제작인 <종이 동물원>을 읽기 시작한다. 어라, 기대하던 내용이 아니네. 미국인 아버지와 중국인 어머니를 둔 화자가 미국에서 나와 같은 시대를 보낸다. 실제과 다르지 않은 익숙한 현실 세계다. 게다가 화자가 나와 같은 74년 호랑이 해에 태어난 동갑내기다. 원래 소설을 읽을 때, 감정을 이입하는 대신 한 발 떨어져 관찰하듯 읽는데 이 책은 그렇지 않다. 나도 모르게 화자에 이입된다. 


 어머니의 마법과 같은 사랑이 차별의 세상을 넘지 못하고 자식에게 전해지지 않는다. 인종차별, 부모와의 단절, 때늦은 후회. 충분히 예상 가능한 낯익은 신파가 전개된다. 그러나 유려하지만 담담한 문체가 자아내는 특유의 은은한 분위기 덕에 오히려 글 속으로 더욱 깊이 빨려든다. 그리고 눈물이 터질 것을 예감한다. 제길! 지하철이 아니라 집에서 혼자 읽을걸. 어머니가 화자에게 남긴 편지를 읽으며 지하철 구석에서 울음을 삼키는데 며칠을 쓰고도 남을 정신력을 쏟아붇는다. 책을 읽기 전에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내용과 충격이라 어질어질한 기분이다. 


 출근 후, 마음을 가다듬고 일을 한다. 잠시 여유가 생겨 다시 전자책 어플을 실행해 다음 단편을 펼친다. 첫 작품에서 이미 허물어진 경계는 다시 생기지 않는다. 관찰자가 느긋하게 관조하는 마음은 사라졌다. BTS를 대하는 아미처럼 책을 본다. 요기(妖氣)가 사라진 시대, 스팀펑크식 기계의 힘으로 다시 사냥을 시작하는 여우요괴 이야기가 나온 <즐거운 사냥을 하길>. 어디서 본듯하다. 아!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시리즈 <러브, 데스, 로봇>에 한 에피소드로 나왔지. 강시와 여우요괴를 퇴치하는 도사가 있는 환상 세계가 숨가쁘게 증기기관과 톱니바퀴가 가득한 스팀펑크 시대로 넘어간다. 저자는 크롬으로 덮힌 매끈한 기계몸을 마치 페티시즘에 사로잡힌 듯, 몽환적인 아름다움이 넘실거리게 묘사한다. 크롬 여우의 날렵한 모습을 나도 만지고 싶다. 요사한 기운과 기계의 힘은 다르지 않다. 맨몸과 기계몸은 같은 목적일 때, 똑같은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자유 앞에 우리는 평등하다. 


 영혼이 사물에 깃들어 있고, 그 사물이 없어지면 영혼도 사라진다. 그러면 주인도 곧 죽는 상상의 세계가 나를 맞이한다. 영혼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성숙하는 사람의 이야기 <상태변화>를 읽는다. 작은 얼음에 자신의 영혼이 들어있는 리나는 그 얼음이 녹을까 노심초사한다. 그러던 어느날 직장동료 지미의 사무실로 들어가 얼음이 다 녹아버릴때까지 그와 사랑을 나눈다. 그래도 리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우리를 둘러싼 굴레가 제아무리 강해보여도 대개는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파자점술사>에서 간선생이 말하듯이 ‘중국’이니 ‘일본’이니 하는 것은 그저 낱말로서 존재할 뿐, 실체가 아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이념이 인간을 구속하고 제약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렇게 굴러간다. 국가나 민족, 이념이 환상이라면 영혼 또한 마찬가지다. 영혼은 숭고한 영적 세계와 관계를 맺기 위해 우리가 상상해 지어낸 것이다. 우리가 만든 것이 우리를  다스리는 전도의 역설이 바로 근대의 본질이라고 가라타니 고진은 간파했다. 리나는 마음에 둔 남자와의 정사를 통해 영혼의 굴레를 벗어난다. 인간이 가지는 자연스러운 욕망을 부끄럼없이 추구하고 충족하는 일은 영혼의 구속마저 깨뜨린다. 


 인간이 문자를 발명해 글을 쓰고 기록을 남긴 일은 인간 자신과 세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내용이 먼저 정신에서 나와야했다. 이는 공동체와 별개로 존재하는 개인을 창출했다. 개인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통일된 자아를 가진 존재로 거듭난다. 문자 기록이 수많은 사람을 하나로 묶어 거대한 문명을 창조할 수 있게 만들었다. 또, 다른 인종, 언어, 종교를 가진 사람들도 하나의 목적으로 묶을 수 있다. 이처럼 문자는 문명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지구가 아닌 외계에 지적 생명체가 존재한다면 그들은 어떤 식으로 기억을 남길까? <고급 지적 생물종의 책 만들기 습성>은 외계인이 지혜를 전수하는 방법, 즉 책을 만드는 방식을 소개한다. 


 알레시아인은 인간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LP판을 만들어 기록을 남긴다. 그들은 가늘고 단단한 주둥이로 진흙이 얇게 덮인 금속판을 긁어서 글을 쓴다. 글을 쓰는 동안 생각을 소리내어 말해서 주둥이가 위아래로 떨리면서 기록재의 표면에 홈이 파인다. 읽을 때는 역시 주둥이로 홈을 훑어 나간다. 그러면 진동이 일어나 글쓴이의 목소리가 재현된다. 글쓴이의 어조, 음성, 리듬이 그대로 재현되므로 무척 우수한 글쓰기 방식이지만 지구의 LP판 처럼 읽을 수록 책이 파손된다. 그래서 알레시아인은 가장 중요한 책들은 밀봉해서 보관하고 원본을 듣고 해석해서 재구성한 책들을 통해 알려진다. 이것은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성경에 대한 수많은 해석이 있어 각 종파 별로 수십 만의 목숨이 희생되는 전쟁이 일어나기도 한다. 성경 뿐일까? 오이디푸스 가문의 전설이나 아가멤논 가문의 저주는 온갖 다양한 전승으로 변형되어 어느 것이 원래인지 구별할 수 없을 지경이다. 우리는 가장 중요한 원본은 읽을 수 없고 그 원본을 충실히 재현했다 주장하는 갖가지 해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사실은 파묻혀있고 진실은 인간의 기억처럼 재구성된다. 재구성한 기억이 자아를 만들지만 우리는 자아가 기억한다고 여긴다. 이와 같이 만들어진 진실은 우리를 규정하고 지배한다. 


 <상급 독자를 위한 비교 인지 그림책>에는 다른 외계인이 기억하는 방식들이 나온다. 인간이 기억하는 방법과 무엇이 다를까? 외계인의 방식이라는 것도 사실 인간이 기억하는 여러 형태(라고 주장되는 바)의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 이 단편에 나온 말대로 인간의 “생각은 압축의 한 가지 형태”이다. 우리가 감각하는 모든 정보들을 기억하기란 불가능하다. 시각의 경우 모든 광양자 하나하나를 어찌 분간하겠는가? 청각의 경우 모든 파동을 세심하게 구별할 수 있을까? 후각의 경우 모든 분자의 화학작용을 인식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인지하는 것은 받아들인 정보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 일부분을 통합해 ‘이야기’로 재구성한 것이 기억이다. 그래서 기억은 압축이다. 틱톡인은 우라늄으로 이루어진 생명체로 원자핵이 분열할 때 나오는 중성자의 궤적이 곧 생각과 기억이 된다. 그렇다면 틱톡인이 자유의지와 사고능력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핵분열 과정이 사고 과정이라면 이는 물리 법칙에 따라 흘러가는데 지나지 않는가? 그런데 우리의 사고도 마찬가지 아닌가? 신경세포가 흥분하고 흥분이 전달되는 과정은 철저하게 물리적이며 화학적인 반응에 의존한다. 이 과정 어디서 의식과 생각이 나오고 굳은 의지가 생겨나는 걸까? 우리는 태초에 규정된 존재인걸까?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어떻게?


 책에 홀린듯 읽어나가니 어느덧 마지막 단편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 - 동북아시아 현대사에 관한 다큐멘터리>에 이른다. 중국계 미국인 역사가와 일본계 미국인 물리학자 부부가 양자 얽힘 현상을 이용해 과거의 특정한 장소를 홀로그램처럼 볼 수 있는 시간이동 장치를 개발한다. 양자 얽힘을 이용하기 때문에 한 번 방문한 과거로는 다시 갈 수 없다. 관찰로 인해 양자 상태가 깨어지기 때문이다. 이들이 이 장치를 만든 이유는 우연히 731 부대의 생체 실험에 대해 알아서다. 부부는 이 장치의 개발을 알리고 지원자를 모집한다. 그런데 역사를 둘러싸고 중국, 일본, 미국, 731부대원, 피해자의 가족 및 후손 사이에 복잡한 갈등이 일어난다. 역사의 진실은 언제나 정치적 목적에 따라 달라진다. 이 작품은 그러한 사실을 다큐멘터리 기록 형식으로 담담하게 묘사한다. 이 단편은 역사의 구성을 둘러싼 갈등이 낳는 아픔을 잘 보여준다. SF 소설의 묘미는 물리법칙과 규범법칙의 대립에 있다. 우주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물리법칙과 달리 규범법칙은 상황에 따라, 맥락에 따라 다르다. (실제로 실현가능해 보이지는 않지만) 과거여행을 가능하게 한 물리법칙은 변함없고 확고하다. 그러나 이것이 목적한 역사적 진실을 둘러싼 입장은 저마다 다르다.


 역사가 재구성되는 과정을 하나의 예로 설명하겠다. 스핑크스를 물리친 테베의 영웅 오이디푸스 가문은 왜 그렇게 비참한 운명에 빠져들었을까? 왜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아가멤논 가문은 근친살해, 근친강간, 식인, 반복되는 피의 복수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까? 그리스 비극은 아테네인이 아테네에서 상연한 공연이다. 비극의 전성기에 아테네의 적국은 오이디푸스가 왕이었던 테바이였고, 아가멤논이 왕이었던 아르고스였다. 남북대결이 극에 달한 박정희, 전두환 정권 때, 북한 김일성 가문을 과장되게 폄하했던 <똘이장군>을 기억한다. 아테네인은 적국의 과거 영웅들을 저주받은 사람으로 묘사해 적국에 대해 도덕적, 정치적 우위를 확인하려 했던 것이다. 다른 전승에 따르면 오이디푸스 가문이나 아가멤논 가문이나 그렇게 비극적인 결말이 아니다. 아테네가 그리스 문화의 헤게모니를 가진 이래 그들이 재구성한 비극이 다른 전승을 압도해 버렸다. 




 책을 다 읽고 생각한다. 내가 왜 이렇게 이 책에 빠져들었을까? 울음을 참느라 에너지가 고갈될 정도였던 <종이 동물원>도 대만의 비극적 역사에 깊이 몰입했던 <파자 점술사>도 충분히 예측 가능한 신파에 해당하는 이야기다. 관동대지진 때 일본인들이 조선인에게 저지른 만행을 아는 나로선, <모노노아와레>에서 소행성으로 지구가 멸망할 것이 확실한데 얌전히 집으로 돌아가는 일본인들을 묘사한 장면에서 헛웃음이 나기도 했다. 등장인물들은 다들 냉철하고 사려 깊다. 타고난 악인도 없다. 인물에서 특출한 매력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가장 SF다웠던 <파(波)>는 읽을수록 아이작 아시모프 단편 <최후의 질문>과 비슷했다. 단점이 많은데 왜 몰입했지?


 저자 켄 리우는 동양을 잘 교육받은 미국 지식인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서구 지식인이 근대의 모순과 부족함을 동양의 정서로 채우려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문득 내 입장이 바로 그런게 아닐까 생각한다. 서구 근대인의 의식으로 나를 채운 후, 한계에 달한 근대를 완성하기(혹은 넘어서기) 위해 동양의 지혜를 일부 빌어오는거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정서에 이입하지 않았을까? 책의 분위기가 좋기도 했다. 약간은 몽환적이고, 과잉이 없이 은은하게 흘러가는 유려한 문체 덕분이다. 그리고 작품에 등장한 고고한 인물들의 지혜로운 말들이 좋았다. 탈속한 신선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차분하고 관조적인 인물은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의 이미지다. 나는 <파자점술사>에 나온 간선생처럼 늙고 싶다. 내가 이 책에 감정이입할 여러 조건이 갖추어져 있다.


 이 글을 쓰면서 마무리할 때다. 이제는 처음의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한계와 단점이 없는 책이 어디 있을까? 이 책은 어느 누가 읽어도 충분히 감동을 느끼고, 사고의 폭을 넓히는 상상력을 보여주며, 가슴 아픈 역사를 돌아보게 만든다. 여우요괴부터 먼 미래 파동으로 존재하는 인간까지 넘나드는 드넓은 상상의 공간이 머릿속에 펼쳐진다. 기억과 역사에 대한 진지한 접근은 숙연한 마음가짐으로 현실 세계의 모순을 지적한다. 익숙한 이야기는 식상하지 않고 오히려 친근감을 주어 독서에 몰입하도록 만든다. 아름다워서 슬픈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이 책을 쉽게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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