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종화 Jun 23. 2019

프랑켄슈타인

낭만주의 미학 비판

  메리 셸리가 21세에 발표한 <프랑켄슈타인(1818)>은 최초의 SF(과학소설)로 인정된다. 괴물의 탄생과 성장이 당대에 알려졌던 과학적 사실에 기초해 창작되었고, 과학기술이 남긴 유산이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한편, 소설 자체보다 그 안에 등장한 괴물(흔히 프랑켄슈타인이 괴물 이름이라 오해하지만 괴물을 창조한 사람이다)이 더 유명하다. 또, 작가의 생애와 관련해 여러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어 이야기거리가 끊이지 않는 작품이기도 하다. 근대를 대표하는 과학과 지식의 발전, 남편 퍼시 셸리를 비롯해 당대 지식인들이 향유한 낭만주의적 세계관, 어머니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영향과 저자의 굴곡 많은 인생사가 이끈 여성주의 등 이 작품에서 탐구할 수 있는 내용은 무궁무진할 지경이다. 나는 책을 읽고 나서 괴물이 선한지 악한지, 사람들이 괴물을 외모로 판단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1931년 영화 <프랑켄슈타인>에서 괴물의 모습]



 어릴 때부터 자연과학에 심취한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독일 바이에른에 있는 잉골슈타트 대학에 진학한다. 그는 ‘발생과 생명의 원인’을 터득하고 실제로 실험한다. 빅터는 시체들의 조각을 모아 ‘생명의 불꽃’을 주입해 피조물을 탄생시키지만 추악한 모습에 놀라 그를 내버려두고 도망친다. 버림받은 괴물은 정처없이 떠돌다 프랑스 몰락 귀족 출신인 드레이시 가족 곁에 몰래 정착한다. 그는 드레이시 가족을 관찰해 말과 글을 배우며 성장한다. 괴물은 인간적인 소통을 갈구하며 드레이시 가족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흉측한 외모 때문에 공격을 받고 자신이 증오와 경멸의 대상임을 깨닫는다. 창조주를 찾아가기로 한 그는 실수로 빅터의 동생을 죽이고 만다. 빅터와 대면한 괴물은 자신이 살아온 과정을 말하고, 자신과 비슷한 여자괴물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한다. 빅터는 처음엔 괴물의 요구를 받아들였지만 결국 또다른 괴물을 만들어 인류에 위협을 줄 수 없다는 이유로 포기한다. 분노한 괴물은 빅터의 친구와 약혼자를 죽이고, 빅터는 복수를 다짐하며 괴물의 뒤를 쫓아 북극해에 이른다.


 괴물이 빅터를 처음 만나 자신의 삶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는 부분을 보면 마치 ‘빈 서판(tabula rasa)’ 이론에 근거해 창조주인 빅터에게 분노하는 듯이 보인다. 이 이론은 계몽사상가 존 로크에서 유래한다. 로크는 “인간은 태어날 때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았으므로, 어떤 것도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사람들의 행동이나 생각이 태어난 후 교육(양육)에 따라 결정된다는 뜻이다. 루소가 주장한 ‘자연 상태의 인간’, 또는 ‘고상한 야만인’이라는 생각도 여기서 근거한다. 괴물의 말에 내재된 논리는 다음과 같다. 자신은 처음 빅터에 의해 창조된 그때에는 비어 있는 서판처럼 백지였다. 이 백지를 어떻게 그리느냐에 따라 어떤 존재인지 결정될 것이다. 그러나 창조자(빅터)에게 버림받고, 흉측한 모습이라 사람들로부터 증오와 경멸을 받다보니 분노와 울분에 가득찰 수밖에 없다. 자신이 보통 인간과 다르다는 점은 알았으니 나와 비슷하게 생긴 여자 괴물을 만들어 달라. 그녀와 함께 둘이서 세상 외딴 곳에서 살아가겠다. 그런데 빅터는 이 절절한 요구조차 들어주지 않는다. 


                                      [빈 서판, 아무 내용도 없으므로 뭐든 적을 수 있다.]


 사람들은 괴물의 처지에 많이 공감한다. 인공적으로 태어나 괴물같은 모습을 가졌으며, 창조자(부모)조차 그를 버렸고, 세상 누구와도 따뜻한 정을 나누지 못했다. 자신과 대등하게 소통할 누군가를 만날 마지막 기회도 얻지 못했다. 이런 사람이 범죄를 저질러 언론에 나온다면 많은 이들이 동정할지도 모른다. 그가 범죄자가 된 이유는 그 자신의 성품보다 사회적 환경에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만약 여러 명을 죽인 살인자라면? 괴물은 우발적으로 첫 살인을 저질렀다. 그러나 나중엔 복수를 위해, 자신에게 직접 해를 가한 적 없는 사람을 의도적으로 살해했다. 그래도 그를 옹호할 수 있을까? 


 선악을 판단하려면 먼저 괴물이 인간인지부터 따져야 한다. 괴물이 인간이라야 그가 선한지 악한지 판단하는 일이 의미가 있다. 우리는 침팬지나 고릴라에게 선악을 묻지 않는다. 그런데 이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인간과 인간성에 대해 정의를 내려야 하는 작업이다. 그래서 나는 괴물이 인간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 선악을 판별할 수 있는 존재라 가정하고 이야기를 이어나가겠다. 괴물 뿐만 아니라 저자도 옹호하는 듯 보이는 ‘빈 서판’ 이론에 따르면 괴물의 본성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탄생 이후 그가 어떻게 자라는가에 따라 행동과 생각이 정해진다면 구태여 본성을 따질 필요가 없다. 괴물이 잔혹한 살인자가 된 이유는 가족의 사랑 대신 증오를 받으며 성장했고,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지지를 받는 대신 경멸을 받으며 고립된 채 자랐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생물학이 밝혀낸 과학적 사실에 따르면, 인간의 현재 (행동과 생각을 아우른) 성품을 결정하는 단일한 요인은 없다. 그것은 한 사람이 타고난 유전적 요인과 주변 환경이 서로 복잡한 상호작용을 해서 나타난 결과이다. 어떤 특성을 발현하는 유전자가 DNA안에 있더라도 항상 이 특성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 유전자가 전사되어 단백질을 만들어야 그 특성이 비로소 발현된다. 여기에는 유전과 우연과 환경이 모두 관여한다. 그러면 이 특성은 다시 환경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바뀐 환경은 다시 개체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런 상호작용이 복합적으로 일어난다. 그러므로 어느 부분은 타고났고, 어느 부분은 환경의 영향이라고 정확하게 구별할 수 없다. 괴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가 불우하게 성장한 경험이 그를 뒤틀리게 만든 커다란 원인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애초에 그가 타고난 소인 또한 작용했다. 


 불우하게 성장한 모든 사람이 증오를 품고 누군가를 죽이는 복수를 하지 않는다. 부모의 사랑과 사회적 지지를 아낌 없이 받은 잘 교육받은 사람도 세상을 놀라게 만든 연쇄살인마가 될 수 있다. 어쩌면 괴물의 경우 보통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수준 이상으로 가혹한 환경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다르다고 항변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19세기 초엽, 유럽의 빈민들이 어떤 환경에서 살았는지 관찰한 글을 보면 오히려 괴물의 경우보다 더욱 처참하다. 그렇다고 그들이 다 극악한 범죄자가 되었는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괴물이 아무리 불우한 삶을 살았어도, 누군가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은 사람을 죽인 잔혹성을 볼 때, 그는 악하다. 


 괴물이 빅터와 나누는 대화나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월턴에게 하는 말을 보면 괴물이 당대 지식인 이상으로 지성을 갖추어 논리적으로 유려한 언어를 구사한다. 그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자신이 하는 행동이 무슨 의미인지, 어떤 결과를 낳는지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괴물은 자신의 의지로 모든 일을 저질렀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한다. 그럼에도 독자들이 괴물에게 공감하는 이유는 뭘까? 메리 셸리는 괴물에게 자신을 투영했다. 19세기 초반, 가부장제가 여성을 억압하던 시대에 재능 있는 여성이 마주한 억압과 차별이 곧 괴물이 겪는 고통이라 할 수 있다. 여성이나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도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괴물의 처지에 감정이입을 하지 않겠는가? 독자는 작품에 잘 드러나지 않은 피살자의 입장보다 긴 독백으로 삶의 질곡을 고스란히 표현한 괴물의 이야기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작품 안에서 누군가의 아름다움은 곧 선함으로 여겨진다. 빅터가 이상적인 여인으로 사랑을 바치는 약혼녀 엘리자베스의 아름다운 미모는 여러 번 언급되는데 그녀의 착한 성정과 짝을 이룬다. 드레이시 가족을 찾아온 사피는 언어가 다름에도 아름다운 미모에 반한 펠렉스의 반려가 되어 이내 가족 구성원으로 들어간다. 반면, 괴물은 태어날 때부터 생김새 때문에 빅터에게 버림받는다. 괴물을 따라 북극해에 다다른 빅터는 탐험선 선장 월튼에게 괴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놈은 말이 유창한 데다 아주 설득력 있게 말하거든요. 한때 나도 놈의 말에 감동했으니까 말이에요. 하지만 놈을 믿지는 마세요. 그 형체만큼이나 놈의 영혼은 배신과 악마의 악의로 가득 차 있어요. 놈의 말을 듣지 말아요.” 유려한 언변을 갖춘 그의 지성에 속지 말라! 괴물의 악은 보이는대로 판별할 수 있다. 


 단순히 외모를 보고 선악을 판단하는 모습이 불편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본능에 가까운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올해 칸느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기생충>에서 상층 계급을 대표하는 캐릭터가 하층 계급의 ‘냄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장면이 무척 강렬하지 않았던가? 20세기 초, 조지 오웰도 그의 저서에서 계급 사이에 놓인 심연을 ‘냄새’에 얽힌 일화로 나타냈다. 얼굴, 냄새, 의복, 인종은 사람을 구별해 판단하는 가장 기초적이며 직관적인 방편이다. 메리 셸리의 시대에는 당대 유행하던 학문의 영향으로 그런 경향이 더욱 강했다.


 우선 당시 의학서에 ‘괴물’이 당당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수태의 순간에 잘못된 원인에 의해 생겨난 기형아를 당시의 의학서들에서 “괴물(monster)”이라 지칭했다. 알렉산더 해밀턴이 쓴 <outlines of the theory and practice of midwifery 1792>을 보면 “괴물”이라는 소제목 아래에 태아의 기형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프랑켄슈타인>에 나온 괴물이 어떤 식으로 취급받았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가? 


 또, 골상학이 유행한 사실도 있다. <개인의 발견>이라는 책에 따르면 골상학은 근대 초기에는 ‘몸에 대한 지식’의 정수였다. 이 지식은 “인간에 대한 지식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촉진하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했다. 골상학은 또한 미술과 미술 감상 및 태동하는 인류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골상학은 자연 연구자와 계몽 시민이 가장 열심히 몰두했던 분야였다. 1770년경 부터 1800년까지 골상학을 연구하는 것은 대유행이었다. 스위스 신학자 요한 카스파르 라바터(1741~1801)는 “골상학을 인간의 외모를 통해 내면을 인식하는 기술”이라고 정의했다. “다시 말해서 바로 지각되지 않는 것을 자연스러운 표현을 통해 인지하는 기술이다.(……) 모든 표정, 윤곽, 모든 적극적 소극적 행동, 인체의 모든 부분들, 수동적이거나 혹은 능동적인 인간을 직접 느낄 수 있는 모든 것들, 인간이 자신을 드러내는 모든 것들이 바로 골상학의 대상들이다.” 라바터는 인간의 외모에서 내면을 읽어내는 기술을 가르치는 골상학의 목적이 인간의 인식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골상학이 인간 인식의 학문이며, 인간의 자기인식의 학문이라는 점에서 더욱더 그러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격렬한 논란을 불러일으킨 육체미와 도덕미와 통일에 대한 주장을 연구의 핵심 과제로 삼았다. “도덕적으로 훌륭하면 할수록 더 아름답다. 도덕적으로 열등하면 할수록 더 추하다.” 


                               [1894년 독일의 프리드리히 에두아르트 빌츠가 그린 골상학 차트]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만 존재 의미가 있던 인간이 근대에 들어서 독립적인 ‘개인’으로 ‘발견’되고 ‘구성’되었다. 개인이 나타나기 위해서 반드시 자기인식이 있어야 했다. 개인에게는 자아와 내면이 있다. 개인은 스스로가 자신 안에 있는 자아와 내면을 들여다보며 반성적 사고를 하는 존재다. 그런데 내면을 알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나도 나 자신을 모르겠다는 말이 얼마나 많은가? 내면을 알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이 외모를 통해 내면을 파악하는 것이다. 바로 골상학이다. 


 최신 학문의 영향과 19세기에 들어 마침내 전 세계를 거의 지배하게 된 유럽문명은 자신들이 다른 문명권과 구별되는 우월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근대 유럽인은 주체와 객체를 구별해 객체를 대상으로 여겼다. 유럽이 주체라면 나머지는 객체이며 대상이 되어 주체의 지배 아래 놓인다. 과학기술, 자본주의, 식민지배는 이런 사고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유럽인은 개인 차원에서도 다른 객체인 인류와 달라야 했다. 아니 다르고 싶었을 것이다. 이를 정당화하는 학문으로 골상학이 인기를 끌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기는 당연한 일이었다. 악은 언어적 논리를 통해 드러나지 않고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이 시각으로 자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유명인이 남긴 말들이 이를 보여준다.  알렉산더 포프(1688~1744)는 “악은 너무나 끔찍한 외양의 괴물이라서 보기만 해도 반드시 증오하게 된다.”고 말했고 사무엘 존슨(1709~1784)은 “악은 보임으로써 언제나 혐오감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미학은 낭만주의와 연관된다.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에 따르면 낭만주의에 이르러 ‘숭고’함의 미학이 생겼다. 원래 알프스 산맥은 인간의 교통을 방해하는 위압적인 자연에 지나지 않았다. 루소가 알프스를 오른 이후에야 대자연의 숭고한 아름다움이란 관념이 생겼다. 에드먼드 버크(1729~1797)는 사람의 생존을 위협하는 고통이나 위험이 숭고의 감정을 일으키는 원천이라고 주장했다. 숭고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자기보존 능력과 관련되어 있는 셈이다. 이런 고통이 우리에게 실제 위협이 되지 않을 정도로 미약하거나, 우리가 안전한 위치에 있다면 우리는 아름다운 것이 가져다주는 감정을 갖게 된다. ‘공포를 띤 평온함’이 곧 숭고함이다. 


 칸트는 버크의 생각을 비판적으로 계승했다. 그도 숭고가 사람을 압도하고 두려워하게 하고 무력감을 느끼게 하는 대상에 의해 발생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칸트는 버크의 생각을 과감하게 전도한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자연보다 우월하며 그에 의해 우리들의 외부에 있는 자연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는 한, 숭고성은 자연의 사물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마음의 의식 속에 있다……우리 안에 있는 이러한 이념을 전제할 때만, 그리고 이러한 이념에 관해서만 우리는 존재자 자체의 숭고성의 이념에 도달할 수 있다.” <판단력 비판> 중에서


 숭고함의 미학에서 버크에 따르면 아름다움의 속성은 대상에게 깃들어 있다. 따라서 <프랑켄슈타인>에 나온 괴물의 추함은 괴물 자체가 추악하다는 증거가 된다. 메리 셸리는 바로 이런 점을 비판하고 있다. 빅터가 미지의 무한한 세계를 지향한 결과가 괴물인데, 정작 창조자는 피조물이 미학의 관점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외면하고 만다. 칸트에 따르면 주체가 어떤 대상을 추하다고 지각한다면 이는 대상의 추악함을 뜻하는게 아니다. 오히려 주체의 상상력과 오성이 부조화를 이루어 실패했다고 본다. 무학대사가 이성계에게 한 말이 떠오른다.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이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가 보인다.” 메리 셸리가 하고 싶었던 말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괴물이 원래는 선한 존재로 태어났지만 불행한 삶으로 인해 살인자가 되었다 해도, 그는 높은 수준의 교양과 지식을 갖추어 자신의 자유의지로 복수를 계획하고 실행했다. 괴물은 악하다. 저자는 사악함을 외모에서 추론하는 작품 속 인물들도 비판한다. 아름다움과 추함은 대상에게 있지 않고 주체에게 있다. 이는 낭만주의를 비판하는 길과 이어진다. 숭고함은 주체에서 비롯되는데 대상에게서 발견된다고 하는 낭만주의의 전도는 곧 우리가 만든 것이 우리를 구속하고 강제하는 근대의 특징적인 전도이기도 하다.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작품은 파면 팔수록 보물들이 쏟아져 나오는 고대 유적과 같다. 기회가 된다면 작품 속에 나타난 낭만주의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아보고 정리하고 싶다. 




 참고문헌 : 가라타니 고진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반 뒬멘 <개인의 발견>, 논문 <공동체의 구성원리로서 아름다운 몸과 추한 몸 -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김종갑, 영어영문학 제 51권 1호)





작가의 이전글 종이 동물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