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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종화 Jul 27. 2019

테드 창의 <숨>

자유의지가 없는 결정론의 세상에서 삶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을까?

 테드 창의 두 번째 작품집 <<숨>>을 읽으며 사고실험을 하는 느낌이 들었다. 테드 창의 주요 작품들은 자유의지가 부정되는 결정론의 세상에서 삶의 의미를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 모색한다. 영화로도 성공한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 외계인 헵타포드의 언어를 배운 주인공은 미래를 ‘기억’하게 된다. 자신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이혼하고, 딸이 사고로 죽는 일을 ‘기억’한다. 그녀는 아직 겪지 않은 일이지만, 미래의 ‘기억’을 통해 자식을 잃은 고통을 느낀다. 그것이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고통인지 ‘알기’에 자신이 아는 미래가 아닌 다른 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에게 다른 선택은 없다. 현재의 나를 만드는 것은 경험과 기억이 하나의 역사를 구성한 총체로서의 자아다. 미래의 ‘기억’도 기억으로서 현재의 나를 만든 재료다. 현재의 나는 미래의 기억도 포함된 나다. 그러므로 작품 속 주인공이 다른 길을 선택할 자유는 없다. 이는 과거를 바꿀 수 있는 자유가 없는 것과 같다. 미래를 아는데도 바꿀 수 없다면 모든 일은 결정되어 있다는 의미가 된다. 


 <<숨>>에 실린 첫 번째 작품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은 <네 인생의 이야기>와 달리 ‘시간 여행’을 소재로 했다. 연금술사 바샤라트는 과거나 미래로 갈 수 있는 문을 만들었다. 상인 푸와드 이븐 압바스는 이 문을 통해 과거로 가지만 이미 일어났던 일에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다. 단지, 과거를 더 잘 알 수 있게는 되었다. 과거로의 여행을 통해 새롭게 안 사실로 그는 수십 년 동안 간직한 죄책감에서 벗어난다. 이 문을 통해 미래로 가더라도 일어날 일이 안 일어나거나 하는 경우는 없다. 시간 여행 자체도 이미 시간선에서 일어난 일로 고정된다. 테드 창은 ‘타임 패러독스’를 이렇게 해결한다. 그렇다면 <네 인생의 이야기>와 같이 과거 - 현재 - 미래는 바꿀 수 없다. 즉, 이미 결정되어 있다! 


  ‘네이쳐’에 실렸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직접적으로 결정론과 자유의지를 다룬다. 벤자민 리벳의 실험을 그대로 구현한 것으로 보이는 작품 속 ‘예측기’는 사람의 직관과는 달리 자유의지가 허상임을 증명한다. 여기에 충격을 받은 몇몇 사람들은 자발적인 행동을 중지하는 ‘무동무언증’에 빠진다. 벤자민 리벳은 자신의 실험을 해석하면서 자유의지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버튼을 누르기로 결정한 활동전위가 발생한 이후에도 누르지 않은 경우가 있단다. 작품 속에서 언급한 바틀비처럼 진정한 자유는 선택의 자유가 아니라 하지 않을 자유가 아닐까? 그렇다면 진정한 자유의지 역시 중단하기를 결단하는 데에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지막 몸부림처럼 ‘무동무언증’에 빠지게 된걸까? 작품 속 화자는 <총몽>의 노바 박사와 같은 말을 한다. 





 “자유의지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라. 설령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어도, 스스로 내리는 선택에 의미가 있는 듯이 행동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무엇이 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당신이 무엇을 믿느냐이며, 이 거짓말을 믿는 것이야말로 깨어 있는 혼수상태에 빠지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문명의 존속은 이제 자기기만에 달려 있다. 어쩌면 줄곧 그래 왔는지도 모른다.”


 이것만으로 충분한가? 우주는 결정되어 있고, 인간의 자유의지란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인류 문명은 자기기기만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살아가는 의미는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잠깐 주제를 바꾸어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을 보자. 초소형 개인카메라가 모든 일상을 기록하고 ‘리멤’이라는 프로그램은 놀라운 검색능력으로 사용자가 원하는 부분을 정확하게 찾아준다. 화자는 저널리스트로 이런 도구를 사용하지 않다가 기사를 쓰기 위해 리멤을 사용한다. 그리고 딸인 니콜과 연관된 기록이 자신의 기억과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못된 말을 한 사람은 니콜인데 리멤이 보여준 영상에선 자신이 그 말을 하고 있다. 그는 니콜을 만나 그때의 진실을 깨닫는다. 


 기억이 사실과 다르다는 점은 이제 상식이다. 자기합리화 본능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기억을 변조하고 우리는 그것을 바탕으로 자아를 확립한다. 만약 우리가 과거로 시간여행을 간다면 기억과 다른 광경을 볼지도 모른다. 그러면 시간여행으로 본 과거는 내 과거인가? 아니면 다른 차원의 세상일까? 인간이 망각할 수 있게, 기억을 사실과 다르게 할 수 있게 진화한 점은 결정론적 세계에 내린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사건을 가지고 다르게 기억하고 해석하기 때문에 결정론적 세계에서도 의미가 가능하다. 주체는 해석하는 자다. 이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인식하는 재귀적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결정된 세계에서 새로운 것은 나 자신밖에 없다. 


 괴델은 불완전성 정리를 통해 완전무결한 수학의 체계는 없다는 점을 증명했다. 여기서 결정적인 아이디어는 자기지시적인 명제였다. 이 명제는 참이면서 증명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체계 역시 그 안에서는 무모순이라는 점을 증명할 수 없다. 결정론의 세계에도 틈이 있다. 인간이 자기인식은 괴델의 정리에서 자기지시적 명제와 논리적으로 다르지 않다. 우리는 자기인식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찾고 깨달을 수 있다. 위에 소개한 작품 속 인물들은 사실이 바뀌지 않아도 자기인식을 통해 새롭게 의미를 찾으며 삶을 긍정한다. 


 여기까지 오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헵타포드의 문자언어 기술방식은 인간의 사고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의 사고는 대개 결론이 정해져있고, 결론을 향해 나름대로 자기자신이 납득할 수 있게 사후논리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이는 빛의 경로가 굴절이냐, 변분원리냐 하는 구별이 하나의 사태에 대한 다른 관점에 지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헵타포드는 변분원리 관점으로 문장을 기술하고 인간은 굴절의 관점으로 기술한다. 바둑의 대가가 대국을 할 때,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원리를 직관했을 때, 세부적으로 진술할 수 없지만 처음과 끝으로 이어지는 전 과정을 한꺼번에 인식했다. 아인슈타인은 일반상대성원리에 대한 직관을 가졌지만 이를 기술하기 위해 미분기하학을 새로 배워야만 했다. 이런 점을 볼 때 인간의 사고와 인식도 헵타포드의 그것과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 없다. 인류는 오랜 진화의 과정을 거쳐 이런 우주에 나름대로 적응해 살고 있다. 


 과학이 종교를 밀어낸 후, 과학은 새로운 영성을 제시한다. ‘자기인식’이다. 이것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고대 그리스 델포이 신전에 걸려 있던 문구가 그 유명한 “네 자신을 알라!”다. 자기인식은 논리적으로 역설이다. 그래서 규정할 수 없는 여러 가능성을 품고 있다. 자유의지가 부정된 결정론적 세계를 수용하고 ‘자기인식’을 인간의 본성으로, 고귀한 가치로 여긴 이들은 계몽사상가였다. 데카르트 이후 철학자들의 주된 임무는 ‘자기인식’이 내포한 가능성과 결정론적 세계를 조화시키는 일이었다. 이 임무는 아직도 완성되지 않았다. 테드 창은 자기인식의 영성이 얼마나 삶을 충족시키는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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