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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종화 Aug 16. 2019

고양이 요람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

 걸작으로 칭송받는 과학 소설은 대부분 진중하다. SF는 현실 세계를 반영한 소설에서 좀처럼 부각시키기 어려운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다. 외계인과의 만남은 서로 다른 존재들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우주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과학법칙과 달리 인간 사회에서 필요한 규범법칙은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이를 통해 인간성에 대한 심오한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시간 여행을 다룬 작품은 독자가 세계의 구성원리에 대한 사고실험을 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그런데 커트 보니것의 소설 <고양이 요람>은 한없이 가볍고 냉소적이다. 


 저자는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가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연합군이 저지른 드레스덴 폭격(1945년 2월 13일~15일)을 겪었다. 이 폭격으로 ‘엘베 강의 피렌체’라 불리던 유서 깊은 도시 드레스덴은 말 그대로 잿더미가 되었고 수만 명의 민간인이 죽었다. ‘융단폭격’, ‘블록버스터’라는 말이 드레스덴 폭격에서 나왔다. 네이팜탄(소이탄)이 대량으로 사용된 폭격이기도 하다. 이 폭격에 영감을 받은 사람이 미 육군항공대 장군 커티스 르메이였다. 그가 기획한 것이 바로 도쿄대공습이다. 도쿄대공습(1945년 3월 9일~10일)으로 이십 만 명에 달하는 시민이 죽었다. 원자폭탄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낸 셈이다. 2차 대전 막바지에 펼쳐진 일련의 폭격은 한국전쟁에서 원산 폭격, 평양 폭격으로 이어졌고 베트남 전쟁에서도 이루어졌다.  



  드레스덴 폭격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커트 보니것은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이로부터 그가 왜 세상을 냉소하며 허무주의에 빠졌는지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는 이 책 <고양이 요람>에서 현대인이 얼마나 책임에 대한 윤리의식이 부족한지 드러낸다. 20세기에 있었던 대참사들은 압도적인 규모에 비해 특정한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었다. 한나 아렌트는 훗날 유대인 학살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을 지켜보고 평범한 사람도 사고를 중지한 채 명령만 수행한다면 거대한 악을 저지를 수 있다고 통찰했다. ‘악의 평범성’이다. 커트 보니것은 이를 지독한 블랙 유머가 가득한 소설로 보여준다. 




[텔레비전으로 방영된 아이히만 재판 장면]


 

 이 소설의 화자인 조나(혹은 존)는 <세상이 끝난 날>이라는 책을 쓰려고 한다. 그는 원자폭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필릭스 호니커 박사가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에 떨어지던 날(1945년 8월 6일)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박사의  아들인 뉴트 호니커에게 묻는 편지를 보낸다. 뉴트는 답장에서 그날 아버지가 갑자기 실뜨기 놀이(영어로 cat’s cradle 즉 고양이 요람)를 했다고 한다. 필릭스 호니커는 과학자로서는 탁월하지만 가족이나 일상생활, 그리고 문화 예술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조나는 직접 필릭스 박사의 자녀를 만난 후 작은 섬나라 샌 로렌조로 향한다. 그곳에서 필릭스 박사의 자녀들과 다시 만나고 대소동이 벌어지며 세계는 멸망한다. 


 제목인 ‘고양이 요람’은 영어로 실뜨기를 의미한다.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들에게 cat’s cradle이란 말은 고양이나 요람을 연상시키는 말이 아니라 반사적으로 실뜨기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필릭스는 아들 뉴트에게 실뜨기를 보여주면서 고양이가 요람에서 자는 모습이 보이냐고 묻는다. 이 에피소드는 무엇을 의미할까? ‘악의 평범성’ 개념에 따르면 조직이나 체제가 강요하는 악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비판적 사고를 해야 한다. 인간의 사고는 언어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는 데 있지 않다. ‘행간’을 읽기, 맥락에 따라 의미가 바뀌는 바를 인지하기, 동형성이 있는 다른 지식과 연결하기 같은 일련의 복합적이고 창조적인 과정이다. 필릭스는 물리학 연구에 뛰어날지 몰라도 이런 면에서는 어린 아이와 다를 바가 없다. 그는 해병대가 진창에 빠지지 않게 하는 ‘아이스 나인’을 발명한다. 그런데 이것을 잘못 사용하면 지구 전체가 얼어 버린다. 즉 세상을 멸망시킬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대수롭지 않게 ‘아이스 나인’을 장난감처럼 다루었고 그처럼 별 생각 없는 이에게 전해져 결국 세상이 멸망한다. 


 필릭스 박사가 원자폭탄을 만드는 프로젝트의 책임자였다는 소설 속 설정은 자연스럽게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원자폭탄을 만드는 맨해튼 프로젝트를 실질적으로 이끈 핵물리학자다. 그런데 오펜하이머는 필릭스와는 달랐다. 그는 2차 대전 전에 좌익 활동을 한 적도 있다. 전쟁 승리를 위해 핵무기를 만드는 거대 프로젝트에 참여했지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져 수십 만에 달하는 인명이 살상되자 핵무기 반대론자가 된다. 그는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하다가 매카시즘에 휘말려 공산당으로 몰리기도 했다.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아인슈타인은 나치가 먼저 원자폭탄을 만들기 전에 미국이 만들어야 한다는 편지를 루즈벨트에게 보내 맨해튼  프로젝트가 시작되는데 기여한 바 있다. 그러나 전쟁 승리가 확실시 되는데도 일본에 원자폭탄이 떨어지자 남은 생을 반핵 운동에 바쳤다. 1955년 저명한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과 함께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을 발표해 각국 정부에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권고하는 동시에 과학자들에게 책임을 갖고 핵폭탄 연구에 임할 것을 촉구했다. 





 이처럼 소설 속 필릭스와 달리 실제 과학자들은 과학기술이 사회과 인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모른척하지 않았다. 다른 예를 보자. 미국에서는 베트남 반전 운동의 일환으로 1969년 3월 군사 연구 최대 계약 대학인 MIT를 기점으로 약 30개 대학에서 '연구 정지' 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은 과학자들의 파업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사회적 책임에 대해 관심이 없는 과학자도 있을 터이나 과학 자체도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활동이기 때문에 대다수 과학자들은 무지하지 않다. 그런데 왜 커트 보니것은 극단적인 필릭스 박사라는 인물을 만들었을까? 


 나는 필릭스 박사는 커트 보니것의 무력감이 반영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오펜하이머가 이끈 맨해튼 프로젝트는 많은 일급 과학자들이 협력하는 체계를 만들어 국가적으로 필요한 과제를 수행한 모범 사례가 되었다. 이전에도 과학은 점차 거대 기업과 국가의 품에 안기고 있었다. 그러다 맨해튼 프로젝트가 이러한 경향에 쐐기를 박았다. 이후 수소폭탄 제조, 우주 탐사 프로젝트 등이 맨해튼 프로젝트와 비슷하게 이루어졌다. 오펜하이머가 반대했지만 수소폭탄이 만들어졌다. 나사가 이끈 달착륙은 미국의 커다란 자긍심이 되었다. 현재 우리가 감탄하는 대부분의 과학 업적은 위대한 과학자가 단독으로 이룩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협업을 통해 이루어진다. 과학자도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일개 부품에 지나지 않는다. 군인이 명령을 수행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또, 과학도 무한 경쟁에서 자유롭지 않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하는데 비판적, 반성적 사유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과학자 개인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커트 보니것의 작품은 허무주의 안에서도 가느다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가 세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이면에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다. <고양이 요람>을 처음 읽었을 때에는 별 감흥이 없었다. 블랙 유머가 별로 재미있지도 않았고, 연구에만 몰두하는 과학자의 모습은 스테레오타입 같았다. 그런데 다 읽고 소설에 대해 생각하고 다시 읽을수록 흥미가 더해졌다. 가벼움 속에서 묵직한 주제 의식을 절묘하게 녹여낸 이 소설의 진가는 곱씹을수록 드러났다. 특히, 당대에 있었던 핵무기 무장 경쟁과 과학계의 변화를 이해한다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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