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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종화 Sep 06. 2019

속죄

니체의 사상을 통해 되짚어본 속죄의 의미

 거짓말을 해서 죄를 지었는데, 또다른 거짓으로 속죄할 수 있을까? 뒤의 거짓은 예술, 그 중에서도 문학이다. 그렇다면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자. 예술(문학)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 대신 지어낸 이야기로 새로운 진실을 창조해 낼 수 있을까? 이를 통해 조금이라도 죄를 씻을 수 있을까? 이언 매큐언의 소설 <속죄(贖罪), atonement>를 읽으면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의문이다. 


 브리오니는 상류층 탈리스 가문의 막내딸로 소설가가 꿈인 14살 소녀다. 오빠 레온이 오랜만에 집에 돌아오는데 친구이자 초콜렛 회사를 경영하는 부자 폴 마셜과 함께 온다. 마침 집에는 사촌 언니 롤라와 그녀의 쌍동이 동생 형제가 와 있다. 브리오니는 이 날 기묘한 장면을 목격한다. 언니 세실리아가 가정부의 아들인 로비 앞에서 갑자기 옷을 벗고 분수로 들어가는 모습이었다. 브리오니는 로비가 세실리아에게 전해주라는 편지를 몰래 확인하는데 그녀의 성기에 키스하고 싶다는 글을 보고 경악한다. 그날 밤, 레온의 귀환을 환영하는 만찬에 초대받은 로비가 온다. 브리오니는 서재에서 세실리아와 로비가 정사를 나누는 장면까지 보게 된다. 저녁 만찬을 하려는데 쌍동이가 사라지고 이들을 찾는 와중에 롤라가 강간을 당하는 일이 일어난다. 이 장면을 브리오니가 목격한다. 브리오니는 로비가 롤라를 강간했다고 증언하며 그 증거로 자신이 훔쳐본 로비의 편지를 찾아 어른들에게 보여준다. 


 사실 로비와 세실리아는 계급을 뛰어넘어 서로에게 이성적으로 끌리고 있었다. 그러다 그날 서로의 마음을 알고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아직 어리고 성에 무지한 브리오니는 로비가 세실리아를 위협한다고 여긴다. 사춘기 소녀의 상상에서 로비는 악마적 존재가 된다. 브리오니는 롤라를 겁탈한 사람을 어두운 밤이라 확실히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날 브리오니가 겪었던 일련의 사건은 브리오니가 롤라를 겁탈한 사람이 로비가 확실하다고 ‘주장’하게 만든다.


 로비는 강간범으로 인정되어 감옥에 갖히고 세실리아는 가족과 연을 끊고 런던에서 간호사로 일한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로비는 감형을 조건으로 입대한다. 시간이 지나 자신이 한 일의 결과가 얼마나 중대한지 인식한 브리오니는 명문대 입학을 포기하고 언니가 다녔던 간호학교에 간다. 로비는 대륙에 갔다가 상처를 입고 됭케르크로 퇴각한다.


 브리오니는 실제로 부상병들을 간호하며 내면의 변화를 겪고 마침내 언니를 만날 결심을 한다. 자신의 이전 증언을 번복해 로비의 명예를 되찾아주겠다며 세실리아에게 편지도 보낸다. 그런데 그날 강간을 당했던 롤라가 폴 마셜과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경악한다. 왜냐하면 롤라를 강간한 사람이 바로 폴 마셜이었기 때문이다. 세실리아를 찾아간 브리오니는 자신의 증언을 번복하겠다 말하는데 로비가 그녀의 집에 있었다. 됭케르크에서 돌아온 것이다. 브리오니는 로비에게 사죄하며 그녀의 집을 나온다. 세실리아가 로비와 다시 만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면서.


 여기까지가 소설의 3부를 이룬다. 그런데 1999년 이라는 에필로그가 덧붙여 있다. 노년에 이른 브리오니의 회상에 따르면 3부까지의 내용은 그녀가 출간할 소설이며, 실제 로비는 됭케르크에서 패혈증으로 죽었고, 세실리아도 독일 공군의 폭격으로 죽었다. 브리오니는 자신의 죄를 항상 간직하고 살았으며 소설에서나마 그 둘을 맺어주는 것이 자신의 속죄라고 독백한다. 


  이 책을 읽은 모든 독자는 에필로그 장에서 커다란 충격을 받으리라. 롤라가 자신을 강간한 사람과 결혼했기 때문에 법적으로 로비의 범죄를 무죄로 돌릴 수는 없겠구나. 그래도 최소한 가족들에게 진실은 알릴 수 있겠네. 그리고 로비는 세실리아와 소박하게 사랑하며 살겠구나. 그나마 다행이다. 이렇게 생각하다가 실제로 그 둘은 죽었으며 브리오니는 그 둘을 만난 적이 없다는 고백에 처음 놀란다. 게다가 실제와 달리 세실리아와 로비가 재회해 살아간다는 결말을 가진 소설을 쓰고는 이것이 브리오니가 그 둘에게 하는 속죄란다. 아니 그게 뭔 소리야? 그 둘을 죽게 만든 주제에 소설을 쓴 정도가 무슨 속죄야?


  속죄(贖罪, atonement)의 의미를 먼저 알아보았다. atonement의 원래 뜻은 포로나 노예가 된 사람을 대가를 치르고 다시 사는 일이었다. 고대에는 전쟁에서 포로로 잡히면 노예로 팔리기도 하는데, 몸값을 치러야 노예에서 풀려나 자유민이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포로나 노예를 사기 위한 몸값과 관련이 있다. 여기에서 자유를 준다, 해방한다 같은 의미가 나오기도 했다. 지금도 법을 어기거나 범죄를 저지르면 그에 상응한 벌금이나 형벌을 받아야만 풀려날 수 있다. 누가 죄를 지으면 이 죄에 대해 대가를 치르고 책임이나 속박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는 일이 속죄다. 


 atonement를 자세히 보면 at+one+ment로 나눌 수 있다. 장소를 나타내는 전치사+하나+상태, 행위, 결과를 나타내는 명사형 어미의 조합이다. 한 장소에 있는 상태, 즉 둘을 하나로 만들어 화해시킨다는 의미다. atonement는 히브리어 ‘kappara’에서 왔는데 ‘덮는다’, ‘숨긴다’는 뜻이다. 또, 그리스어 ‘katallage’도 어원이 되는데, ‘화해’라는 의미다. 종합하면, 속죄란 죄를 지은 자가 책임을 지고 대가를 치르는 행위를 통해 상대와 화해한다는 뜻이 되겠다. 그래야 비로소 죄를 덮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속죄하기에 충분하다고 인정받으려면 어느 정도의 대가를 치러야 할까? 재산에 대한 침해나 신체에 대한 상해라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오랜 규준에 맞추거나, 법이 정한 처벌을 달게 받는다면 속죄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브리오니가 지은 죄는 상대의 명예를 더럽힌 무고이다. 그 여파는 컸다. 로비는 강간범이 되어 오 년 동안 감옥에서 복역했고 전쟁에 끌려가 부상으로 죽었다. 세실리아는 가족과 연을 끊고 런던에 가서 간호사가 되었다. 그녀는 로비와 제대로 만나지도 못한채 독일군의 폭격에 희생되었다. 강간 피해의 당사자인 롤라가 강간 가해자와 결혼했기 때문에 그녀는 남편을 보호하려고 로비가 강간하지 않았다는 말을 하지도 않을 것이다. 속죄의 대상이 이 세상에 없을 뿐더러, 공식적으로 명예를 회복시킬 수도 없다. 브리오니는 로비나 세실리아와 한 장소에 있지 못한다. 그녀는 어떻게 죄를 갚아야 하는걸까?


 나는 얼마 전에 다시 읽은 니체의 <비극의 탄생>을 떠올렸다. 니체는 세상이 공포와 끔찍함으로 가득하며, 사람은 고통과 고뇌를 안고 살아간다고 본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사람은 살아간다. 인간의 위대함은 그런 세상을 극복하며 창조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온다. 니체의 목표는 “인간의 삶을 포함하여 세계 전체를 오로지 인간과 세계에 공통적으로 내재하는 창조의 힘, 즉 예술적 힘의 소산으로 해명해내어, 적극적인 긍정의 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속죄는 앙갚음이 아니다. 어원에서 살펴봤듯이 최종 목적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화합하는 것이다. 죄에 얽매인 사람은 가해자와 피해자 양측 모두이므로 속죄는 둘 다 자유롭게 만들어야 한다. 이것은 속죄를 하는 당사자가 살아가야 가능하다. 만약 브리오니가 일부러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가고 그 범죄가 살인처럼 중한 범죄여서 사형을 받는다면 그것이 속죄일까? 이는 브리오니의 인생만 망가진 것이 아니라 그녀의 범죄로 다른 사람의 삶마저 망치는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면 브리오니가 교통사고를 당해 비참하게 살다가 노숙자가 되어 겨울에 얼어 죽는다면 어떨까? 남의 인생을 망쳤으니 브리오니 역시 그래야 할까? 우리는 완전한 존재가 아니므로 실수와 잘못을 반성하고 책임을 지려 노력한다. 이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그녀에게 참회와 속죄의 기회를 주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브리오니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서’ 속죄해야 한다. 그런데 속죄의 대상이 이 세상에 없다. 그녀 삶의 고통과 고뇌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리스인은 존재의 공포와 끔찍함을 알고 있었고 느끼고 있었다. 살아갈 수 있기 위해서라도, 그리스인은 그러한 공포와 끔찍함에 대해서 올림포스라는 찬란한 꿈의 산물을 내세워야만 했다……계속 살아가도록 유혹하는 삶의 보완이자 완성으로서의 예술을 낳은 동일한 충동이 올림포스 세계도 탄생시켰다.”


 브리오니는 자신의 존재가 공포이며, 끔찍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래도 살아가야 했다. 어떻게든 속죄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목표로 삼았던 소설가로 성공한다. 그리고 자신의 과오를 밝힐 자전적 이야기를 반드시 쓰기로 마음먹는다. 그리스인이 공포와 끔찍함에 대항하여 내세운 것이 올림포스 신화인데 예술 또한 같은 충동에서 나왔다. 브리오니가 속죄의 방편으로 소설을 쓰기로 한 결심은 의미심장하다. 그녀가 로비를 강간범으로 몰았던 원인이 그녀가 만든 가상의 세계였기 때문이다. 브리오니는 이방인의 유혹은 위험하며 파멸을 부르는 대신, 계급에 맞는 상대와는 행복한 결혼을 하는 전통적인 이야기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하녀의 아들인 로비가 언니 세실리아와 성적으로 결합한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고 그녀가 몰입하고 있던 세계관에서 로비를 이방인이자 악마적 유혹자의 지위에 두었다. 브리오니는 강간을 목격하자 범인은 로비임이 틀림없다고 여겼다. 위험한 악마를 그녀와 그녀 가족의 삶에서 몰아내기 위해 로비를 고발한 것이다. 


 “우리는 가상에 사로잡혀 있고 그것으로 성립되는 바, 이러한 가상을 우리는 진정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서, 즉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과율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하는 것으로서, 달리 말해 경험적인 실재로서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실재를 잠시 도외시하고 우리 자신의 경험적 존재를 세계 일반의 경험적 존재와 마찬가지로 근원적 일자가 매 순간 만들어 내는 표상으로 파악하게 된다면, 이제 우리는 꿈을 가상의 가상으로서, 가상에 대한 근원적 욕망을 보다 고차원적으로 충족시키는 것으로서 간주해야만 한다. 이와 동일한 이유에서 자연의 가장 깊은 핵심은 소박 예술가에게서 그리고 꿈과 마찬가지로 가상의 가상일 뿐인 소박한 예술작품에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즐거움을 느낀다.”


 가상 속에 빠져 있어서 지은 죄를 다른 가상, 즉 문학을 통해 속죄하려고 한다! 단, 로비를 고발할 때 사로잡혀 있던 가상과 속죄를 위해 창조한 가상은 다른 위상을 가진다. 니체가 말한 창조적 삶, 예술적 삶은 단순히 예술 작품을 만드는 직업 예술가로서 살아가는 삶을 뜻하지 않는다. 타인이나 시대의 유행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삶을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브리오니의 처음 가상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계급에 따른 결합을 옹호하는 전통적인 이야기에 빠져든 것 뿐이다. 그녀가 나중에 만드는 가상은 그녀 자신의 삶의 경험에서 나온, 그녀만이 가능한 창조적 가상이다. 


“그는 세계를 창조하면서, 충만과 충일의 고난으로부터 그리고 자신 내부의 급박한 대립의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한다. 세계는 매 순간 신의 구원이 실현된 상태인바, 세계는 가장 고통받는 자, 그 자체 내에서 가장 대립 상극하는 자, 가장 모순에 가득 찬 자인 신의 영원히 변전하면서 영원히 새로운 환영인 것이다. 신은 가상 속에서만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


 니체가 보기에 자신이 만들어내지 않은, 이미 만들어져 있는 가상의 세계에 빠져 드는 일은 삶을 고양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말하는 노예의 삶이다. 노예로서 죄를 지었다면,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는 주인으로서 죄를 갚아야 할 것이다. 노예의 비자발성, 무기력함은 자신조차 구원할 수 없다. ‘속죄’가 자신과 상대 모두를 자유롭게 한다면 주인으로서만 가능하다. 브리오니는 자신의 죄를 받아들여 자신이 짊어져야 할 고통과 고뇌를 외면하지 않았다. 자신의 삶을 살면서 어떻게든 자신과 로비, 그리고 세실리아를 구원하려고 했다. 예술은 실재가 아니라 가상이지만 삶의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 브리오니는 자신의 삶을 다해 만들어낸 가상으로서의 예술로 구원하고 속죄하고자 했다. 


 브리오니의 속죄를 진정한 속죄가 아니라고 여길 수 있다. 나 역시 니체의 책을 통해 다시 생각하기 전에는 속죄로 불충분하다 생각했다. 브리오니가 저지른 무고의 결과가 너무나 참혹했다. 그러나 브리오니의 삶도 긍정해야 한다면, 이미 세상에 없는 존재에게 속죄를 해야 한다면, 그녀가 한 일보다 더 나은 속죄가 무엇일까? 그녀는 나름의 최선을 다해 살았고 속죄하고자 노력했다. 이미 세상에 없는 이들과 화해해서 한 자리에 있을 수 없다면, 소설 속에서나마 진심을 담아 사죄하고 같이 있고 싶었을 것이다. 로비와 세실리아의 죽음 자체는 브리오니의 잘못이 아니다. 제 2차 세계 대전에서 비롯된 죽음이다. 삶을 긍정한다면, 수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는 전쟁이야말로 가장 나쁜 일이다. 소설에서, 그리고 이 작품을 영화화한 <어톤먼트>에서 전쟁의 참상을 길게 묘사한 이유를 이제 알겠다. 전쟁이 내포한 삶의 부정을 죄인이라도 살아가는 브리오니의 삶의 긍정과 대비하기 위해서다. 


 이제 이성으로는 브리오니의 속죄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여기까지 와서도 감정으로는 100% 납득이 되진 않는다. 그만큼 찬란한 젊은이의 오명과 몰락과 죽음이 안타깝기 때문이다. 속죄가 얼마나 무거운지,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는 삶이 얼마나 위대한지 이 작품을 통해 다시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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