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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종화 Nov 18. 2019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눈물

알렉산드로스의 죽음과 제국의 왕관을 놓고 벌이는 살아남은 자들의 전쟁


 알렉산드로스 대왕(B.C. 356~323)의 동방원정은 세계사 전체를 통틀어 봐도 놀라운 정복이었다. 그가 정복한 영토는 로마제국의 최전성기 영토보다 넓다. 그리스의 변방에서 일어나 로마제국보다 더 넓은 영토를 불과 10년도 안 되는 기간에 획득했다. 로마제국이나 대영제국과 같은 다른 제국이나 정복왕조는 여러 세대에 걸쳐 형성되었다. 그와 비견할 만한 칭키스칸의 정복은 몽골 통일 이후 20여 년에 걸친 일이었으며, 얻은 영토도 인구밀도가 낮은 중앙 유라시아 지역이 대부분이다. 알렉산드로스가 정복한 지역은 인구 밀도가 높은 유서 깊은 문명이 많았다. 이집트, 페르시아 같은 제국을 순식간에 정복하고 인도까지 진출했다. 그 결과 생겨난 헬레니즘 제국은 유라시아 대륙에서 커다란 의미를 가졌다. 유럽과 아시아 모두 세계를 보는 시야가 넓어졌고 상이한 문명이 교류하며 새로운 문화를 낳고 발전시켰다. 



[이탈리아 폼페이 카사 델 파우노 유적 벽면에 묘사된 이소스 전투 모자이크에 나타난 알렉산드로스의 얼굴]



 그런데 새로운 정복을 준비하던 알렉산드로스가 바빌론에서 열병(말라리아로 추정)에 걸려 33세의 젊은 나이에 죽어 버린다. 그가 정복한 광대한 영토는 부하 장군들간에 벌어진 여러 차례의 싸움 끝에 여러 개의 국가로 분열된다. 이 책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눈물>은 바로 이 과정을 추적한다. 단순히 디아도코이(‘후계자들’ 이라는 뜻,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하 장군으로 그의 사후 권력투쟁에 뛰어든 이를 일컫는다.) 사이에 벌어진 권력투쟁과 전쟁 뿐만 아니라 그 배후에 숨어 있는 문명 간의 충돌로 인한 갈등을 상세하게 이야기한다. 거대 제국이 몰락하고 분열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이야기는 <삼국지>에 비견될 수 있을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먼저 알렉산드로스 사후 일어난 주요 사건과 관련된 인물을 정리하고 그다음 왜 이렇게 역사가 흘러갔는지 따져보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연도가 기원전 323년이며 디아도코이 전쟁이 끝나 3왕국이 정립된 때가 기원전 272년 무렵이다. 이 시기 중국은 전국시대로 진나라가 상앙(B.C. 390~338)의 변법 이후 최강국이 되어 가던 시기다. 맹자(B.C. 372~289)와 장자(B.C. 365~286)가 활동하던 때이기도 하다. 이무렵 인도는 알렉산더 대왕의 군대가 물러간 이후 찬드라굽타(재위 B.C. 324~298)가 마우리아 왕조를 창건해 최초로 인도 전역을 통일했다. 로마는 한창 이탈리아 반도를 정복하며 차근차근 국력을 키우고 있었다. 


 디아도코이 전쟁 이야기를 하려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사제도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전쟁의 주역들이 모두 대왕의 부하 장군이나 장교였고, 그들이 맡은 지위와 역할이 지난한 투쟁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로스는 유명한 ‘망치와 모루’ 전술을 누구보다 잘 활용했다. 이 전술로 페르시아 제국과의 전투에서 부족한 병력과 불리한 상황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다. ‘모루’는 주로 보병을 말하는데 이들이 주전장에서 밀리지 않고 버티는 동안 ‘망치’인 기병이 적의 측면이나 후방을 타격하는 전술이다. 


헤타이로이 : 알렉산드로스 친위 기병대, 알렉산드로스는 왕인데도 기병대 최전방에서 이들과 함께 전투에 참여했다. 따라서 왕과 함께 돌격하는 이들의 충성과 사기는 무척 높았다. 군대 내 서열도 헤타이로이 지휘관들이 높았다. 헤타이로이 첫 대대를 지휘하는 천인대장이 서열상 가장 높았다. 헤파이스티온이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그가 죽고 페르디카스가 이 자리를 물려받았다. 영어 companion(동료)의 어원이다. 


페제타이로이 :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 보병부대


히파스피스트스 : (은)방패부대. 팔랑크스 병사들보다 장비가 가벼워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특별히 선발된 3,000명의 방패 부대는 어려운 작전을 수행하거나 알렉산드로스의 안전이 위협을 받을 때 가장 먼저 부르는 부대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인도에서 이들이 전례없이 어려운 위험을 극복한 데 감동하여 그들의 갑옷에 은을 발라주었고, 이들을 ‘은방패 부대’라고 불렀다. 


친위대 : 알렉산드로스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며 미에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교육받은 친구들로 이루어져 있다. 7명으로 왕의 최측근이다. (아리스토누스, 페이톤, 페우케스타스, 레오나토스, 페르디카스, 프톨레마이오스, 리시마코스)



 이 시대를 주름잡은 알렉산드로스의 부하 장군들(디아도코이)은 다음과 같다. 



페르디카스(기원전 365?~321) : 최선임 헤타이로이 지휘관. 친위대원. 알렉산드로스 사후 그의 인장 반지(동양으로 치면 옥새)를 물려 받아 최고 권력에 다가선다. 대왕이 남긴 제국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했다. 


크라테로스(기원전 370?~321) : 페제타이로이 지휘관. 마케도니아 군 전체에 인망이 높다. 한 전승에 따르면 대왕이 죽기 전 누구를 후계자로 정할지 물으니 ‘가장 강한 자(크라티스토스)’라는 말을 남겼는데 크라테로스를 지칭한게 아닐까 하는 가설도 있을 정도다. 알렉산드로스의 동서양 융합 정책에 반대했다. 알렉산드로스의 명으로 제대할 고참 군인들(은방패 부대 포함)을 이끌고 마케도니아로 돌아가던 중에 그의 죽음을 알게 된다. 


프톨레마이오스(기원전 367~283) : 페제타이로이 지휘관. 친위대원. 대왕 사후 일찌감치 이집트 총독으로 부임해 결국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창건자가 된다. 줄리어스 시저, 안토니우스와의 사랑으로 유명한 클레오파트라의 조상. 


안티파트로스(기원전 397~319) : 대왕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기원전 382~336) 시절부터 왕이 원정 등으로 부재할 때 섭정을 맡았다. 알렉산드로스가 동방으로 원정을 떠난 후 마케도니아 섭정을 맡았다. 대왕 사후 크라테로스와 함께 유럽을 맡고, 페르디카스가 아시아를 통치하기로 하면서 제국 섭정에 올랐다. 


안티고노스(기원전 382~301) : 프리기아의 사트랍(총독), 일명 모노프탈모스(애꾸눈). 디오도코이 전쟁 초기의 최강자.


에우메네스(기원전 362?~316) : 왕실 서기로 시작했으나 알렉산드로스 말년에 페르디카스의 자리(헤타이로이 지휘관)를 물려받았다. 그리스인으로 마케도니아 사람이 아니란 이유로 능력에 비해 어려움을 겪는다. 디아도코이 전쟁 초기의 풍운아로 이 책의 숨겨진 주인공이라 할 만하다. 대왕이 남긴 제국을 보존하려 애썼다. 만화 <히스토리에> 주인공.


폴리페르콘(기원전 394~303) :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에 종군. 최고위 지휘관은 아니었다. 안티파트로스가 남긴 유언에 따라 제국 섭정의 지위를 물려받았다. 그가 자신의 유산을 빼았았다 여긴 카산드로스와 불화한다.


카산드로스(기원전 358?~297) : 안티파트로스의 아들. 동방원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디아도코이 전쟁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손이 끊어진 후 왕이 된다. 



 이 외에도 많은 인물들이 영광과 몰락을 겪었다. 이 과정은 중요한 사건만 정리해도 몇 페이지가 되므로 간략한 경과만 언급하고 역사적 배경에 좀 더 집중해 보려고 한다. 대왕 사후 그가 건설한 제국은 안정을 잃고 곳곳에서 분쟁이 일어났다. 바빌론에 있던 부하 장군들은 대왕의 이복형(필리포스 3세)과 대왕의 갓난 아들(알렉산드로스 4세)을 공동왕으로 옹립했다. 필리포스 3세는 지능이 낮았고, 알렉산드로스 4세는 갓난 아이였으므로 이들을 보좌할 섭정이 필요했다. 페르디카스와 멜레아그로스(보병 지휘관)가 바빌론에서 아시아 지역을 맡고 안티파트로스와 크라테로스가 유럽을 맡는 섭정이 되었다. 


 아테네는 대왕의 죽음을 알게 되자 곧바로 반마케도니아 전쟁을 개시해 제국 섭정 안티파트로스를 ‘라미아’라는 작은 도시에 가두고 포위했다. 인도 북쪽에 남겨진 그리스 군인 2만 명은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주둔지를 떠났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 총독이 되어 자신의 세력기반을 탄탄하게 만들었다. 크라테로스는 마케도니아로 돌아가다가 도중에 멈춰서 정세를 관망했다. 그러다 위기에 빠진 안티파트로스의 부탁으로 그리스로 진군했다. 



* 제 1차 전쟁 - 페르디카스(에우메네스) VS 안티파트로스, 크라테로스, 프톨레마이오스, 안티고노스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더 대왕의 누이 클레오파트라와 혼인을 맺기로 했다. 이는 왕가의 일원이 되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남긴 제국 전체를 지배하려는 노골적인 의도였다. 안티파트로스와 크라테로스는 페르디카스에 맞서기로 결정하고 서둘러 그리스에서 철군해 소아시아로 향했다. 이때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시신을 옮길 준비가 끝났다. 대왕의 시신은 마케도니아 왕가의 무덤인 아이가이로 향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프톨레마이오스가 부하를 보내 시신을 가로채 이집트로 가져갔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제국을 유지하기보다 홀로 독립하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권위를 확립하기 위해 대왕의 시신을 가져온 것이다. 페르디카스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유럽과 이집트 양쪽을 상대해야 했다. 모루와 망치 사이에 끼어 있는 형국이었다.



 페르디카스 자신은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로 갔다. 대왕의 시신을 가로챈 프톨레마이오스를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었다. 대왕이 남긴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마지막 권위라고 할 수 있는 대왕의 시신을 반드시 확보해야 했고 제국에서 떨어져나가 독립하려는 프톨레마이오스를 무찔러야 했다. 한편 유럽에서 다가오는 안티파트로스와 크라테로스에 대해서는 에우메네스를 보냈다. 크라테로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가장 충직한 부하 장군으로 병사들이 절대적인 신임을 보내는 사람이었다. 이와 반대로 에우메네스는 그리스인이어서 마케도니아 병사와 장군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함께 출정한 네오프톨레모스가 배신하고 크라테로스 편에 붙는 일까지 일어났다. 


 에우메네스는 이런 악조건 속에서 놀라운 능력을 발휘했다. 크라테로스가 이끄는 좌익에 대항해 그의 얼굴을 모르는 아시아인 기병대를 보내서 병사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주의했다. 자신은 직접 네오프톨레모스를 상대했다. 크라테로스는 전투 중 전사했고, 에우메네스는 일기토를 벌여 직접 네오프톨레모스를 죽였다.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승리였다. 그러나 페르디카스는 승리 대신 패배와 죽음을 맞았다. 이집트 원정에서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자 부하들(페이톤, 셀레우코스, 은방패 부대장 안티게네스)이 그를 암살해 버렸다.(기원전 321년)


* 제 2차 전쟁 - 폴리페르콘, 에우메네스, 올림피아스(대왕의 어머니), 알렉산드로스 4세 VS 카산드로스, 안티고노스, 프톨레마이오스, 필리포스 3세


 에우메네스는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상관인 페르디카스가 죽어버려서 오히려 적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그를 제국의 적으로 선포한다. 한편, 크라테로스가 에우메네스를 상대하는 동안 직접 페르디카스를 치러 가던 안티파트로스는 페르디카스가 죽은 후 구심이 없던 부대와 맞닥뜨린다. 안티파트로스는 키프로스 원정에서 돌아온 안티고노스의 도움을 받아 군대를 장악한다. 그는 왕들의 후견인이자 아시아의 총사령관으로 안티고노스를 선임하여 아시아 지역의 평정을 맡겼다. 본인은(기원전 320년) 공동왕들을 데리고 유럽으로 돌아갔다. 이로서 알렉산드로스의 위대한 실험 - 유럽과 아시아를 동시에 지배하는 군주 -은 끝났다. 이제 곧 각 디아도코이는 저마다 왕을 칭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오랜 전쟁을 벌이게 된다.


 안티고노스는 에우메네스를 추격하여 외딴 산악 지역에 있는 ‘노라’ 요새에 고립시켰다. 그런데 고령의 안티파트로스가 사망(B.C. 319)하면서 자신의 후임으로 아들 카산드로스가 아니라 폴리페르콘을 지명했다. 카산드로스가  여기에 반기를 들면서 에게 해의 주도권을 쥐는 항구도시 피레이프스(아테네와 연결된 항구)를 장악한다. 이로서 정국은 복잡해졌다. 폴리페르콘은 대왕의 모후 올림피아스와 에우메네스와 동맹을 맺었다. 카산드로스는 안티고노스, 프톨레마이오스와 동맹을 맺어 폴리페르콘에 대항해서 승리를 거두었다. 


 폴리페르콘은 잠시 에페이로스 지역으로 물러났다가 다시 마케도니아로 쳐들어갔다. 이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복 형제인 공동왕 필리포스 3세와 왕비를 잡아 죽여버렸다. 하지만 카산드로스가 되돌아와 이들을 물리쳤다. 카산드로스는 올림피아스를 왕을 죽인 죄로 재판에 넘겨 처형했다. 폴리페르콘은 그리스로 도망쳐 카산드로스에게 대항하는 세력을 모아 저항한다. 한편 에우메네스는 기지를 발휘해 안티고노스를 속여 탈출한 후 폴리페르콘의 도움으로 은방패 부대를 비롯한 군대와 자금을 얻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아시아 지역에서 세력을 키우거나 유럽의 올림피아스와 합류하려 했다. 그러나 안티고노스의 압박에 더해 이번에도 그의 출신을 미더워하지 못하는 다른 장군들 때문에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한다. 결국 에우메네스는 파라이타케네에서 벌어진 큰 전투에선 안티고노스를 이겼으나 재물을 뺏긴 부하들의 배신으로 안티고노스에게 잡혀가 처형된다. (B.C. 316)


* 제 3차 전쟁 - 안티고노스 VS 셀레우코스, 프톨레마이오스, 리시마코스


 이러한 결과 안티고노스가 제국이 가진 아시아 영토 대부분을 얻으면서 디아도코이 중 최강자가 된다. 그러자 위협을 느낀 카산드로스, 프톨레마이오스, 리시마코스, 셀레우코스 등은 동맹을 맺어 안티고노스와 대결한다. 기원전 311년에 이들은 평화협정을 맺는다. 카산드로스(마케도니아, 유럽), 리시마코스(트라키아), 안티고노스(아시아), 프톨레마이오스(이집트)는 모두 독자적으로 독자적으로 외교 및 군사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이들은 차례로 자신을 왕으로 칭했다. 그러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4세가 걸림돌이 되었다. 카산드로스는 조용하게 지내던 그를 암살한다. 대왕의 서자인 헤라클레스도 폴리페르콘이 죽인다. 이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자손은 절멸했다. 책은 여기까지만 다루는데 디아도코이들은 대를 이어서까지 쟁투를 벌여 결국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왕조,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가 정착한다. 이 왕국들은 모두 로마에게 멸망당한다.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은 만드는 데에 십여 년이 걸렸는데, 그가 죽은 후 명시적으로 분열되는 기간도 십여 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그의 자손이나 친척은 대개 불행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어째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이 책에서 그 원인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지 않았지만 곳곳에서 이 시대의 특징과 더불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1. 먼저 마케도니아 왕가(책에서는 아르가이 왕가 또는 아이가이 왕가를 혼용)가 후계자 선정 체계를 제대로 갖추지 않았다는 문제가 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자신도 즉위할 때 왕가의 남자를 너무 많이 죽여서 가문의 존속이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대왕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도 피터지는 경쟁 끝에 왕위를 쟁취했다. 그리스의 폴리스 중 아르고스의 후예를 자처하며 용맹을 뽐낸 아르가이 왕가는 경쟁을 통해 능력을 보여 얻은 왕좌를 존중했다. 필리포스 2세나 대왕처럼 능력있는 인물이 등극하면 국가가 번영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왕위를 계승할 출중할 인물이 없는 상황에 처하면 혼란이 찾아올 수밖에 없다. 대왕이 죽은 후가 바로 이런 상황이었다. 왕위를 계승할 왕가의 남자가 이복형 아리다이오스(필리포스 3세)밖에 없었는데 그는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장애를 가졌다. 대왕의 박트리아 출신 왕비가 임신중이긴 했으나 아들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았다. 마케도니아인이 아닌 (유럽에서 봤을때) 먼 변방 박트리아 출신이라 혈통이 순수하지 않다는 단점도 있었다. 게다가 외가의 지원도 구할 수 없는 갓난 아기가 어찌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그래서 대왕 사후 디아도코이들은 후계를 둘러싸고 이견을 보였다. 분쟁은 이로부터 시작했다. 아리다이오스를 단독으로 옹립하자는 견해와 임신한 왕비의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기다리자는 의견이 충돌했다. 처음부터 반란에 가까운 봉기가 일어났다. 장군들의 협상과 타협으로 겨우 갈등을 봉합했으나 이내 실력행사가 시작되었다. 만약 제국에 확실한 후계자가 있거나 왕가에서 후계자를 선정하는 엄정한 체계가 있었다면 제국은 좀 더 오래 존속하지 않았을까? 


2. 다음으로 마케도니아 사람들의 배타적인 의식이 제국을 유지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동방원정을 마치고 바빌론으로 돌아온 후 곧바로 서방원정을 준비했다. 그는 단순하게 세상을 정복하는데 그치지 않고 유럽과 아시아를 문화적으로 융합하려고 생각했다. 아시아 사람을 대규모로 유럽으로 이주시키고, 유럽인 다수를 아시아로 보낼 계획이었다. 인도에서 돌아온 후, 자신과 부하들에게 아시아 출신 아내를 짝지어 합동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다. 이는 모두 문화 융합 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그리스 문명 밖의 사람들을 야만인으로 보는 의식에 젖어 있던 다수의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출신 장교와 병사들은 이 정책에 반감을 가졌다. 대왕이 가장 신임하고 군의 신망이 두터운 크라테로스가 이 정책에 노골적으로 반대했다. 그래서인지 크라테로스는 서방원정에서 빠져 제대할 노병들과 함께 귀환할 것을 명령받았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유럽과 아시아를 융합시켜 지배한다는 구상을 가졌다면 디아도코이들은 누구도 대왕의 꿈을 이어받지 않았다. 제국을 하나로 유지하려 했던 페르디카스, 안티파트로스는 유럽과 아시아를 나누어 제국 섭정에 올랐고 군대 지휘권과 왕실 자금 인출권마저 유럽과 아시아에 따로 담당자를 둘 정도였다. 물리적, 문화적 경계가 일관된 통치를 하기 어렵게 했다.


 그러면 아시아 지역 사람들은 어땠을까? 페르시아 수도 수사와 메소포타미아의 대도시 바빌론에 사는 사람들은 알렉산드로스를 새로운 지배자로 환영했다. 그가 유럽 출신이라는 점은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통치자가 바뀐 정도로만 생각했다. 재미있는 점은 훗날 이 지역을 지배하는 셀레우코스 왕조는 마케도니아나 그리스 방식이 아닌 오리엔트 식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뜨린 후 동방의 관습을 받아들였던 것처럼 말이다. 이집트를 차지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도 같았다. 전통적인 이집트 종교와 통치를 수용했다. 유럽에서 보기 드문 남매간 결혼(그 유명한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남동생과 부부였다)이나 파라오라는 왕의 별칭을 떠올리면 이해가 갈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본거지에서 이런 아시아 방식의 통치는 절대 수용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아시아에서 그리스식 통치도 실패했다. 헬레니즘 왕조들도 결국 아시아에서 유래한 전제적 통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배타심은 제국 최후의 보루였던 에우메네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왕실 서기로 출발해 마침내 친위 기병대 지휘관에 오른 에우메네스는 대왕 사후 그 누구보다도 제국의 존속과 왕실의 안전을 위해 노력했지만 마케도니아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수없는 배신과 음모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안티고노스와의 회전에서 거의 승리했지만 병사들의(특히 은방패부대의) 재산을 안티고노스에게 뺐겼다. 에우메네스의 부하들은 재산을 돌려받는 대신 에우메네스를 안티고노스에게 넘겼다. 동맹이던 다른 장군들은 전투에서 벗어나기까지 했다. 


 이처럼 대왕 사후에 일어난 일련의 분쟁은 대왕이 시도했던 동서양 융합정책에 대한 반대와 실패에서도 비롯되었다. 만약 알렉산드로스가 오래 살아서 그만이 가능했던 카리스마적 지도력으로 이 정책을 지속적으로 밀어붙였다면 어떠했을까? 역사가 보여주듯이 결국은 실패했지 싶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생겨났을 다양한 가능성들에 흥미가 생긴다. 


3. 당시 군대의 특성상 제국을 알렉산드로스 생전처럼 하나로 유지하기 어려웠다. 고대의 군대는 현대 민족 국가에서 보여주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나 소속감이 거의 없었다. 특히 그리스 문명권은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도시 국가로서 시민병과 용병이 함께 싸웠다.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도 마케도니아 군, 그리스 용병, 아시아 현지 용병 등이 뒤섞인 군대로 이루어졌다. 마케도니아의 경우에는 왕의 등극을 인정받는 실질적인 행사가 군대의 승인이었다. 그만큼 군대를 다루기가 어렵고, 왕권보다 강력한 경우도 많았다. 대왕 사후 그의 인장 반지를 가진 실질적 일인자였던 페르디카스가 부하들에게 살해당한 경우나 에우메네스가 끊임없이 배신에 시달린 점을 보면 군대가 지휘관에게 충성을 바치는 경우는 사실 예외적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정도나 이런 군대를 휘어잡고 지배할 수 있었다. 그런 알렉산드로스조차 인도에서 원정이 길어지자 부하 병사들의 반란을 겪었다. 동방 원정을 통해 단련된 병사들은 제국을 다스리는 강력한 군주가 없으니 생명과 부를 가져다 줄 지휘관을 찾아서 배신과 반란을 거듭했다. 


 유명한 은방패 부대의 경우를 예로 볼까? 이들은 모두 백전을 겪은 노장들로 크라테로스를 따라 마케도니아로 돌아가던 중에 대왕의 죽음을 접했다. 크라테로스가 안티파트로스의 부름을 받아 그리스로 갈 때 이들은 아시아에 남겨졌다. 이들은 페르디카스 휘하로 돌아갔다. 그를 따라 이집트로 원정을 떠났는데 공략이 지지부진하고 성과가 없자 페이톤 등과 합세해 페르디카스를 죽였다. 당시 제국 섭정이던 안티파트로스는 은방패 부대에게 아시아에 있는 왕실 금고를 지키라고 명령했다. 안티파트로스가 죽고 폴리페르콘이 뒤를 섭정이 되었다. 폴리페르콘은 카산드로스 등에 대항해 에우메네스와 동맹을 맺는다. 폴리페르콘은 에우메네스를 안티고노스에 맞선 아시아 총사령권으로 임명했다. 에우메네스는 폴리페르콘의 편지를 들고 찾아와 은방패부대를 접수한다. 이들은 이후 에우메네스와 함께 하지만 안티고노스에게 재산을 뺏기자 에우메네스를 잡아 넘긴다. 알렉산드로스 휘하 부대 중 최고 최강이라 불리던 이들의 행보다. 다른 병사나 부대는 어땠겠는가?


 대왕 사후 누구도 동방원정으로 단련된 군대 전체를 휘어잡지 못했다. 군대는 더 많은 부와 승리를 가져다 줄 상관을 찾아 이리저리 헤맸다. 이 과정이 폭력 없이 실현될 수는 없었다. 이런 군대의 문제점은 사실 통치체제, 즉 시스템의 문제이기도 하다. 훗날 로마도 왕정-공화정-제정으로 정체를 바꾸면서 거대 제국을 유지했다. 조그만 도시국가의 시스템으로 거대 제국과 이를 지킬 군대를 유지할 수는 없었다. 




 이런 이유들로 볼 때, 알렉산드로스 사후 제국은 필연적으로 붕괴될 운명이었다 말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생겨난 수많은 고통과 피바람을 지금 우리는 다 알 수 없다. 나는 중국의 후한이 무너진 후 일어난 군웅쟁패의 과정을 <삼국지>라는 문학으로 보듯이, 대왕 사후의 역사를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만났다. 거대한 제국이 순식간에 무너져 갈라질 때 일어나는 엄청난 폭력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스펙타클로 다가올 뿐이었다. 억지로 교훈을 끌어내고 싶지는 않다. 잘 모르던 역사를 알아가는 일만으로도 행복하다. 요즘 <기생수>의 작가 이와아키 히토시가 에우메네스를 주인공으로 하는 역사만화 <히스토리에>를 연재하고 있다. 아직 알렉산드로스가 왕이 되지도 않은 시점인데 향후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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