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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종화 Nov 21. 2019

체실 비치에서

'진정성'의 의미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란 실로 어렵다. 만약 진심어린 감정을 솔직하게 말한다 해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마음은 도달하지 못하고 의미를 잃는다. 때론 진심보다 자존심과 오기가 더 강해서 마음을 가라 앉혀 버리고 어두운 감정을 만들어낸다. 진심과는 달리 뒤틀린 감정은 반드시 상대에게 도달한다. 나 또한 사랑하는 사람을 뒤틀린 감정 때문에 잃은 적이 있다. 치기어린 오만과 상처입은 마음을 감추려는 치졸한 자존심이 사랑하는 그녀를 상처주게 만들었다. 이 책 <체실 비치에서>는 성적인 문제가 사랑하는 두 사람을 헤어지게 만드는 과정을 슬로우 모션처럼 표현한다. 


 에드워드와 플로렌스는 서로를 사랑하여 결혼하지만 첫날밤에 제대로 된 섹스를 하지 못한다. 플로렌스는 어릴 때 당한 성폭력의 트라우마로 섹스를 혐오하지만 결혼에 따른 아내의 의무로 첫날밤을 맞이한다. 에드워드는 성경험이 없는 순진한 남자로 젊음이 가지는 폭발적인 성욕으로 고통스럽다. 연애하는 일 년을 참아내 드디어 맞이한 첫날밤이지만 모든게 서툴다. 플로렌스는 호텔 앞 자갈밭 해변으로 달려나가고 잠시 후 에드워드가 그녀를 찾는다. 둘은 사랑하는 마음과 달리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쏘아붙인다. 그리고 결별한다. 


 작품에서 에드워드는 1940년에 태어나 60년대 초반에 플로렌스와 결혼한다. 이때는 68혁명으로 사회가 성적, 문화적 금기에서 벗어나기 전이다. 경구 피임약이 막 개발되어 승인을 얻은 참이다. 여성의 혼전 순결이 당연한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시대란 말이다. 가부장제에서 정력은 남성의 힘과 권위를 상징한다. 성적으로 억압된 여성을 지배해야 하는 당위를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자에게 정력이 약하다는 말은 가장 큰 모욕이 된다. 에드워드가 무지에 따르는 과도한 흥분으로 첫날밤을 망쳤는데 플로렌스가 그 자리를 ‘탈출’하듯 떠나버리니 상처 입은 자존심은 분노로 변한다. 


 플로렌스의 경우는 섹스가 싫다. 소설 속에서는 암시만 나오지만 열두 살 때, 아버지와 떠난 요트 여행에서 성폭력이 분명 있었다. 그때문인지 플로렌스는 성적인 모든 행위를 혐오한다. 그러나 에드워드를 만나 사랑을 느끼고 느리지만 스킨쉽도 조금씩 익숙해진다. 하지만 삽입하는 섹스는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끔찍한 감정을 참고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하고자 노력하지만 두 사람 모두의 서툼과 무지로 에드워드가 삽입 전에 그녀의 몸에 사정을 해버린다. 정액 냄새가 불러 일으킨 끔찍한 기억과 느낌 때문에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를 벗어난다. 마치 함정에서 탈출하는 맹수처럼. 


[영화 '체실 비치에서'의 장면]


 자갈밭인 체실 비치에서 다시 만난 두 사람은 모두 자존심과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둘은 서로에게 날선 말을 내뱉고 감정이 더욱 뒤틀린다. 둘 모두 사랑이라는 진심이 마음의 심연으로 가라앉고 상대의 마음을 해친만큼 내 마음이 치유된다는 듯이 행동한다. 그리고 두 사람의 관계는 파국을 맞이한다. 어쩌다 이리 되었을까?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들의 성품과 과거가, 무지와 두려움과 소심함과 까탈스러움이, 권한과 경험, 느긋한 태도의 결핍이 그랬고, 그 다음엔 막장에 다다른 종교적 금기가, 영국인 특유의 민족성과 계급이, 그리고 역사 자체가 그들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것은 사랑한다는 진심을 전하지 못하고 날선 말로 상처를 주게 된 배경이다. 그런데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해변에서 서로를 상처주는 말을 하는데 갑자기 새소리가 들린다. 이 새 이야기를 하다가 플로렌스는 에드워드의 참모습을 떠올리며 웃는다. 그리고 파격적인 제안을 한다. 자신은 섹스에 있어서는 구제불능이라고, 바뀔 수 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먼저 자신의 상태를 이야기한다. 이어서 둘은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둘이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대신, 에드워드가 성욕을 풀기 위해서 무슨 일을 하든 괜찮다고 말한다. 자신은 그저 당신 곁에 있으면서 당신을 돌보고 함께 행복하고 싶을 뿐이라고 덧붙인다.


 그러나 남자로서 절대 물러날 수 없는 최후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에드워드에게 이 말은 더할 나위 없는 모욕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는 극도로 분노하고 그녀가 석녀에 불감증이라고 비난한다. 이로서 둘은 완전한 파국을 맞는다. 소설이 여기에서 끝났더라면 나는 성적 억압과 금기에 대해서 개탄하며 성을 자유롭고 안전하게 누릴 권리에 대해서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런데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에드워드가 말년에 느낀 감정을 표현한 문장에 갑자기 시선이 머물렀다. 


“마침내 그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남자든 여자든 그녀의 진정성에 필적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만나보지 못했다고 스스로 인정했다.”


 진정성이란 단어를 읽는 순간 머리가 찌르르 울리는 느낌이었다. 이 글을 쓰면서 같이 읽은 책이 씨네 21에서 연재한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를 엮은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였다. 이 책에 마침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 하이데거는 진정성을 “자기가 처한 실존적 상황 및 거기 내재된 가능성을 실현시킬 자유를 인식하고자 노력하는 상태”라고 정의했다. 사르트르도 “실존적 상황을 명징하고 참되게 인식하는 동시에 그로부터 비롯되는 책임과 가능성을 가정하는 상태”라고 표현했다. ]


 그러니까 ‘진정성’은 과거나 현재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가능성과 책임을 뜻하는 개념이다. 플로렌스의 제안은 두 사람의 상황과 가능성을 따져봤을 때 두 철학자가 한 정의에 그대로 들어맞다. 에드워드는 훗날 68혁명의 시대를 지나며 그녀의 제안이 얼마나 순수하고 관대한 자기희생적 행위인지 깨닫는다. 에드워드가 그날밤 모멸감으로 인한 분노와 상처 입은 자존심으로 ‘자기연민의 백일몽’에서 허우적대고 있을 때, 플로렌스는 ‘진정성’을 발휘했다. 가부장제 아래에서 강자인 에드워드가 자기만을 보고 있을 때, 약자이자 피해자인 플로렌스는 필사적으로 함께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마음의 뒤틀림이 바로 내면의 지옥이며 마음 속 악마다. 진심어린 애정도 꼬아보게 하여, 필사적으로 남을 상처주는데, 상처를 준 만큼 나도 받아, 나의 고통으로 상대의 고통을 인식하여 만족감에 젖게 한다. 마음을 다스린다는 뜻은 이 뒤틀림에 빠지지 않고, 설령 빠지더라도 빨리 벗어나는 것을 뜻한다. ‘진정성’이 위력을 발휘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체실 비치에서>를 읽고 마음 속 악마의 어두운 속삭임에 넘어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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