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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종화 Nov 23. 2019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이 책은 김혜리 기자가 영화 주간지 씨네 21에 연재하는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중에서 선별한 글을 모았다. 영화를 보고 느낀 감상과 생각을 자유롭고 편안하게 일기처럼 썼다. 오래전부터 김혜리 기자의 글과 인터뷰를 좋아했다. 그녀가 쓰는 영화 평론이나 감상은 다른 분들과 조금 달랐다. 90년대 유행하던 영화 평론은 서양 철학이나 정신분석 이론을 끌어와 현학적으로 쓴 글이 대다수였다. 이런 유행이 조금만 더 길었다면 패션 잡지에서 쓰는 정체불명의 표현을 ‘보그체’라 하듯이 ‘평론체’라고 조롱했지 싶다. 몇몇 평론가는 열혈 추종자를 거느리기도 했지만 대중들은 영화 평론을 그들만의 세상이라 여기고 점점 멀리했다. 김혜리는 현란한 최신 철학 이론이나 정신분석 이론이 없어도 얼마든지 수준 높은 영화 평론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줬다. 오히려 뛰어난 관찰력이 돋보이는 미장센 분석은 감탄할 정도로 세밀했다. 영화 속 인물의 감정선을 섬세하게 파헤치는데 사람에 대한 따스한 공감이 바탕이 되니까 때론 영화보다 글이 더 감동스러웠다.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는 평론보다 더 힘을 뺀 글이어서 위에 말한 그녀의 장점이 더욱 돋보였다. 씨네 21을 오래 정기구독하면서 그녀의 글을 항상 제일 먼저 읽었다. 일상 언어로 표현한 영화에 대한 그녀의 감상을 읽으면 가까운 사람과 함께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느낌 같아서 좋았다. 잡지에 연재된 글을 묶어 책으로 냈을 때에는 이미 읽은 글이라 구입하지 않았다가 시간이 좀 흐른 후 책으로 보는 느낌이 다르지 싶어 이번에 읽었다. 관람한지 몇 년이 지난 영화에 대한 기억이, 그녀의 부드러운 글과 함께 조금은 낭만적으로 되살아났다. 


 이 책에서 다룬 영화를 대략 2/3 정도는 봤다. 시간이 지나 기억이 가물가물한 영화도 있고, 무척 좋아해서 여러 번 다시 본 작품도 있다. 그런데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며 영화를 떠올리니까 몽글몽글한 감정의 덩어리가 생겨나 가슴을 살짝 간지럽히는 느낌이 들었다. 이전에 영화를 봤을때 가졌던 느낌이나 생각과는 또다른 감정이 솟아올랐다. 좋은 평론은 작품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 감상자가 미처 살피지 못했던 부분을 일깨우고,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계기를 주며, 영화가 표현한 정서가 나의 정서와 다르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는 데 있다. 영화가 그저 오락의 대상이 아니라 문학이나 미술, 음악처럼 삶의 밀도를 높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영화 <다가오는 것들>은 이자벨 위페르가 주연을 맡은 영화다. 노년에 접어든 나탈리(이자벨 위페르)는 철학을 강의하는 대학교수다. 인생의 말년을 준비해야 할 무렵에 오래 같이 산 남편이 갑자기 이혼을 통보하고, 어머니가 돌아가신다. 갑자기 생겨난 인생의 공허를 어찌할까? 젊고 멋진 남자 제자와 사랑이라도 할까? 아니다 영화에서 나탈리는 평생 공부한 철학을 더욱 깊이 새기며 ‘다가오는 것들’을 마주한다. 김혜리는 이렇게 말한다. 


“예술도, 철학도, 종교도 세계를 직접 개선하지는 않는다. 다만 인간이 세계를 개선하려는 태도를 유지하도록 지지해 준다. 이것은 엄연히 실질적이며 위대한 힘이다.”


 영화와 책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얼마나 위안이 되는 말인지! 실용적인 것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에게 들려주고 싶은 문장이었다. 내가 책을 읽고 느낌을 글로 남기며 영화와 드라마를 보는 이유는 고정된 관념에 머물지 않기 위해서다. 항상 새로운 느낌과 감각을 얻고 싶기 때문이다. 이 문장으로 내가 왜 그러고 싶은지 깨달았다. 그녀의 글을 통해서 영화는 내 삶과 이어진다. 나는 이것이 좋다. 


 영화 <보이후드>는 2014년에 본 모든 영화 중에서 가장 인상깊었다. <비포 선셋>을 감독했던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무려 12년에 걸쳐 일반인 소년이 성장하는 모습 그대로를 매년 특정한 기간에 촬영해 영화로 만들었다. 이 영화의 독창성은 바로 그 형태에서 나온다. 소년은 배우와 일반인의 경계에 서는데 부모 역할은 유명한 배우가 맡았다. 소년의 실제 삶과 영화의 스토리가 아주 절묘하게 결합해 연출된 장면인데 다큐멘터리처럼 보인다. 영화지만 진정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런데 진정성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김혜리는 드물게 철학을 인용해 자문자답한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진정성을, 대략 “자기가 처한 실존적 상황 및 거기 내재된 가능성을 실현시킬 자유를 인식하고자 노력하는 상태”라고 정의했다. 사르트르도 비슷한데 거칠게 줄이면 “실존적 상황을 명징하고 참되게 인식하는 동시에 그로부터 비롯되는 책임과 가능성을 가정하는 상태”라고 표현했다. ‘가능성’, ‘자유’, ‘노력하는’ 등의 단어가 눈에 밟힌다. 그러니까 두 철학자에게 진정성은 미래지향적인 프로젝트이지, 고정된 하나의 상태가 아니다.] 


 다른 사람의 진정성을 무엇으로 판단할까? 우선 과거 그 사람의 행적이 중요하다. 미래는 불확실하다. 그러니 그가 했던 일을 기준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것으로 충분한가?  우리는 그 사람이 보여줄 미래에 대한 믿음을 진정성으로 여긴다. 사랑에 있어서 진정성은 과거 얼마나 사랑했는가에 있지 않고 앞으로 얼마나 사랑할지 믿음을 주는데 있다. 여기에 더해 책임지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그저 무언가를 하겠다는 의지만으로 진정성을 주지 않는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받아들이고 겸허히 수용하며 뒷일을 수습하는 자세까지 진정성에 들어간다.


김혜리 기자의 글을 읽으며 영화가 단순히 시간을 때우는 오락이 아니라 좋은 책처럼 생각을 넓히고 삶에 풍요를 더하는 예술이라는 점을 다시 깨닫는다. 영화를 제대로 즐기고 싶다면 그녀의 글을 찾아서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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