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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종화 Dec 06. 2019

멀리 있다 우루는 늦을 것이다

가만히, 그리고  동시에  거의 외면하면서

 나는 글을 읽을 때 마음 속에서 따라 말하듯 내적 음성을 일으킨다. 겉으로 발성이 없을 뿐이지, 중학교 국어 시간에 선생님의 지시로 책을 소리내어 읽는 것과 실질적으론 같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적 음성 없이 읽을 때도 있다. 요즘엔 그런 책을 잘 읽지 않지만, 무협지나 가벼운 만화를 볼 때는 눈으로만 글자를 파악한다. 내적 음성은 정독할 때 나온다. 마음 속 소리를 내어 책을 읽어야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다. 어떤 글은(주로 철학이나 인문학 번역책) 마음 속에서도 읽기가 어렵다. 매끄럽게 넘어가지 않고 호흡도 잘 맞지 않다. 내적 음성도  호흡이 맞아야 잘 읽을 수 있다. 그런데 몇몇 작가의 글은 내용이 어렵더라도 읽을 때 만큼은 부드럽게 잘 넘어간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 소설가 배수아 작가의 글이 그렇다. 


 <멀리 있다 우루는 늦을 것이다>는 그녀가 낭송극을 염두에 두고 창작한 작품이라 했다. 비록 어려운 단어나 복잡한 문장은 없어도 전통적인 소설과 다르게 구체적인 이야기나 상황이 없어 읽기 쉬운 작품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으면서 놀랄 정도로 매끄럽게 읽혔다. 도저히 멈추기 어려울 정도로 내적 음성이 끊이지 않는 강물처럼 흘러나왔다. 마음 속 목소리의 흐름에 호흡이 저절로 맞춰지는 신기한 경험도 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의 경우에 글의 내용이나 주제보다 이 경험이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글이 음악이나 춤과 같은 느낌을 줄 수 있다는 경험은 무척 특별했다. 


 책을 읽고 배수아 작가가 직접 낭송하는 낭송극을 보러, 아니 들으려고 갔다. 소설 전체가 아니라 일부를 발췌해서 낭송했다. 뇌가 아니라 귀로 듣는 문장은 또다른 감흥을 줬다. 감각기를 거쳐 뇌로 들어간 소리는 독서가 줄 수 없는 물성을 느끼게 했다. 여럿이 모여 귀기울여 작가가 문장을 읽는 음성을 들으니, 마치 제의에 참여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작품 속 시간과 공간처럼 낭송 또한 때론 포개어지고, 가로질러 합치기도 했다. 



 이 작품에 나타나는 인물은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은 또 하나이다. 소설 속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단선이 아니다. 니체의 영원회귀도 아니다. 어느 순간이 삶의 모든 의미를 축약할 수 있다는 점이 비슷하다 생각할 수 있으나 작품 속 인물은 위버멘쉬와 달리 의지와 욕망이 보이지 않는다. 인도의 윤회전생과도 다르다. 한 영혼이 하나의 삶이 끝난 후 새로운 삶을 맞이하지 않는다. 공간도 불분명하다. 서울을 떠올리게 하는 인구 천만 명의 도시가 나오긴 하지만 시간과 마찬가지로 공간 또한 상식의 제약에서 벗어났다. 바다와 섬과 해변, 기차, 소도시, 낯선 호텔, 학교가 의식의 흐름처럼 오간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물은 작품 속에서 건너 뛰었다가 포개어지고, 대체하고, 합쳐진다. 다 읽고 나면 시간과 공간과 인물이 얼마나 정합성 있게 어우러져 있는지 실감할 수 있다. 


 배수아의 최근 소설을 읽으면 인물이 의지나 욕망이 결여된 존재처럼 보인다. 소설 속에서 인물은 세계에 어떤 의지를 주입하지 않는다. 그녀가 창조한 세상이 단선적 시간이 아니라 그런걸까? 의지와 욕망은 하나의 목표를 향해 직선으로 치닫는 힘이니. 이 작품의 주인공 우루도 그렇다.


“우루는 보는 눈이다. 우루는 그림자들 사이에서, 춤을 추면서, 걷고 혹은 걷지 않으면서 본다. 눈을 뜨고 있을 때, 그리고 심지어 눈을 감고 있거나 잠을 자면서도 본다. 우루는 결코 정면으로 보지 않는다. 관찰하지도 않고, 응시하지도 않는다. 우루는 단 한 번도 뚫어지게 들여다보거나 시선으로 파헤친 적이 없다. 단지 옆으로 흐르듯 보이는 것을 볼 뿐이다. 우루는 보지만, 보지 않으면서 본다. 우루는 비치는 것, 간접적인 시각의 진술, 빛 속에서 저절로 드러나는 형체들, 그렇게 보이는 말과 현상에 끌린다. 우루의 애정은 그런 종류다. 보이는 것은 고정된 현재가 아니다. 그것은 하늘이나 수평선처럼 허구다.”


“언젠가부터 내가 알게 된, 세상을 바라보는 어떤 방식으로, 즉 가만히, 그리고 동시에 거의 외면하면서.”


 오랫동안, 세상에 눈돌리지 않고 세상이 좀더 진보하는 데 힘을 보태는 적극적인 참여가 옳다고 생각했다. 생각과는 달리 몸은 잘 움직이지 않았다. 나 자신을 돌아보는 참혹한 시간을 거친 후에 깨달았다. 난 참여자가 되기 어려운 사람이다. 나도 우루처럼 보지만, 보지 않으면서 보는 사람이고 싶다. 가만히 동시에 외면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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