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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종화 Dec 11. 2019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의 저작을 읽기가 즐거웠다. 이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보기 전까지는. 2007년부터 아카넷 출판사에서 박찬국 교수의 번역으로 새로 니체의 저작이 출간되기 시작했다. <비극의 탄생>, <안티크리스트>, <우상의 황혼>, <선악의 저편>이 지금까지 순서대로 나왔다. 나는 <선악의 저편>을 빼고 앞에 나온 세 권을 읽었다. 참여하고 있는 고전 독서 모임에서 니체를 읽기로 해서 <비극의 탄생>, <반시대적 고찰>, 그리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었다. <차라투스트라>를 읽기 전까지는 니체의 사상을 알아가는 일이 좋았다. 서양 형이상학이 수천 년 동안 고수한 세계관이 가진 약점을 날카롭고 철저하게 공격하고 인간의 삶과 육체를 긍정하는 철학이 반가웠다. 기독교가 피안의 천국을 완전하다 여기고, 반대로 현실의 삶은 부정하고 있어서 인간을 병들게 만든다는 니체의 말이 와닿았다. 왜 니체가 현대철학의 뿌리이며, 가장 혁명적인 사상가인지 알 것만 같았다.


 니체의 사상이 집약되어 있고 문학적으로도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는 <차라투스트라>를 앞두고 두근거렸다. 니체는 이 책이 자신의 최고 걸작이라며 ‘미래의 성서’라고 자찬했다. 이 책이 비유와 상징으로 표현된 문학적인 문장으로 이루어져 논리적 구성이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추상적 이론을 엄밀한 체계로 서술하는 대신에 사상의 핵심을 예언자의 선언이나 시인의 노래로 드러냈다. 그래서 내심 철학적 이론을 파헤친다기 보다는 니체의 주요 사상을 매력적인 문장으로 만나자고 기대했다. 얼마나 멋진 글을 만나게 될까?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기대와는 달리 술술 읽히지도 않고 거부감이 들었다. 니체가 쓴 비유와 상징에 익숙하지 않아서 비꼬는 건지 칭찬하는 건지 헷갈렸다. 게다가 차라투스트라가 아니라 오히려 그가 꼬집고 비판하는 여러 사람에게 감정이입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왜 이런걸까?


 이 책에는 니체의 사상에서 핵심이 되는 개념이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어 나온다. “신의 죽음”, “힘에의 의지”, “위버멘쉬”, 그리고 “영원회귀”이다. 하나하나가 지금 시대에도 파격적이고 놀랍다. 하나씩만 따로 빼어서 살펴보면 파격적이라 해도 너끈히 수용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을 한데모아 전체적 사상의 틀을 대충이나마 짐작해보니 지금까지 내가 살며 쌓아온 모든 생각과 삶의 형식을 송두리째 무너뜨려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때 깨달음이 왔다. 내가 나이가 들었구나, 이제까지 살아온 삶을 변화시키기 싫은 거구나,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거부감을 느꼈구나. 왜 젊을 때 니체를 읽으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나이가 드니 변화가 두렵고 귀찮다. 


 어렵사리 책을 다 읽어도 니체가 제시한 핵심 개념이 모호하다. 별개로 이해하면 대충 무슨 뜻인지는 알겠는데 이 개념들이 하나의 체계를 이루는 틀에 대해서는 도저히 모르겠다. 인터넷을 뒤져 몇몇 논문과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에서 펴낸 해제집을 참고했다. 니체의 글을 읽을 때와는 다르다. 비유와 상징과 패러디 대신 익숙한 문체로 개념을 설명하니까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아! 이래서 니체가 학술 서적을 쓰지 않았구나. 니체가 주장하고자 하는 내용은 학술언어로 담을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차라투스트라>처럼 글을 써야 독자들이 더욱 크게 느낄 수 있다. 니체는 학문으로서 머리만 이해하는 철학이 아니라 실제로 실존적 체험을 통해 삶을 바꾸어 나가길 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충격과 깨달음을 주어야 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여기에 철저히 맞춘 책이다. 


 처음 이 글을 쓸 때에는 니체의 사상을 간략하게 정리하려고 했다. 그런데 글을 쓰다 보니 그건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점점 들었다. 우선 나 스스로가 니체의 사상을 그의 의도대로 체득할 수도 없고, 개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니체 읽기를 앞으로도 꾸준히 할 예정이라 훗날을 기약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으며 얻고 깨달은 점도 많다. 공포영화를 보면 공포와 악은 외부에서보다 자신 스스로의 내면에서 더욱 크게 발현된다. 선과 악은 그 누구도 만들지 않는다. 오직 자신만이 선과 악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지옥은 피안의 세계가 아니라 내 마음 속에 있다. 


 "창조하는 자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악인지를 모른다......창조하는 자는 사람이 추구해야 할 목표를 제시하는가 하면, 이 대지에 그 의미를 부여하고 미래를 약속하는 자다. 그가 비로소 어느 것이 선인지 악인지를 결정한다."


 창조라고 해서 대단한 걸 만들거나 구상하는 일을 떠올릴 필요가 없다. 인간은 어떤 면에서 모든 것을 스스로 창조하고 있다. 단지 이를 깨닫고 긍정하는가, 아니면 외부에 원인을 돌리고 부정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삶의 모든 순간을 무한한 긍정으로 찬양한다는 니체의 말이 과연 어떤 것인지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렇지만 내가 선악을 결정하고 내 맘 속에 지옥이 있다는 점을 떠올리면서 조금씩 그의 사상에 다가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 책은 철학이나 문학이 아니라 굳어진 삶을 깨부수는 도구처럼 다가왔다. 내 자신의 정체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알게 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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