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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종화 Dec 24. 2019

파이이야기

구원이 없는 삶이 아름다운 이유

<파이이야기>는 아름다운 소설이다. 투명하게 맑고 애틋하기까지 한 사랑이야기냐고? 아니다. 투명하게 맑을 정도로 선명하게 표출한 삶의 아름다움 때문이다. 왜 삶은 아름다울까? 온갖 역경과 고난을 이기고 살아남기 때문이다. 삶 안에 투쟁과 폭력이 있다. 문명의 바탕이 바로 폭력과 고통 아닌가. 지배와 복종이 문명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지배와 복종의 변증법은 투쟁의 연속이며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다. 우리네 삶은 이성과 도덕, 또는 사랑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삶의 이면, 삶의 바탕에는 떠올리기 싫은 잔혹한 진실이 들어있다. 에드먼드 버크는 사람의 생존을 위협하는 고통이나 위험이 '숭고'의 감정을 일으키는 원천이라고 주장했다. 숭고함이란 근본적으로 인간의 자기보존 본능과 관련되어 있다는 말이다. 거대한 산맥이나 수십 미터의 파도보다, 생존투쟁에서 살아남은 인간의 모습이 더욱 숭고해 보이는 이유다. 여기에서 비롯된 아름다움은 다른 무엇과 비할데 없이 탁월하다.



 '살아남음' 자체는 아름답다 할 수 없다. 생존이 숭고함을 얻으려면 생존 과정이 처절하되 어느 선을 넘지는 말아야한다. 전장에서 아군을 배신하고 적군에 붙어 살아남은 장군의 삶을 누가 숭고하고 아름답다 하겠는가? <파이이야기>가 아름다울 수 있는 까닭은 주인공의  선을 넘은 생존 투쟁을 정당화하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이 정당화는 실패했다. 그런데 이 실패가 더욱 인간적이어서 아름답다.



 파이는 태평양에서 조난당해 극도의 고통을 겪었다. 어머니가 눈 앞에서 살해당했다. 살인자를 죽였다. 생존을 위해 인육을 먹어야만 했다. 결국 살아남았지만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할 수밖에 없었던 일은 생존 이후에도 그를 괴롭힌다. 생존이 모든 행위를 정당화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고통 속에 잠겨있다. 과거는 이미 일어난 일, 어떻게 해도 바꿀 수 없다. 삶이 이어지기 위해서는 구원이 필요하다. 고통으로부터의 구원뿐만이 아니다.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나의 삶을 정당화할 수 있는 구원이 필요하다. 속죄를 통한 구원은 기각이다. 속죄의 대상이 이미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신에게 속죄를 한다고? 이는 오로지 예수만이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파이는 오로지 신학적 구원만을 바랄 수 있다.



그리스인은 존재의 공포와 끔찍함을 알고 있었고 느끼고 있었다살아갈  있기 위해서라도그리스인은 그러한 공포와 끔찍함에 대해서 올림포스라는 찬란한 꿈의 산물을 내세워야만 했다." <비극의 탄생, 니체>



 삶의 고통은 세상이 공포와 끔찍함으로 가득하다고 알려준다.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언가 필요하다. 그리스인은 가상의 세계(올림포스)를 창조했다. 이러한 꿈의 세계는 끊임없이 생성되어야 하기 때문에 경험적인 실재로 느껴질 수 있다. 이러한 가상의 세계를 통해 그리스인은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 덕분에 삶을 지속하며 찬란한 유산을 남겼다.



 파이가 선택한 방법도 이와 같다. 호랑이 리처드 파커는 파이가 가진 동물적 폭력 본능을 형상화한 관념이다. 살인과 식인처럼 죄의식과 관련된 일체를 동물과 함께하는 가상의 세계로 옮겼다. 한편, 폭풍우를 만나서나 심연과 같은 바다의 풍경을 맞닥뜨리면 신에 대한 믿음을 부르짖는다. 동물의 생태는 1부에서 상세히 나왔듯이 모두가 생존 자체를 위해 생겨났다. 그러니 생존을 위해 인간으로서 선을 넘은 행위는 리처드 파커에게 투영하고 자신은 그와 공존한다.





 이러한 가상의 세계는 그리스 신화의 세계와 무척 닮았다. 관념이나 특성이 신성화되어 나타난 그리스 신화의 신들처럼 리처드 파커도 그렇게 태어났다. 신들이 인간 세상에 영향을 미치듯 리처드 파커도 살인을 하고 파이가 잡아주는 식량을 먹으며 공존한다. 파이가 만들어낸 가상은 신화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극한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갖은 고생을 다해, 때로는 인간성을 저버리며 살아남은 사람의 이야기는 가상의 세계로 재구성되어 신화가 된다. 신화의 영웅들은 다 그렇게 태어났다.



 한편, 힌두교에서 구원이란 내세에 더 나은 환생을 위해서 업보를 쌓거나, 우주적 본체라는 절대자와 자기를 통일시킴으로서 동일화하거나, 신적 대상에의 헌신을 통해서 일치감과 행복감을 가지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파이가 완전한 구원을 얻기 위해서 가장 필요했던 것이 무엇일까? 나는 리처드 파커와의 합일이라고 생각한다. 식충섬에서 일어난 일은 파이가 만들어낸 가상을 기독교, 힌두교, 이슬람교의 구원과 일치시키기 위한 시도이다. 이는 실패로 돌아갔다. 낮에 넘치는 생명을 음습한 죽음의 기운과 살해가 떠받치고 있다. 이 장면은 어쩌면 근원적인 화해가, 즉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는게 아닐까? 파이는 구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 섬을 떠나 현실로 복귀하게 된다. 그리고 멕시코에 도착해 리처드 파커는 사라지고 만다.





 파이가 구원을 얻는데 성공했다면 리처드 파커는 파이와 하나가 되어 더 나은 존재로 거듭났을 것이다. 자신 속의 타자를 받아들여 합일하는 일은 자아의 확장이며 성숙이다. 그러나 파이의 동물적 생존 본능은 그저 사라져 버렸다. 이제 안전이 확인되었으므로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호랑이는 뒤돌아볼 필요 없이 그저 없어지면 된다. 만약 파이에게 다른 생존의 극한 상황이 펼쳐진다면 리처드 파커는 다시 나타날 것이다. 그러니 파이는 가상세계에서 구원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파이는 가상의 이야기를 먼저 제시하고 실제 이야기를 나중에 말한다. 만약 구원이 있었다면 어떤 버전의 이야기든 하나만 나왔을 것이다.



 신화 속 영웅들은 대체로 구원을 얻지 못한다. 그래서 그토록 숭고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해내려온다. 파이의 이야기도 같다. 다만 파이이야기는 하나의 진실을 더 알려준다. 인간성을 넘어선 투쟁은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러나 아룸다울 수는 있다.



 이 책은 다른 말할 거리가 많은 책이다. 우선 '파이'의 인간적인 성격과 화물선의 침몰에 그가 관련되었는지 이야기를 나누어 볼 수 있다. 또, 어떤 사실에 대한 해석과 믿음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런 부분은 기회가 되면 재독이나 토론을 한 후 다시 다루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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