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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종화 Jan 06. 2020

사랑의 블랙홀

자기 인식과 타자와 관계 맺기

 20살, 대학교 1학년 때, 나는 철없고 방탕했으며 자기연민에 빠져 살았다. 수업 대신 동아리방에서 죽치고 앉아 헛소리나 하다가 오후 5시만 되면 사람들과 어울려 학교 앞 술집으로 향했다. 매일 술에 취했고, 술기운에 아무말이나 지껄였으며, 자신과 남 모두 돌아보지 않았다. 위태위태하게 사는 모습이 안타까웠던 이가 걱정하는 말을 하면 "난 원래 이런 사람이야" 라며 밀어내버렸다.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삶을 사는데 고칠 생각을 하기는커녕 이런 상태에 빠진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겼다. 최악이었다. 한 친구가 보다 못해 충고를 했다. 그렇게 살지 말라고. 나는 여느 때와 같이 내가 이런 사람인걸 어떻하냐고,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며 그녀를 튕겨냈다. 친구는 정색하며 말했다. 


"너는 학생운동 한다면서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바꾸려고 하는데 왜 네 생각과 삶은 바꾸려고 하지 않니? 너 스스로도 이렇게 살면 안된다는 걸 알면서 바꿀 노력조차 안하네. 원래 이런 사람이라고 포기하면 평생 바뀌지 않아. 원래 이런 사람은 없어. 사람은 변하고 변화는 자기가 노력해서 만드는거지." 


 그녀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철없고 방탕한 삶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 학점은 0점대와 1점대를 오락가락 했고, 술도 자주 마셨다. 그러나 자기연민에서는 벗어났다. 말을 삼갔고, 매사를 좀 더 진지하게 여겼다. 그러면서 내가 한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인식하게 되었다. 결과를 인식하면서  스스로 책임진다는 의미도 어렴풋하게 이해했다. 이전보다는 조금 나은 사람으로 나아갔고 나를 대하는 주변 사람들의 태도도 조금은 나아졌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여전히 나를 알지 못했고, 타인에게 관심이 없었으며, 주변의 흐름에 휘말려 생각없이 살았다.


 영화 <사랑의 블랙홀>은 자기만 알던 기상캐스터 필이 작은 소도시에서 하루가 무한히 반복되는 타임 루프에 휘말렸다가 빠져나오는 이야기다. 타임 루프 안에서 필은 변한다. 타인을 돌보고, 배려하며, 의미 있는 관계를 맺는 법을 알아간다. 나는 변하기 전의 빌과 거의 같은 사람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두 번의 배신을 겪었다. 처음은 내가 했고, 두 번째는 내가 당했다. 두 경우 모두 내 삶을 크게 바꾸었다. 그 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살게 됐다. 내가 했을 때에는 자기합리화에 급급했다. 그러나 마음 속에서는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마음이 황폐해졌고 다시 자기연민에 빠졌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희미해질 정도가 되어서, 그냥 잊고 살기 시작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세상에 대해 알아가는 일은 즐거웠다. 지식이 쌓이자 그것들끼리 서로 이어지는데 그럴 때마다 커다란 보람을 느꼈다. 국민학교 때 쓰던 독후감 수준이던 글솜씨도 조금씩 늘었다. 더 잘 쓰고 싶어서 글쓰기 강좌도 여러 번 수강했다. 그때마다 조금씩 나아졌다.


 어느 순간, 한계가 찾아왔다. 아무리 많이 읽어도, 아무리 열심히 쓰고 생각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아는 것일 뿐이며 그조차 시간이 지나면 기억에서 사라졌다. 처음엔 내가 관찰력이 부족하고 아직 지식이 부족하다 여겼다. 그러다가 배신을 당했다. 내가 했을 때는 자기합리화에나 신경을 썼는데, 내가 당하니까, 피해자가 되니까, 그때서야 온 마음으로 사태를 돌아봤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알지 못하면 죽을 것 같았다. 처음으로 나뿐만 아니라 타인에게 집중했다. 그래서 깨달았다. 나 자신에 대해 모르니까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내 입장과 관점이 없다. 그러니 사물이든 사람이든, 타자에게 진정한 관심을 두지 못한다. 그러니 대강의 얼개만, 그것도 피상적으로 파악할 뿐, 그 안에 숨은 디테일과 의미를 찾지 못한다. 나를 모르는데 어떻게 남을 알겠는가? 내 위치를 알아야 상대에게 향하는 방향이라도 알 것 아닌가.


 이런 나이지만 인복은 있는지 마음의 상처를 달래주는 친구와 지인이 많았다. 마음의 격동이 조금 가라앉은 후 예전에 내가 했던 배신을 떠올렸다. 이 일을 제대로 인식하지 않으면 나 자신을 알지 못하고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겠다. 내 20대 전체를 글로 써봤다. 쓰면서 점점 내가 모르던 나를 알아갔다. 내 성향이 무엇인지, 관심사가 무엇인지, 누구를 좋아하는지, 세계관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러다 중단했다. 이 작업에 열중할 수 없는 일이 생겼다. 아니다. 그 사건은 핑계에 불과했다. 그 일을 해결하고도 다시 시작하지 않았으니까. 이정도만 알아도 충분했다 여겼다. 아니면 더 깊이 아는걸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 


 현재 내 모습을 영화 속 빌의 처지에 비추어본다면 리타에게 거절당하고 좌절한 후, 온갖 일을 시도해보는 상태에 가깝지 않을까? 


 2019년에 들어서면서 지금까지 접할 수 없었던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다. 각자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살면서 전문성을 갖추고, 세상에 대해 뛰어난 통찰을 하면서, 타인을 존중하는 분들이었다. 그분들을 만나면서 더 조급해졌다. 나도 그분들처럼 내 입장을 갖고, 그래서 나만이 볼 수 있는 어떤 것을 그분만이 볼 수 있는 것과 함께 나누고 싶다. 이 또한 생각만 했다. 포기와 체념을 스토아 학파의 관조처럼 포장했다. 무관심을 배려라고 꾸몄다. 그래도 뭔가 답답했는지 이런 저런 모임에 참여했다. 이전에는 내가 잘난 줄 알고 나갔다면 요즘에는 뭐라도 건질까 싶어서 나간다. 


 확신할 수 없지만 나는 지금 어떤 기로에 서있다. 지금처럼 살아도 괜찮다. 익숙한 삶이다. 다른 편에는 나 자신을 더 깊이 인식하고, 이를 바탕으로 타인과 자연과 사회와 관계를 맺어나가는 길이 있다. 아마도 매우 긴, 고통스러운 여정이 될 것이다. 그래서 선뜻 이 길로 가겠다 결심하기 어렵다. 하지만 바라건대 후자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힘과 용기가 내게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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