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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종화 Sep 22. 2024

새벽과 음악

 주말에 친구와 연남동에 낮술 마시러 가다가 독립서점에 들렀다. 그곳에는 책을 봉투에 담아 무슨 책인지 모른채, 서점 주인의 알쏭달쏭한 소개글에만 의지해 살 수 있는 몇 권의 책이 있었다. 재미삼아 서로에게 한 권씩 선물했다. 나중에 뜯어보니 책의 제목이 ‘새벽과 음악’이어서 뜨악했다. 나는 새벽과 가깝지 않다. 건강을 위해 아침운동을 하기 시작하면서 늦게 잠자리에 드는 날이 별로 없다. 음악과도 각별한 사이가 아니다. 운전을 할 때나 대중교통을 타고 어디로 갈 때 음악을 듣기는 한다. 집중하며 듣기보다 그저 배경음악으로 삼는다. 마치 white noise처럼. 그 뿐이다. 게다가 시인이 쓴 에세이라니! 평소라면 절대 고르지 않을 책이다. 친구가 준 선물이라 의무감에서 읽기 시작했다. ‘새벽’과 ‘음악’. 감성으로 충만한 단어들 아닌가. 내용도 그러하리라 지레짐작했다. 책을 읽으면서 편견이 깨졌다.


“결국 쓴다는 것은 자신이 익숙하게 알고 있는 단어 속에서 각자 자신만의 고유한 슬픔을 발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자기가 가진 지극히 단순한 낱말 속에다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또 다른 소리와 의미를 다시 새롭게 겹쳐 새겨 넣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렇게 일상 속의 아주 사소한 구멍. 아주 작은 틈새로. 추락하듯이 나아가면서. 비틀거리면서. 머뭇거리면서. 망설이면서. 주저하면서. 잘못 말할까 봐 전전긍긍하면서. 고쳐 말할 수밖에 없는 언어적 상황 속에서. 그렇게 세계와 사물들 앞에서 매번 뒤늦은 존재로서. 언어적 말더듬이 상태에 직면한 채로. 자기지시적인 단어들을 반복하여 중얼거리면서. 그것들의 자리를 매번 바꾸면서.”


 나는 십 여 년 동안 열심히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언젠가부터 글쓰기가 힘들기만 했다. 글에 마음이 담기지 않았다. 요약이나 설명만 장황하게 늘어놓을 뿐이었다. 코로나가 시작될 무렵부터 글을 쓰는 대신 OTT로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는 글쓰기에 대한 열망이 남아 있었다. 이 책은 그 열망을 건드렸다. 이 책은 시인이 ‘새벽’에 ‘음악’을 들으며 ‘글쓰기’에 대해 고뇌하는 책이었다. 저자가 이 책에서 드러낸 글쓰기에 대한 열망과 고뇌를 보면서 부끄러웠다. 무언가를 글로 표현할 때 우격다짐으로 밀어 붙이기만 했다. 대상에 대한 관심도 별로 없었다. 그 대상에 숨어 있는 나 자신을 찾으려고 하지 않았다. 나를 모르고 너를 모르는데 나와 너의 관계를 멋지게 쓰고 싶은 허영심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다시 글을 쓰려고 한다. 모르던 것을 알게 되면 이전에 알던 것과 연결하고 싶다. 그래서 내가 아는 무언가를 설명하기보다, 그걸 알아서 변화해가는 나를 표현하고 싶다. 내가 이전과 달라지면 주변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고 싶다. 그 세계는 내가 보지 않던 면모를 드러낼 것이다. 내가 보지 못했던 세상을 만나서 관계를 맺는 과정을 글로 쓰고 싶다. 아주 작은 변화라도 괜찮다. 문제는 내가 그 작은 달라짐을 알아챌 수 있는가다. 그것을 표현하는 일은 다음 과제다. 원래도 크지 않았던 타자에 대한 관심이 점점 식어가고 있다. 이 상황을 인정하면서, 아직 식지 않은 내 스스로에 대한 관심을 돌리면 어떨까 싶다. 타자 속에서 나를 찾는 것도 타자에 대한 관심일테니.


 나는 죽을 때까지 언어와 글쓰기에 관해 이제니 시인처럼 고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계속 쓰다보면 어느 때에는 한 조각은 붙잡아 보고 싶다. 지나버린 시간을 현재로 불러오려 하지만 그조차 바로 과거가 되는 것이 언어이자 글쓰기다. 이는 과거에 대한 집착이 아니다. 오히려 글쓰기는 집착을 덜어내는 일에 가깝다. 적확한 단어를 선택하고 불필요한 군더더기를 덜어내는 것이 모든 글쓰기 교본이 내세우는 바가 아닌가. 모든 것을 가지려고 하면 다 잃는다. 


 “멀리 공작 한 마리가 서 있다. 이제 막 날개를 펼치려고 하고 있다. 멀리 있듯 가까이 서 있는 공작 앞에서 나는 오늘도 낱말을 고른다. 뒤늦게 다시 도착하고 있는 그 모든 얼굴들에 대해, 그 모든 목소리들에 대해, 무언가를 밝히기 위해서 단어들을 고르고 고른다. 그러나 어떤 얼굴들 앞에서는, 어떤 시간들 앞에서는, 언어를 고르는 것 자체가 죄악으로 여겨질 때가 있다. 이런 순간이야말로 언어 스스로 제자리를 제 얼굴을 찾기를 요구한다고 여겨지는데. 이때 중요한 것은 모종의 얼굴과 시간에 꼭 들어맞는 언어를 찾아내어 백지 위로 옮겨 놓는 일 자체가 아니라. 이제 막 자기 자리를 찾으려는 언어 앞에서. 머뭇거리는. 저항하는. 언어의 그 방향성을 자각하는 것. 행여나 어떤 말로 고정됨으로써 존재의 본질을 흐리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 그렇게 언어는 주저하는 마음으로 흐릿한 궤적을 만들어 나간다. 그리하여 중요한 말은 종이 위에 쓰인 말이 아니라. 쌓이고 쌓이면서 지워지고 지워지는 말들. 지워지고 지워짐으로써 종이 위에 다시 드러나는 말들. 그렇게 말과 말 위로 겹과 겹을 만들어주는 말들이다. 보이지 않는 말의 흔적을 쌓아나가는 일. 자신의 문장을 끝없이 끝없이 부정하면서 끝없이 끝없이 문장 뒤로 사라지는 일. 문장으로 살아가는 일.”


 글을 쓰는 마음은 때론 괴롭다. 깊이 숨겨 두었던 마음을 내보여야 할 때도 있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내 안의 어둠과 기만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보여줘야 한다. 이런 모습은 나의 경계를 벗어나 세상에서 보여진다. 결국 타자의 세상을 건드리지 않을 수 없다. 이때 언어의 윤리가 작동해야 한다. 내 삶의 밑바닥까지 보여주면서 찾아야 하는게 윤리라니. 게다가 규범처럼 명확하지도 않다. 세상의 맥락을 이해하면서, 내 안의 뒤틀림을 인정하면서, 타자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으면서 조심스럽게 찾아가야 한다. 단어와 문장이 감추고 있는 의미를 곱씹어야 한다. 어느 말이 더 어울리는지 고르면서. 때로는 물러서고 때로는 비키면서. 이렇게 글을 쓴다면 나는 나 자신과 더불어 세상과도 화해할 수 있지 않을까? 과거의 묵은 원한에 얽매이지 않고 앞날을 살아가지 않을까? 



* 아래는 책에 실린 저자 추천 플레이리스트

* 불면의 밤을 위한 플레이리스트

https://youtube.com/playlist?list=PLZBSsp5eRJ1TXThnxhK-pOsY7yHnE1Wi6&si=U2lQr4DdWtM6u9Y3

* 새벽 낚시를 위한 플레이리스트

https://youtube.com/playlist?list=PLZBSsp5eRJ1TUffXXNUpiUjF7Z8GUKY1U&si=yxVDIpSEBjd8A7F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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