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민의 기억의 정치학을 떠올리며
어떤 상처는 영혼에 새겨진다. 그것은 자연재해처럼 덮쳐오기 때문에 인간의 능력으로 피할 수도 없다. 상처가 너무 아파서 우리는 마음의 심연 아래에 억지로 던져 버린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 깊은 어둠 속에서 나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며 고개를 들어올린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회복되는 보통의 상처와 달리 고개를 들이밀 때마다 상흔이 짙어진다. 이런 상처는 어떻게 치유해야 할까? 김금희 작가는 이 소설에서 개인의 상처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따라서 상처가 낫기 위해서는 혼자만의 고군분투로 부족하다. 상처의 시간과 공간도 고정된 지점에 정할 수 없다. 행복은 ‘지금’, ‘여기’에 있지만 상처는 다른 시간, 다른 장소와 이어진다. 이런 상처를 도대체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 걸까? 내 상처가 나만의 것도 아니고, 다른 시공간에 걸쳐 있다면 이걸 풀 수나 있을까?
이 어려운 문제를 “대온실 수리 보고서”가 차근차근 풀어나간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작품 속에서 창경궁 대온실을 수리하는 과정이 나온다. 영두는 대온실을 수리하는 전 과정을 기록한 보고서, 즉 ‘대온실 수리 보고사’를 작성하게 된다. 대온실을 설계한 일본인 후쿠다 노보루의 생애부터 시작해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이 백성을 교화하기 위해 창경궁의 식물원과 동물원을 개방한 과거와 전쟁 중에도 봄 벚꽃놀이에 심휘한 시민들의 요구로 개방했던 사실, 일제의 잔재로 여겨져 철거가 거론된 일까지 모든 과거를, 드러나지 않았던 사건까지 들춰내면서 파헤친다. 영두는 이 일을 통해 자신의 상처가 과거와 얽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학창시절을 보냈던 원서동 하숙집 할머니의 비밀스런 과거와 아픔이 대온실을 수리하는 작업 도중에 드러난다. 영두는 현재와 자신이 상처를 받은 과거와 할머니의 아픔이 배태된 시간을 넘나든다. 영두가 지난 과거에서 얻은 힘은 현재의 문제를 푸는데 나서게 만들었다. 영두는 이 과정에서 자신의 상처가 조금씩 아무는 것을 느낀다.
과거는 그저 흘러 지나가 굳은 박제가 아니다. 과거는 현재 어떤 관점에서, 어떤 입장에서 보는가에 따라 달라지고 변한다. 역사는 지나간, 고정된 하나의 사실과 진실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현재가 과거에 개입하고 과거가 현재에 개입한다. 할머니의 과거가 밝혀지고 상처가 드러나기 위해서는 영두의 존재가 필요했다. 영두의 울분이 해소되기 위해서는 영두의 시간과 공간뿐 아니라 할머니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대온실의 시간이 필요했다.
“만약 그렇다면 과거 세대의 사람들과 우리 사이에는 은밀한 약속이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지상에서 기다려졌던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우리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세대와 희미한 메시아적 힘이 함께 주어져 있는 것이고, 과거는 이 힘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 2번에 나온다.
할머니가 고난을 겪을 때 그녀에게 손을 내민 사람은 없었다. 시간이 흘러 할머니는 영두가 울분에 찼을 때 손을 내밀었는데 이는 어릴 적 자신에게 내민 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손을 영두가 잡지 않았다. 영두는 다시 어른이 되어 친구의 딸 산아에게 손을 건넨다. 이 손을 산아는 거부하지 않는다. 이 차이는 왜 생겨났을까? 할머니의 고난은 할머니 안에만 머물렀다. 영두의 울분은 할머니의 고난과 함께 대온실의 시공간으로 이어졌다. 영두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세대와 희미한 메시아적 힘이 주어진 것이다. 그 힘을 산아가 받아들였다.
벤야민의 사상을 ‘기억의 정치학’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벤야민은 과거, 역사, 기억을 독특한 관점을 가지고 다뤘다. ‘대온실 수리 보고서’ 소설에서 개인의 상처가 다른 사람, 다른 시간, 다른 공간과 이어진다고 했다. 그렇다면 개인의 아픔이 계속 이어지면서 전체 역사, 시간과 공간에서 나타났던 모든 상처가 연결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누구 한 명의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 지구상에 살았던 모든 사람의 상처를 돌봐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것이 과연 가능할까? 그래서 벤야민은 역사학에 은밀하게 신학을 초대했다. ‘구원’의 이미지를 억압받는 자들의 해방과 혁명에 집어 넣었다. 기독교에서 구원은 심판의 날에 한꺼번에 찾아온다. 우리가 기다리는 혁명도 모든 시대에 걸친 억압을 떨쳐 내야 비로소 완수된다.
‘대온실 수리 보고서’가 이 지점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개인의 아픔과 상처가 결코 지난 세대의 그것과 별개가 아니며 서로 이어져 있으며 얽혀 있다는 점을 드러낸 것만으로도 벤야민이 말한 ‘구원’의 이미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소설에서도 모든 것이 깔끔하게 해소된 것이 아니다. 작은 첫걸음을 내딛은 정도이다. 벤야민이 구상한 ‘기억의 정치학’에서 ‘구원’은 신이 내려주는 것이 아니다. 억압받은 자 각각이 모두 ‘메시아’이며 구원자다. 영두가 과거로부터 희미하게 불어온 메시아적 힘을 받았고 그 힘을 이제 보이기 시작하려고 할 때 소설이 끝난다. ‘구원’은 신이나 타인이 주는 입장권이 아니라 스스로가 쟁취하는 것이다.
“경과하는 시간이 아니라 그 속에서 시간이 멈춰서 정지해버린 현재라는 개념을 역사적 유물론자는 포기할 수 없다. 역사주의가 과거에 대한 ‘영원한’ 이미지를 제시한다면, 역사적 유물론자는 과거와의 유일무이한 경험을 제시한다.”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 16번에 나오는 말이다.
과거가 영원한 이미지로 고정된다면 지나간 원한과 울분은 결코 풀 수 없다. 과거가 변화하지 않는다면 혁명은 불가능하다. 세월호도 이태원도 지나간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영두가 다시는 원서동에 가지 않고 과거를 잊어버리려고 했던 마음은 과거가 변할 수 없다는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그녀는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맡으면서 일 때문에 대온실의 과거를 파헤치다가 자신의 과거도 마주한다. 마주한 과거들은 역사에 고정된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녀가 역사의 지층 속에서 발굴해낸 것들이다. 발굴된 과거는 한 장면을 향하고 그 사건은 소설의 클라이막스를 이룬다. 베일을 벗긴 역사의 비극이 어째서 영두의 상처를 구원하는 걸까? 역사의 한 장면은 한 시대 전체의 진실을 간직할 수 있다. 섬광과도 같은 과거의 이미지가 바로 그것이다. 이 이미지는 저절로 포착할 수 없다. 역사를 구성하겠다는 의도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영두가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쓰는 방식이 그것이었다.
영두는 왜 그렇게 아팠을까? 이미 일어난 사건을 없었던 일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방법으로도 상처를 낫게 할 수 없었다. 일어난 일, 저질러져 버린 죄는 돌이킬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과거가 이미 결정되어졌고 시간의 연속체 속에 콘크리트처럼 굳어 있다는 의식에서 나온다. 그래서 영두가 보고서를 쓰려고 마음먹고 대온실에 얽힌 과거를 파헤치자 굳은 역사가 아닌 발굴을 기다리는 생생한 과거가 드러난다. 시간의 연속체로서 굳어 있는 역사를 깨뜨리고 새로운 의미를 가져다준다.
“구원이 뭔데?”
“그건 수난이 그치는 거야.”
소설 속에서 영두와 순신이 나눈 대사다. ‘수난이 그치는 구원’은 개별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신학적인 의미에서 전체를 구원하는 것만이 진정한 구원일 것이다. 진정한 구원은 굳어버린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더불어 존재하며 의미를 갖는 과거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소설의 마지막에 나오는 우화의 교훈이 의미심장하다.
“인간의 시간과는 다른 시간들이 언제나 흐르고 있다. 세상 어딘가에는 지금이 아닌 시간이 흐르고 있다.”
시간은 단선적으로 흘러가는 연속적인 균질체가 아니다. 마블의 평행우주 세계관이 어쩌면 시간의 원래 모습에 가깝다. 우리가 진정한 구원에 다다르지 못한다 해도, 한걸음 더 내딛고 싶다. 내 모든 시간이 그쪽으로 모아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