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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주연 Apr 01. 2022

번역가의 딸

행복의 양면 

 딸아이와 나는 코로나에 걸려서 골골거리고, 음성 판정을 받았던 남편마저 끙끙 앓는 상황이 되자 우리 가족은 본의 아니게 끈끈한 가족애를 보여줘야 할 상황에 처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세 사람이 거의 동시에 아프니 무슨 호러 영화에 나오는 좀비라도 된 것처럼 팔다리의 움직임이 어색하고 입 밖으로는 신음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나마 제일 빨리 걸린 딸아이는 회복되고 있는 것 같고, 나는 딸아이 다음으로 초기에 겪어야 할 견디기 힘든 증상들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 아직 조금은 버거운 싸움을 하고 있다. 남편은 이제 막 오한이 오고 열이 오르내리는 걸로 봐서 확신하기는 힘들지만 역시나 코로나일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다. 


평소처럼 몸이 건강하다면 밀린 번역을 잔뜩 하겠지만, 몸이 아프니 집에 있어도 컴퓨터 앞에 오래 앉아있기가 힘들다.  간신히 남아있는 힘을 짜내서 번역을 하고 나니 과자를 먹는 딸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딸, 코로나 걸렸을 때 과자는 아니지? 

-아, 과자는 해로워요? 

-그럴걸? 

-그럼, 뭘 먹어요? 야채? 과일? 

-오렌지 줄까? 

-네! 오렌지 주스 만들어주세요!

-그래! 나도 마침 그러려고 했어. 


오렌지 3개를 껍질을 까서 믹서기에 넣고 신나게 간 후에 믹서기 안을 보니 그건 오렌지 주스라기보다는 오렌지 죽에 더 가까웠다.  평소 같으면 그런 상태로는 절대 먹지 않는 딸이 주는 대로 먹는다. 

-엄마, 오렌지 주스 맛이... 

-어떤데? 

-맛을 잘 모르겠어요. 

-아, 그래? 

나는 속으로 안도해야 할지 안쓰러워해야 할지 갈팡질팡하다가 그래도 그렇게 해서라도 딸이 먹는 편이 좋지 않나 싶은 생각으로 말했다. 


-진짜 맛이 안 느껴져? 

-음... 단 맛이 조금 느껴지긴 해요! 


그리고 잠시 후에 나는 어제부터 먹고 싶던 식빵을 만들어보리라 마음먹고 반죽을 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딸이 말한다. 

-엄마, 이제 그렇게 반죽하고 나서 뭘 더 넣는 거죠? 

-오! 똑똑한데! 뭘 넣을 것 같은데? 

-버터요! 

-왜? 

-버터가 반죽 바로 옆에 있기도 하고... 

-버터 말고 텀블러랑 저울도 옆에 있는데... 

-에이, 바보가 아닌 이상 설마 텀블러랑 저울을 넣겠어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넌 처음부터 버터만 넣어야 한다고... 다른 건 절대로 안된다고 생각하면서 말한 거네? 

-그런 셈인데요... 설마 버터 말고 또 들어갈 게 있으려고요? 

-그렇긴 하지.  그런 걸 일종의 상식이라고 하지. 

-그러니까 ''정상'' 말이죠? 

-그럴 수도 있지! 


잠시 후에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내가 말했다. 


-나 며칠 동안 안 씻었어. 

-뭘요? 
-음... 역시 넌 내 딸이야... 

-네? 

-보통 한국사람이라면 '어디'라고 할 텐데, 넌 '뭘'이라고 질문했으니까. 뭐랄까... 그러니까 넌 내 말을 ''나는 내 몸이나 알 수 없는 사물을 며칠 동안 안 씻었어.'라고 이해했고, 그래서 너는 '뭘요?'라고 질문을 한 거지. 역시 번역가의 딸 다워. 뭐랄까... 사고의 틀이 유연하다고나 할까. 

-그게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일인가요? 

-그렇지? 


바이러스의 힘을 빌려서 일상의 행복을 되찾았다면... 이젠 바이러스만 쏙 뺀 행복을 소유하고 싶다. 

 


#코로나 #일상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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