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중한 책임감
롯데슈퍼에서 생멸치가 보이길래 한 팩을 샀다. 요리는 내가 하겠지만, 손질은 남편에게 부탁했다.
-여보, 나 멸치한테 미안해서 손질은 당신이 해줘요.
-아니, 끓이는 건 안 미안하고?
-손질하면 눈이 잘 안 보이니까...
멸치 손질을 끝낸 남편이 내게 손질된 멸치를 건넸다.
-꽤 많네. 실패하면 안 되겠다는 막중한 책임감을 떠안은 것 같아.
-맛있겠지 뭐. 당신 요리 잘하니까.
얼마나 끓였을까, 멸치조림이 다 돼서 남편과 나는 식탁 앞에 앉았다. 남편은 조림을 먹으려고 앉은 것이고, 나는 남편이 먹는 모습을 보려고 앉았다.
-여보, 맛이 어때?
-맛있어.
-안 비려?
-응, 안 비려. 그런데 가시가 많이 거슬리네.
-아, 다음번엔 가시도 손질할 때 버려야겠네.
-머리는 맛이 어때?
-잘 모르겠어. 살이 너무 없어서...
-몸통 맛은?
-멸치 맛이야.
나는 잠시 생각해봤다. 멸치가 멸치 맛을 내는 건 당연한데, 과연 멸치가 멸치 맛을 낸다면 맛있는 건지 조림을 1도 먹어보지 않은 나는 아무리 머릿속으로 맛을 상상해보려 해도 와닿지가 않았다.
-냄새는 정어리 냄새가 나는데. 정말 멸치 맛이야?
-응, 멸치 맛 나. 나쁘지 않은데.
이쯤 되면 한 번 먹어볼 만도 하지만, 나는 굳게 다문 입과 '생멸치는 비릴 거야'라는 생각으로 가득 찬 내 뇌를 설득할 자신도 없었고, 설득할 생각도 없었다.
-인터넷에 보니까 쌈밥집에서 멸치조림을 내놓더라고.
-그러니까. 맛은 나쁘지 않아. 그런데 이것도 생선이라고 생각보다 가시가 억세네.
-또 해 먹을까?
-글쎄. 맛은 있는데. 큰 생선은 한 마리만 손질하면 되는데 얘네들은 한 번 먹으려면 수십 마리를 손질해야 하니까 귀찮긴 해.
생멸치 조림 실험은 맛으로 보면 성공한 축에 속했지만, 노력에 비해 입 속에 들어가는 살이 적고, 생각보다 가시가 억세서 내년에나 한 번 더 먹을 것 같다. 그나저나 세상은 넓고 식재료도 많다.
오늘 실험도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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