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하긴 했지만, 그런 식으로 들어갈 생각은...
‘나’란 문맥에 대해 말하자면…
사실 나는 내가 하는 일 외에는 디테일이 심하게 떨어진다. 이를테면, 진짬뽕을 샀다고 생각했는데, 진라면을 샀다던지, 마트 가서 장 본 것을 장바구니에서 모두 꺼냈다고 생각했는데, 오이를 깜빡 잊고 안 꺼내서 오이가 그 안에서 숙성됐던 적도 있고, 물건을 잘 못 찾는 건 비일비재한 데다 게다가 심한 길치이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나: 오이를 내가 분명히 산 것 같은데…
남편: 나도 그런 것 같은데, 왜 없어?
나: 응. 어디에다 뒀지? 오이는 박스에 넣어서 가져왔거나 장바구니에 넣어서 가져왔을 텐데. 냉장고에는 아무리 봐도 없고.
남편: 장바구니 봐봐.
나: 에이. 설마. 나 그 정도는 아니야.
남편: 당신이라면 미안한데, 충분히 그럴 수 있어.
나: 이 정도는 아니라고 봐.
이 말을 하고 나는 설마 하는 생각과 오이에게 ‘제발 장바구니에서 나오지 말아 다오’라는 주문을 외우며, 장바구니에 다가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노랗게 익은 오이를 보는 순간의 허탈함과 민망함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당시에 오이는 비싼 편이었고, 다행히 오이의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나는 그 오이로 피클을 만들어서 맛있게 먹었다.
자, 그런데 만약 ‘길치+디테일 없음’이 힘을 합친다면? 아, 정말이지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 일어나버리고 말았다. 장소는 마트였고, 자주 가던 곳이 아니었다. 나는 보통 때처럼 화장실의 남녀 표시를 대충 보고, 무슨 자신감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성큼성큼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한 가지 잊고 말 안 한 것이 있는데, 게다가 나는 행동이 느리다. 눈치도 없는 편이고, 반응도 느린 편이다.
화장실 안으로 꽤 많이 들어갔을 때까지도 나는 무슨 문제가 있는지, 뭐가 잘못됐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는 눈치도 없고, 느리게 생각하는 데다 반응 속도도 느리기 때문이다. 조금 걸어 들어가자 세면대가 보였다. 자세히 보나 대충 보나 평범한 세면대가 틀림없었다. 그런 다음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화장실 칸막이로 향했다. 그런데 그 칸막이라는 것이 내가 평소에 보던 모습과 조금 달랐다. 뭐라고 꼭 집어서 말할 수 없는 싸한 느낌이 있다고 할까… 다행히도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화장실 벽을 보는 내 시선이 뭔가 내가 평소에 보던 풍경과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것을 보았고, 보고도 믿지 못했다. 한 사람이 있는데, 벽을 보고 서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나는 화장실 한쪽 벽에 하얗고 기다랗고 미끈하게 생긴 무슨 장치 같은 것이 일렬로 서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제야 내 머리는 내게 ‘야, 남자 화장실이잖아! 어서 빨리 나가!’라는 사인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를 등지고 서서 평소와 다름없이 볼 일을 보고 있던 그, 그러니까, 그녀가 아니라, 유감스럽게도 그와 눈이 마주쳤다. 칸막이 안쪽 상황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칸막이 밖에는 그 남자밖에 없었다. 불행히도 나는 여러모로 불리할 수밖에 없는 ‘문맥’을 지닌 사람이었다. 행동이 느리고, 눈치도 없고, 반응까지 느린 나로서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이 위기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지금처럼 마스크를 쓰고 있지도 않은 상황에서 내 얼굴을 기억하지는 않을지 생각만 많았다. 미안하다고 말해야 할까? 미안하다면 뭐가 미안한 걸까? 내가 혹시라도 그 사람의 신체의 일부를 봤다고 오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아무 말도 없이 그냥 나와도 괜찮은 걸까? 어쨌든 나는 그들의 영역을 ‘무단 침입’ 한 거고, 그건 자의든 자의가 아니든 잘못된 것이다. 다행히도 남자는 자기 일에 집중하느라 내가 남자가 아닐 것이라는 의심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남자라면 어서 빨리 볼 일을 보러 칸막이 안으로 들어가던지 아니면, 그 남자처럼 벽에 붙어 있는 매끈한 녀석 앞으로 가서 볼 일을 봐야 할 것이다. 만약 이 두 가지 행위 중 하나도 하지 않을 경우 그는 분명 뭔가가 잘못됐다고 생각할 것이며, 내가 남자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의심할 것이다.
결국 나는 성큼성큼 들어올 때처럼 성큼성큼 뒷걸음질 쳐서 나가는 쪽을 선택했다. 다행히 다른 남자가 화장실에 들어오지 않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가족들 품으로 돌아갔다.
어쩌면 그때 그 남자분 나를 배려해서 내가 여자인 걸 알고도 모른 척해줬을지 모른다. 그분이 이 글을 보실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미처 못다 한 말을 하고 싶다.
‘미안해요. 그땐 제가 경황이 없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