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망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예의
어젯밤 열 시였다.
늦은 저녁상을 받아놓고 김기사가 말했다.
곱창볶음을 사 와 볶아줬다.
매운 걸 좋아하니 불닭소스도 조금 넣었다.
나는 간도 못 보고, 한 숟갈도 못 뜨면서.
그런데 돌아온 말이 이랬다.
“고기 맛 다 가려서 맛없다.
나니까 먹어 주는 줄이나 알아라.”
마음이 상했다.
마음 상한 채로 하는 살림은
생각보다 몸이 더 무겁다.
그런데도 멈추지는 않는다.
아니, 이상하게도 손은 또 움직인다.
오늘도 나는
도시락을 쌌다.
닭갈비를 볶고
시금치나물을 무치고
포기김치를 담고
어묵탕을 끓였다.
마음이 상한 채로 하는 일상은
소리가 없다.
소리 없이 무거워지고,
소리 없이 계속된다.
그래서 오늘은
이럴 때를 위해 아껴두었던 시를
도시락에 함께 넣어 보내고 싶었다.
나를 키우는 말
이해인
행복하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정말 행복해서
마음에 맑은 샘이 흐르고
고맙다고 말하는 동안은
고마운 마음 새로이 솟아올라
내 마음도 더욱 순해지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잠시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마음 한 자락이 환해지고
좋은 말이 나를 키우는 걸
나는 말하면서
다시 알지
— 이해인, 『서로 사랑하면 언제라도 봄』
좋은 말은
상대를 바꾸기 위해서라기보다
나 자신을 망가지지 않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상처 주는 말을 들은 뒤에도
그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지 않기 위해,
나까지 거칠어지지 않기 위해
나는 시를 꺼내 든다.
도시락에 담긴 건
음식만이 아니다.
오늘 하루를 견디는 태도 같은 것.
고운 말을 선택하는 일이
결국은 나를 키우는 일이라는 걸
나는 이렇게
부엌 한켠에서
다시 배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나는 오늘도
도시락에
고맙다는 말,
아름답다는 말 같은
나를 키우는 말들을
꾹꾹 담아 보낸다.
그리하여
내 마음 한 자락이
조금은 환해지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