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24년 차, 만남이 나를 드러낼 때
“네가 내 여행이잖아. 잊지 마.”
— 정세랑, 『지구에서 한아뿐』
세상에 이렇게 힘든 여행일 줄이야.
지도도 내비게이션도 다 무용지물.
파워 J의 치밀하고 주도면밀한 계획 따위는
출발 3분 만에 휴지 조각이 된다.
고행이다.
고집불통에 우격다짐.
다들 이미 눈치챘겠지만
우리 집 김기사 이야기다.
결혼 24년 차.
예나 지금이나 씻는 걸 죽도록 싫어라 하고,
건강검진은 연말까지 미룰 수 있을 만큼 미루면서도
술 줄여라, 끊으라는 잔소리에는 꿈쩍도 안 한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마신다.
집안일은 무슨 역병처럼 피해 다니고,
내가 청소기 돌리면
왼쪽 궁둥, 오른쪽 궁둥만 요리조리 굴린다.
줘 패고 싶...(숨 좀 고르고 올게요. 휴~~~)
사람의 본성을 끝까지 시험하게 만드는
아주 뛰어난 재주를 가진 여행지다.
차라리 우주여행이라고 생각해야 속 편하려나.
이미 목적지에서 한참 멀어진 채
지구 밖을 유영하고 있다고.
그래도 어쩌겠나.
내 여행이잖아.
잊지 말라고 했으니까.
만남은
상대를 알아가는 일이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게 되는 일이라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렇다.
김기사라는 여행지는
지도 없이, 안내 없이,
예측도 불가능한 곳인데
그 안에서 나는
내 성질, 내 인내심,
내가 어디까지 버티는 사람인지
적나라하게 알게 된다.
그래서 어쩌면
나는 애초에
다 읽히고,
정확한 시간에 도착하고,
계획대로 흘러가는
그런 여행지를 선호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너무 정확하고,
너무 친절하고,
너무 따뜻해서
굳이 애쓰지 않아도 되는 관계들.
그런 친구들 곁에서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굳이 들여다볼 필요가 없었으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다 읽히던 마음들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예측 불가한 궤도를 도는
안드로메다 같은 이곳에
정착해 버린 것도
우연은 아닌 것 같다.
깜깜한 어둠 속을
둥둥 떠다니며
방향도 모른 채 헤집고 나가야 하는 곳.
그래서 불편하고,
그래서 자주 짜증 나고,
그래서 자주 나 자신을 마주하게 되는 곳.
만남은
결국 나를 드러내는 일이라면,
나는 아마
이렇게 나를 계속 들춰내는
여행지를 선택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힘들어도,
멀미가 나도,
도망치고 싶어도.
네가 내 여행이니까.
잊지 말라고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