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발잔등이 부었다고

김종삼의 「묵화」를 곁에 두고, 김사인의 「조용한 일」을 곁에 앉히며

by 랑이네 글밥집

물 먹는 소의 목덜미에

할머니의 손이 얹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김종삼의 시 「묵화」를 다시 읽는다.


예전에는 그저 담백한 수묵화 한 장면처럼 스쳐 지나갔던 이 시가,

요즘은 자꾸 마음 한 구석을 붙잡는다.


아마도 시 속의 할머니와 소가 나누는

그 조용한 교감이

지금의 내 삶과 너무 닮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할 때


왼쪽 팔꿈치에 통증이 다시 도졌다.

2년 전, 집에서 가볍게 시작했던 홈트레이닝이 화근이었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찬바람이 불면 어김없이 찾아온다.

허리도 종종 아프다.


오십을 향해 가는 몸은

여기저기서 삐걱거리는 소리를 낸다.


고작 운동하다 생긴 통증 하나에도

마음까지 이토록 수그러드는데,

평생을 몸으로 살아온 사람의 통증은 어떠할까.


내가 아파보니,

그동안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요즘은 김기사가

누웠다 일어날 때,

의자에서 몸을 일으킬 때

무심코 흘리는 짧은 탄식이

유난히 또렷하게 귀에 박힌다.


“아이고.”

“허리야.”


십수 년 동안 매일같이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나르며 살아온 몸이다.

성할 리가 없다.


그 무게들이 그의 연골과 근육을

조금씩 닳게 할 동안,

나는 그 신음들을

생활의 배경음처럼 흘려보냈는지도 모른다.


비누 향보다 먼저 밴 땀 냄새


현관에 놓인 그의 낡은 작업화가

오늘따라 유난히 뒤축이 꺾여 있다.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 끝에,

비누 향보다 먼저

밴 땀 냄새가 훅 끼쳐온다.


저 젖은 손을 닦아주는 대신,

나는 조용히 저녁 상을 차린다.


김기사가 좋아하는

묵은지고등어조림과 굴국.

말없이 국에 숟가락을 담그는

그의 등을 보며,

오늘 하루의 무게가

조금은 풀리기를 바라본다.


그때,

호두는 김기사가 벗어놓은

고린내 나는 양말을 물고

뺏길세라 부리나케 도망가며

꼬리를 흔든다.


저이는 아프다는 말을 오래 참아온 사람이다.

힘들다는 말도,

몸이 먼저 무너지고 있다는 신호도

좀처럼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그래서 이제야 마음이 쓰인다.

아니, 미안해진다.


그냥 곁에 있는 일


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 김사인, 「조용한 일」


요즘의 저녁이 꼭 그렇다.

뾰족한 해결도, 근사한 위로도 없이

그냥 같이 있는 시간.


함께 나이를 먹는다는 건

아마 이런 일일 것이다.


말없이 서로의 몸을 살피고,

부은 발잔등을 알아보고,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가슴속에 쌓인 적막의 깊이를

짐작하는 일.


시 속에서 할머니와 소가 그러했듯,

그리고 김사인의 시 속 낙엽처럼,

우리는 서로에게

굳이 말을 걸지 않아도

곁에 있어주는 쪽을 선택하며 산다.


오늘도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같은 하루를 건넜다.


고단한 노동을 마치고 돌아온

김기사의 굽은 등 위로,

나도 시 속의 할머니처럼

그리고 낙엽처럼

가만히 마음 한 자락을 얹어본다.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이 하루도,

무사히 함께 지났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