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의 문장과 김기사의 초록 병
소주는 아귀다툼하고 희로애락하고 생로병사하는 이 아수라의 술이다. 소주는 인간의 기쁨과 슬픔, 소망과 좌절을 멀리 밀쳐 내고 또 가까이 끌어당겨서 해소하고 증폭시키면서 모두 두통으로 바꾸어 놓는다. 소주는 생활의 배설구였고 종말처리장이었는데, 나 역시 거기에 정서를 의탁해서 힘든 날들을 견디어 왔다.
— 김훈, 『허송세월』 중에서
나는 소주를 마시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마시지 못한다.
이십 대 초반, 술자리의 기억은 늘 성당 주일학교 교사 모임이나 대학 친구들과의 떠들썩한 공기로 채워져 있었다.
그 시절 내가 잔을 채웠던 건 주로 시원한 맥주나 달큰한 동동주였다.
소주는 예외였다.
소주잔을 기울였다 하면 백이면 백 구토가 뒤따랐고, 속은 타들어 갔으며, 정신은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는 인사불성 상태가 되었다. 특유의 쓴맛과 코끝을 찌르는 화학 약품 같은 요상한 냄새. 그 이물감 탓에 소주는 도무지 내 목구멍을 부드럽게 통과하지 못했다.
그렇게 소주는 내 인생에서 일찌감치 ‘멀리해야 할 존재’로 낙인찍혔다.
오십이 된 지금, 나는 한 달에 한두 번도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
술기운이 주는 잠깐의 망각보다, 다음 날 찾아오는 지독한 숙취가 더 무섭기 때문이다. 계획해 둔 운동을 거르게 되고, 하루의 컨디션을 통째로 망가뜨리는 그 비효율이 싫어 잔을 밀어낸다.
맑은 정신으로 맞이하는 아침의 활기를 술 한 잔과 맞바꾸기엔, 내 하루가 너무 소중해졌다.
하지만 내 곁에는 나와는 정반대의 궤적을 그리는 사람, 나의 ‘김기사’가 살고 있다. 그는 소주 애호가를 넘어 소주 의존가에 가깝다.
그가 비워내는 초록색 병들이 늘어날수록, 나는 소주를 더욱 밀어내며 살게 되었다. 술 냄새와 함께 돌아오는 그의 고단한 저녁이 때로는 야속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훈의 문장 앞에서는 멈춰 서게 된다.
소주가 ‘생활의 배설구’이자 ‘종말처리장’이라는 그 지독한 비유에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진실이 담겨 있어서다.
몸이 부서져라 가가호호 짐을 나르고,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종종 대며 하루를 버티는 김기사에게 하루 동안 쌓인 아귀다툼과 생로병사의 피로를 쏟아낼 곳은 어쩌면 그 투명한 액체가 담긴 잔 뿐이었을지도 모른다.
낮 동안의 소망과 좌절을 억지로 밀어냈다가, 다시 끌어안았다가, 결국 두통으로 바꾸어 잠재워야만 다음 날 다시 아수라 같은 세상으로 나갈 힘을 얻는 그 고단한 루틴.
내게는 도저히 넘길 수 없는 ‘약품’인 소주가, 누군가에게는 하루의 쓰레기를 태워 없애는 마지막 보루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이해한다.
물론 이해와 선호는 별개의 문제다.
나는 여전히 소주가 싫다.
그 지독한 냄새도, 정서를 의탁한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 건강의 손실도, 내 방식은 아니다.
하지만 오늘 저녁, 식탁 한쪽에서 초록 병을 따는 김기사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한다.
오늘 하루 그가 처리해야 했던 ‘종말’은 얼마나 무거웠을까.
내가 차려낸 묵은지고등어와 따뜻한 어묵국물이 그의 종말처리장에서 조금이라도 완충 작용을 해주길 바랄 뿐이다.
비록 나는 사발면 국물로 속을 달래고, 그는 소주로 하루를 비워내지만, 우리 각자의 방식대로 이 거친 세상을 견뎌내고 있다는 점만은 같다.
소주는 여전히 싫다.
그러나 그 잔에 담긴 한 남자의 노고까지 미워하지는 않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