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 속을 유영하다 식탁으로 돌아오는 시간
"나는 책을 자꾸 읽어서 어쩌자는 것인가.
책 보다 사물과 사람과 주변을 더 깊이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늘 다짐하면서도 별수 없이 또 책을 읽게 된다."
— 김훈, 《허송세월》 중
나도 그렇다.
책보다는 곁에 있는 사람을, 종이보다는 살아있는 사물을 더 깊이 들여다봐야 한다고 다짐하면서도,
일요일 오전의 고요가 찾아오면 나는 별수 없이 다시 책을 펼친다.
몸을 움직여 만들어 낸 평화
일요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반려견 호두의 산책부터 시작했다.
공원에서 한 시간 동안 함께 걷고 뛰었다.
돌아와서는 화장실 청소를 하고, 빨래를 돌리고, 집안 구석구석 청소기를 밀었다.
두유 한 컵에 삶은 달걀, 그리고 깎아놓은 배 몇 쪽을 먹고 나니 시계는 오전 11시 30분을 가리킨다.
육신의 의무를 다 마친 뒤 찾아온 적막.
몸이 고요해지자 마음은 기다렸다는 듯 다시 문장을 찾는다.
호두를 무릎 위에 앉히고 이틀째 같은 책, 김훈의 《허송세월》을 펼친다.
‘사물과 사람을 더 깊이 들여다봐야 한다’는 문장을 읽으며 다시 문장 속으로 침잠한다.
이게 무슨 허송세월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오늘도 기꺼이 이 우아한 낭비 속에 머물겠노라고 답하고 싶다.
꿈과 식탁 사이의 유영
문장 속을 유영하며 비몽사몽 꿈을 꾸는 듯한 시간.
활자들은 때로 안개처럼 흩어지고 때로 바위처럼 단단하게 가슴에 박힌다.
그 아득한 사유의 한복판에서, 나는 문득 저녁 식탁에 오를 메뉴를 고민한다.
무엇을 볶고 무엇을 끓여야 고단한 몸으로 돌아올 김기사의 허기를 달랠 수 있을까.
방금 읽은 김훈의 문장과 오늘 저녁에 올릴 찌개의 간 사이를 오가며,
나는 관념과 실재가 뒤섞인 묘한 경계에 서 있다.
각자의 방식으로 지켜내는 집
이 평화로운 허송세월의 배후에는 남편 ‘김기사’의 고단한 노동이 있다.
일요일임에도 그는 동료 네 명분의 물량을 감당하기 위해 무거운 뒷모습으로 현관을 나섰다.
평생을 몸으로 정직하게 일하며 가족을 먹여 살려온 남자와,
평생 문장 속에 살고 싶은 이토록 다른 여자가 만나 한 지붕 아래 살고 있다.
이 극명한 대비가 새삼 영화 속 클로즈업 장면처럼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는 밖에서 육중한 삶의 무게를 버텨내고,
나는 안에서 종이 한 장의 가벼움으로 삶을 해석한다.
남편이 밖에서 가져온 삶의 무거움을,
내가 읽은 문장의 온기와 정성껏 차린 저녁 식탁의 맛으로 상쇄하고 싶다.
오늘 나의 허송세월은 남편의 성실한 노동에 빚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더욱 정성껏 문장을 읽고, 더욱 다정하게 그의 저녁밥을 고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