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나에게 40일의 시간이 남았다면

시트콤처럼 끝나버린 어느 엄마의 사순 시기 묵상

by 랑이네 글밥집

어제 미사에서 신부님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셨다.

“만약 여러분에게 40일 후의 죽음이 예고된다면,

무엇이 가장 급합니까?

남은 시간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40일 후에 죽는다니.

남은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
(와병 상태로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 아님을 전제로 말이다.)

이성적이고 차분한 유품 정리

아마 나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을 보낼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강아지 호두의 밥부터 챙기고,
남편과 딸의 아침을 차릴 것이다.

평소처럼 어린이집으로 출근해 아이들과 신나게 놀고,
낮잠 자기 싫어하는 아이들의 온갖 핑계에 귀여운 눈속임에 기꺼이 속아 주며 시간을 보내겠지.

“선생님, 물 조금만 마셔도 될까?”
“선생님, (5분 만에) 또 쉬 마려워요!”

아이들의 귀여운 눈속임에 또 한 번 넘어가 주며 하루를 보낸 뒤,
집으로 돌아와서는 남편 김기사와 딸을 위한 저녁밥을 지을 테다.

다만 틈틈이 이어지는 늦은 오후의 시간들은 조금 바빠질 것 같다.

장롱과 싱크대, 책장과 신발장 구석구석을 비우며
내 유품이 될 물건들을 하나씩 처분할 것이다.

가족들이 용도를 모를 물건들은 없애고,
자주 쓰던 물건들엔 포스트잇으로 설명서를 붙여두리라.

냉장고 문에는 남편과 딸이 그나마 도전해 볼 만한
된장찌개와 떡볶이 레시피를 베스트로 선정해 붙여놓고,

호두의 사료량과 영양제 투여량도 꼼꼼히 적어둘 것이다.

통장과 보험증권도 한데 모아 가족들에게 일일이 설명해 주고,
마지막으로 장례미사에 대한 내 의견도 나누고 싶다.


“엄마, 혹시 호두야?”

살면서 용서받아야 할 이들을 떠올리며 기도를 바치고,
고마웠던 이들에게 안부 전화를 돌리는 일까지는
참 맨 정신으로,
눈물 없이
아주 이성적으로 끄적일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집 강아지 호두를 생각하는 지점부터였다.

호두를 떠올리자마자 목이 메어왔다.

‘40일 후에 죽는다고? 아니, 나는 죽을 수가 없다!’

남편과 딸은 사람이니까 슬퍼하다가도 어떻게든 살아갈 테지만
(내 생각인가?)

호두는 다르다.

내가 없으면 우리 호두 산책은 누가 시키고 종일 호두는 누구랑 같이 있을까.
엄마 분리불안이 있는 저 작은 생명이 나의 부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적응할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더 이상 상상조차 하기 싫어졌다.

절대 못 죽겠다.

“호두야 미안하지만, 엄마보다는 네가 먼저 무지개다리 건너야겠어!”

저녁 무렵, 딸에게 미사 때 했던 묵상을 털어놓았다.
짐 정리니 보험이니 차분하게 이야기하다가 결국 끝에 가서 목소리가 떨리고 말았다.

“그런데 효림아, 엄마는 그 다음부터는 더 이상 생각하기가 싫더라. 눈물 참느라 혼났어.”

내 눈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본 딸이 묻는다.

“엄마, 혹시… 호두야?”

“응…”

“흑흑, 호두는 엄마 없으면 아마 우울증 걸릴 거야. 호두는 어떡해…”

딸과 중년의 엄마가 마주 앉아 훌쩍이며 ‘생쇼’를 하는 모습이라니.
남편이 보면 “둘이 놀고 자빠졌네.”라고 할까 봐 얼른 눈물을 훔쳤다.
경건하고 근엄할 줄 알았던 나의 사순절 묵상은 이렇게 한 편의 시트콤처럼 끝이 났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죽음이 임박했다고 가정해 보니 비로소 보였다.

내 삶에서 무엇이 그토록 소중했는지,
내가 끝까지 손에서 놓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이다.

비록 눈물 콧물 쏟으며 웃음으로 마무리된 묵상이었지만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삶이란 어떤 삶인가’에 대한 나의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들의 밥 때를 걱정하고,
낮잠 안 자려는 아이들의 투정을 받아주고,
남겨질 작은 생명의 슬픔을 미리 아파하는 것.

어쩌면 그 지독한 사랑 안에
이미 답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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